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키츠키섬(生月島)에서

니시(西) 가문의 순교와 쿠로세노 츠지의 십자가

by 보현


히라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자 히라도에 인접한 이키츠키섬(生月島)에도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과거에는 왜구의 주요 거점이었던 이곳이 섬사람 대부분이 기리시탄이 되면서 이후 이키츠키섬은 ‘기리시탄의 섬’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혹독한 박해시대가 다가오자 섬사람들은 숨어서 신앙을 지켜 이곳은 ‘가쿠레 기리시탄의 본향’이 되었다. 이곳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으며 또한 많은 신앙의 후예들이 나왔다.

이키츠키섬에서는 이 섬의 최초의 순교자 가스팔 니시 일가의 돌무덤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일본은 대개 도로 폭이 좁지만 이키츠키섬의 길은 더욱 좁았다.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니시 일가의 돌무덤에 도착하였다. 돌무덤이라고 하여 구형왕릉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봉분이 있는 무덤의 형태를 생각했는데, 눈앞에 나타난 무덤은 돌 몇 개를 올려둔 초라한 모습이어서 처음에는 좀 당황했다. 그곳이 아닌가 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곳은 가스팔 니시 일가의 무덤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돌무더기 양옆으로 꽃을 장식하여 두었고, 그 곁에는 ‘사적 가스팔 님’이라는 글이 새겨진 초라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성당을 짓고 무덤을 거창하게 장식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가시팔 니시 일가의 돌무덤


다만 돌무덤 바로 아래에 아름다운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의 십자가>라는 것이었다.


이키츠키섬에 기리시탄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하비에르 일행의 전도와 관련이 깊다.

하비에르 일행이 히라도에 머물 때 히라도 다이묘인 마츠우라 다카노부의 가신이었던 기무라(木村)의 집에 머물렀다. 하비에르는 직접 기무라 일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세례가 어떤 씨앗이 될지 하비에르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후 기무라의 손자였던 세바스찬 기무라는 일본인 최초의 방인사제가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리마(有馬)의 세미나리오(소신학교)에서 유럽파견사절단의 네 소년과 함께 수학하였다. 네 소년이 유럽 순방길에 나섰을 때 기무라는 일찍이 예수회에 입회(1582년)하였고 사제서품도 제일 먼저 받았다(1601년). 금교령이 내렸을 때에도 일본에 남아 잠복하면서 신자들을 돌보던 기무라 신부는 1621년 6월 30일에 체포되었고 1622년 9월 10일 겐나대순교 때 니시자카(西坂)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사촌 동생 레오나르도 기무라 수도사도 1619년 11월 18일 나가사키에서 순교하였고 조카인 안토니오 기무라도 1