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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ul 13. 2021

"나의 학생, 그리고 나의 한 사랑 (6)"

"가보지 못한 Nyack 의 추억들"에 딸린 소소한 기억들

1999년 늦가을의 Flushing (NY) 의 밤 풍경이 위 사진과 같은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추억을 하다 보면 그때 왜 사진을 찍지 않았는지에 대한 후회가 가장 처음 들게 되지요. 당시에는 LED lighting 도 없었기에 가게들의 조명은 모두 형광등으로 되어있어서, 한 해가 가을에 접어들고 늦가을로 들어가는 11월에는 초저녁 형광등 불빛이 그렇게도 을씨년스럽고 매정하도록 외롭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혜는 제가 마련해 준 직장에서 아주 열심히, 그리고 잘 다니고 있었습니다. 워낙 똑똑했던 아이라 call center 업무는 사실 너무 쉬운 것이었지요. 이런저런 금을 제외하고 고작 200불이 조금 넘는 주급이 너무 적었지만 그래도 제 생각에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은행권에서 자리를 잡고 조금씩, 아니면 재능을 발휘해서 더 빨리 회사 내 다른 부서로 - 맨해튼으로 - 옮기길 바랬습니다. 너무 자주 연락하면 부담스러워할까 하여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전화로만 연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내심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하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도 마음에 언제나 두고 몇 개월을 지냈지요.


지혜와 다시 만나기 전, 그녀의 4년간의 이야기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Nyack 이란 북쪽의 한 작은 도시에서 단과대학을 다닌 후 한인타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 외엔, 제가 지혜에게 지난 몇 년간의 삶에 대해 물어보면 왠지 그냥 울어버릴까 봐, 그리고 밝지 못한 나날이었음이 추정하기로는 확실했기에 미안하여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어떤 한 우연한 계기에 그녀의 친구로부터 지혜의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Flushing 의 어느 한 법률사무소에서 직원으로 근무한다는 20대 초반의 어느 한 남자로, 저보다는 4살 아래라는 이야기와, 그래도 꽤나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혜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접하니, 질투가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지요. 당시엔 질투가 아닌, 그 감정 - 이런 경우 남자들이 보통 가지게 되는 - '아끼는 동생 같은 여자아이를 그 어느 위험요소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나름대로는 합리적으로 선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질투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접한 후 왠지 지혜로부터도 마음이 뜨더군요. 한 달에 두어 번 하던 연락도 하지 않고 또 두 달이 지나갔지만, 서운하게도 지혜 또한 제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녀는 사실 제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지요.


자본시장이 bloodbath를 한 어느 날 저녁 (당시는 dot.com 버블이 깨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왠지 저는 지혜가 일하는 Jericho 에 위치한 call center 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장 마감 후 바로 차를 몰 향한 그곳, Long Island Expressway 를 타고 다시 Northern Parkway 로 갈아탄 후 Jericho 에 도착하니 오후 4시 40분이더군요. 다행히 지혜의 퇴근시간 3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날은 왠지 그 애와 맛있는 음식을 같이 하고, coffee 도 하고, 그 후 시간에도 department store 가 열려있다면 짧게나마 지혜와 같이 shopping 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저런 상상과 계획을 하고 나니 벌써 5시 10분 전이더군요. 늦기 전에 지혜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Hi, Jihye. Jay here."

(지혜! 나야)

"Oppa! It's been so song! How are you?"

(오빠!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I am doing good as usual. Are you off soon?"

(평소같이 잘 지내지, 뭐. 일 곧 끝나니?)
"Yeah. Oppa, can I call you later? I think I need to catch my train at 540 pm."

(네. 오빠, 나중에 제가 전화해도 될까요? 540분 기차 타야 하거든요)

"Come on out. I am right in front of the building. I will drive you home."

(빌딩 바깥에 있으니까 내려와. 집에 데려다줄께)


그 후 약간의 정적 같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통 "같이 집에 가자, 태워다 줄께" 하면 "네!" 하고 바로 좋아하던 지혜가 그날만은 답을 바로 하지 못하더군요. 사실 2초도 안 되는 짧은 pause 였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저함' 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OK! I will be right out then!"

(네, 바로 나갈께요!)


지혜가 왜 주저했을까? 내가 온 것이 부담이 되었을까? 몇 달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온 내 실수겠지? 내가 귀찮아진 것일까? -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간다고 할까?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고 기차역까지만 바래다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제 마음속이 이상하게도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지요.



이런 생각 속에서 헤매고 있던 10여분 후, 5시 10분쯤에 지혜가 나왔습니다. 건물의 안쪽 어두운 곳에서 어느 한 사람이 뛰어나오는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느릿느릿 걷거나 또는 나이 든 직원들이 많은 그곳에서 그렇게 뛰어나올 정도로 발랄하고 젊은 사람은 아마도 단 한 사람, 20대 초반이었던 지혜뿐이었을 테니까요. 밖에는 해가 지고 있었고, 늦가을 노을이 유난히도 강렬했던 오후였습니다. 오렌지색 햇빛이 Jericho Quad 에 꽤나 긴 나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곧 긴 머리의 지혜의 모습이 건물 입구에 보였습니다. 어깨까지 내려온 길지만은 않은 머리카락, 한국의 그 여배우 같은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띠고, 제게 그 긴 팔로 '안녕'이라고 인사하듯 손을 크게 흔들며 제가 있는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지요. 그녀의 머리카락이 오렌지색 노을에 물든 듯 출렁이고 있었고, velvet jacket 을 입고 있는, 그리고 Julia Roberts 의 그 긴 부츠는 아니었지만 (in "Pretty Woman - 1990") 꽤나 긴 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지혜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지요.


바로 10여분 전에 전화에서 들었던 주저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지혜는 제 차의 조수석 쪽 문을 열고 상반신을 숙인 후 제게 아주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Hi, Oppa! Can I get in?"


미소가 유달리 큰 지혜, 여성들의 화장방법에 대해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색조가 늦가을에 맞는 makeup 을 한 듯 했습니다. 마스카라라고 하나요? 그녀의 큰 눈이 왠지 더 깊고 짙게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 이유인 듯 했습니다. 늦가을의 초저녁 다소 쌀쌀한 바람과 함께 그녀의 향기가 차 안에 들어오더군요 - 행복이 이런 것일까? 이런 느낌을 지혜를 대상으로 가져도 되는 걸까? 내 눈앞에 나타난 이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사람.. 이 여성이 내가 정말 아는 사람일까? - 등의 생각들이 참 짧은 순간동안 머릿속을 지나가더군요.



전화를 통해 들은 지혜의 주저함 또는 침묵은 저도 모르게 어느새 제 기억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전에도 그랬듯이 지혜는 여전히 어디에 있던 간에 주변을 밝게 해 주는 선물을 가진 그런 사람이었지요. 퇴근시간 역방향이었지만 그래도 먼 길, Long Island Expressway 를 달려 맨해튼까지 2시간 정도 갈 예정이었기에 서둘러 Jericho Quad 를 떠났습니다. 몇 달을 못 본 어색함은 전혀 없이, 바로 어제 만났던 우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길을 달렸지요. 지혜는 맨해튼이 너무 멀다며 Flushing 에 가길 원했습니다. 상상했던 계획이 변경되어 약간은 실망했지만 저는 바로 Exit 23 로 빠져 Flushing Main Street 로 향했습니다.


- 다음 회는 마지막 회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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