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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ul 14. 2021

"나의 학생, 그리고 나의 한 사랑 (Final)"

"가보지 못한Nyack 의추억들"에 딸린 소소한 기억들


Flushing 에 들어선 우리는 우선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습니다. 오후 6시가 좀 넘은 시간이더군요. 90년대 후반 그 타운에서는 지금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식식당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외 중식당도 많았고 동남아시아 식당도 많았는데, 정작 일반 미국 음식점은 거의 없었기에 한 고민 - Main Street 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한인타운, 그리고 서쪽으로는 중국인 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던 당시, 우리는 서쪽을 택했지요. 지혜는 그 우중충한 동네에서 가장 깔끔한 딤섬 가게에 들어가길 원했고, 저도 동의했습니다. "맨해튼에서 식사-커피-드라이브-샤핑을 생각했던 일정보다는 아주 검소한 일정이 되겠다"라고 농담도 하며, 지혜와 저는 거기서 중식을 같이 했습니다. 여전히 발랄하고 할 말이 참 많은 그녀, 그래도 아직 , 아니 당연히 교포 2세의 그 독특한 모습과 행동, 그리고 표정과 어투는 여전했습니다. 이런 변두리 동네, 그것도 Chinatown, 거기에 중식당에 앉아서 겉모습만 한국인이고 실제는 한국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교포 2세, 그리고 미국식 습관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미국인이라고 해야 할 이 아이를 두고 앞에 있으니 기분이 꽤 묘하더군요. 어딘가 다 맞지 않는 요소들로만 가득 찬 영화의 한 세트/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진 1.5세인 저까지 포함된 그림이라니, 그 배경과 구성요소에 있어 매우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는 생각은 지금도 같습니다.


식사를 하고 난 후 public parking lot 으로 향했습니다. 시간은 7시 30분경, 그래도 아직은 상당한 분량의 저녁시간이 남아있었지요. 공기는 꽤 차가운 저녁이었습니다. 다리가 그나마 조금은 노출된 지혜가 추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그 애의 다리를 내려다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어보기도 참 난해하여 걷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ice cream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지혜 - 아마도 춥지는 않았나 보다 - 하는 생각을 하며 Main Street 동쪽 한인타운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녁식사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거기에 Flushing 이라 제가 희망하던 setting 은 아니었으나, 몇 달만에 지혜가 동행하는 저녁시간이라니 내심 마냥 행복했었습니다 - 하지만 이런 기분도 잠시, 저 몰래 자꾸 시계를 보는 지혜의 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약속이 있니? 내가 약속도 없이 와서... 미안."

"아니어요. 오빠. 괜찮아요. 아직 시간 많아요"


이렇게 말하며 지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옷차림, 그리고 많이 치장을 하고 나온 모습이 저와의 만남을 위해서는 아니었음을 저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 만남의 상대가 그저 그녀의 한 친구가 아닌, 아마도 Flushing 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을 한다는 그 친구, 그녀의 남자 친구일 듯하여, 지혜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제 기분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며 어둠이 이미 깔린, 가로등도 좀 희미한 길을 같이 걷고 있었지만, 그리고 아마도 내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지혜는 아마 그때 제 기분을 파악한 듯했습니다. 제 오른쪽에서 같다가 왼쪽으로 와서 걷고, 걸어가는 동안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제 얼굴을 관찰하기도 아며, 웬만해서는 하지 않던 제 팔을 간간히 잡아가며 또 가끔 제 손등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tap 을 해가며 제 분위기를 살피는 지혜를 보니, 제 마음이 드러난 듯하여 속상하더군요. 더는 안 되겠다... 욕심이다... 나 때문에 선약을 깨게 할 수는 없지... 하며 지혜에게 말했습니다:


"지혜야, 가봐도 돼. 같이 저녁을 하고 이만큼 같이 해 주어서 고마워. 충분해. 고맙고."

"..."


지혜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1분 정도를 그렇게 걸었습니다. Main Street 에서 Roosevelt Avenue 을 따라 동쪽으로 한 블럭을 올라온 후 "루이스약국"이란 약국을 끼고 Union Street 쪽으로 발길이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냥 아무 말하지 말고 같이 걸어요, 오빠. 밤공기도 좋은걸..."


그렇게 우린 걸었습니다. 그녀가 전에 말했던, 꽤나 북적이던 Morning Glory 이란 이름의 fancy shop 을 오른쪽으로 두고 지나친 후, 두 블럭을 지나 Sanford Avenue 너머까지 걸었습니다. 뉴욕의 가로수들은 수십 년이 된 것들이라 높고 넓어서 늦가을에도 말랐지만 아직 풍성한 잎들을 달고 있었는데, 바람에 나부끼며 버석거리는 그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흰색 가로등 불빛이 쓸쓸하게 그 빛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한 가로등을 지나 다음 가로등 사이를 걸으며, 우리 둘의 그림자가 짧아졌다가 길어지고, 그리고 그 다음 가로등을 지날 때면 다시 짧아지는 것을 보며, 아니, 그 그림자에만 집중하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걷던 기억이 아직도 있습니다.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에 우리는 길을 건너오던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지요. 어느새 지혜는 제 오른쪽에서 걸으며 동시에 제 오른팔에 그녀의 왼팔을 가볍게 걸고, 제게 기대는 듯 또는 아닌 듯한 자세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주일학교 선생님과 예전 학생의 사이는 아마도 이 정도의 간격이 적당했는지, 저도 그랬고 지혜도 아마 그 정도가 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다시 그 분주한 fancy shop 에 다다른 우리는 잠시 그 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미국에는 당시 한국에서 팔던 아기자기한 디자인에 colorful 한 소품, 학용품 등이 전혀 없던 때라 그 가게는 백인들, 흑인들, 히스패닉 아이들 및 교포 아이들, 그리고 다른 아시안계 학생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30대 이하 여자라면 꼭 가는 그런 장소였지요. 그날 저녁도 예외가 아니게 가게 안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저는 "들어갈래?" 라며 지혜에게 물어보니 "네" 하며 그녀는 답했습니다. 문을 열자 doorbell 이 울렸고, 안에서는 귀에 익숙한 한국 가요가 흘러나오는 그 공간에서 많은 여자애들이 - 20대 초반의 지혜 또래 그리고 그보다도 어린 여자애들로 꽤나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 구석에 서서 지혜가 그곳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그리고 그 분위기에 빠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러 상품들을 집어들고 찬찬히 관찰하듯이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지혜는 제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마냥 구경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저는 살며시 가게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가게의 문을 열고 나오니, Union Street 과 41st Street 이 만나는 교차로가 오른쪽으로 보이더군요. 제겐 이미 익숙함 이상으로 잘 아는 교차로였습니다. 제 바로 오른쪽으로는 누이가 고등학교 때 part-time 으로 일했던 deli 가게가 있었고, 대각선 위치에는 구화식품 이라는 식품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 먹을 식료품들을 구입했던 기억과, 가족이 처음 이민을 와서 급하게 김치를 사서 먹은 곳도 이 구화식품 이었지요. 구화식품 바로 옆에는 항생제를 꽤나 많이, 그리고 쉽게 조제해주던 약국도 그대로였습니다. Flushing 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는 정이 많이 들게 되는 동네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난 '이민 경력'이 10여 년 이상 되는 이민자들은 예전에 이 타운에서 살았다는 것을 웬만해서는 알리고 다니지는 않는, 그런 타운이었지요. 이 변두리 동네는 특히 동북아시아 이민자들이 주로 정착하던 타운으로, 중남미계 이민자들이 마치 자신들의 영원한 정착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듯한 Corona 나 Jackson Heights, 또는 동유럽계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살고 있는 Woodside 보다는 꽤 다릅니다; Flulshing 은 특히 한국 이민자들에게는 영원할 이유도, 영원할 것도 없는 도시라는 느낌이지요. 지금은 사는 곳이기에 있건 없건 간에 정을 붙이고 가꾸고 품 안에 두고 살아가지만, 많은 한인 이민자들에게는 언젠가는 뒤로 하고 매몰차게 '반드시' 떠나야 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저도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 중 하나로, 그렇기에 Flushing 을 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그때 저는 지혜 한 사람으로 인해 다시 그 거리에 서 있게 된 것이지요. 오기 싫었던 이 타운을 제가 아끼는 어느 한 젊은 여성 때문에 다시 이 거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습니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지혜가 가게에서 이미 나와서 제 옆에 서 있더군요. 한 손에는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 2개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제 옆에 서 있었을까요? 왠지 웃음이 나와 지혜를 바라보며 웃었는데, 지혜도 그 큰 미소를 띄며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비닐 가방엔 뭐가 들었니?"

"아녀요. 그냥 작은 것들..."

"보여줘. 궁금하다, 야."


들여다보니 10대 소녀들이나 좋아할만한 그런 것들로 꽤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냥 웃어도 될 일, 왠지 저는 지혜가 측은하게 보이더군요. 이 애를 생각하거나 보게 되면 끝도 없이, 근거도 없이 느끼게 되는 이 측은함은 왜인지, 그 후 세월이 좀 지난 후 그 때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지만, 당시엔 그저 막막한 아련함과 측은함이 먼저 제 마음속에 떠오르더군요.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주변 모든 것들 때문에 그 작은 문구들마저도 그렇게 보였었나 봅니다.


그녀와 그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나온 후 public parking lot 에서 작별을 했습니다. 8시 30분, 늦은 시간대로 접어드는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으니 그 후 지혜의 일정은 제가 알아도, 알고자 해도 안 되는 것이었지요. 언제 또 보자는 막연한 약속을 하고, 지혜는 저를 두고 가기가 미안한 듯 자꾸 뒤를 돌아보았고, 저는 그저 빨리 가라고, 너 가는 거 본 다음에 가겠다고 하며 그녀가 먼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라렸습니다. 저 멀리 Roosevelt Avenue 에서 코너를 돌아 걸어가면서 제게 손을 흔드는 지혜의 모습을 보고 저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지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예전에 보았던 "겨울 나그네" 라는 드라마에서 민우 (손창민 씨) 가 자신의 삶 주변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자포자기한 상태로 기지촌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이모를 찾아가는 뒷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더불어 그 영상과 함께 흘러나온 노래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라는 가곡이 머릿속에 또한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한 작별이 우리가 서로를 본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1999년 11월  중순, 추수감사절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것이 - 핑계는 아니지만, 그 후의 삶은 매우 바빴습니다. 아니, 폭풍과도 같았지요. 자본시장의 상황은 1999년 후반부터 2001 초반까지 그 하락세가 당시에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강했습니다. 자산버블이 터지고, 그리고 그에 따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회사에서도 이와 관련된 그리고 파생된 여러 문제로 제 자신과 회사, 그리고 고객자산을 돌보는 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그 이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인 모두, 특히 뉴욕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타였습니다. 그 파급력이 짧긴 했어도 심리적으로 매우 강했지요. 게다가 저는 20여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으로 파견되어 일을 진행하던 중이라, 개인적인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던, 지혜와 작별을 한 후 2년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거의 20년이 지났습니다. 작년 여름, COVID-19 이 다소 수그러졌을 무렵 오랜 기억 속에서 지혜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무심하게도 지난 20년간 마음속에 이 아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책감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아프더군요.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Facebook search 를 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를 그렇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friend request 를 하기엔 20년이란 gap 이 너무 크게 느껴지더군요 -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Facebook 을 그냥 방치한 듯 보이는데, 내가 신청을 한들 이 애가 나를 기억하기나 할까? 등의 생각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더군요. 그 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friend request 를 했습니다. 답이 없더군요. 조바심과 후회 등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그대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친구신청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phone 에 alert 가 뜨더군요. 그저 매일같이 들어오는 알림이겠지 하며 별다른 생각이 없이 전화를 들여다보니 지혜가 친구신청을 수락했다는 메세지였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애가 한국에 지금 살고 있으며 이미 결혼을 한 후 아이가 셋이나 있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있더군요.


만나고 싶어 instant message 를 보냈습니다. 그간의 일들과 살아온 과정, 그리고 여러 이야기들을 되도록 짧게 썼습니다. 이틀 후 지혜가 그 메세지를 확인했더군요. 하지만 그 후 아직까지는 그녀가 제 메세지에 대한 답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 이란 생각으로 기다립니다. 다만 지난 20년을 또 어떻게 채울까? 하는 고민이 우선 앞서는 지금입니다. 한국에 다음 달에 들어가게 되는 일정이 있는데, 그때까지는 연락이 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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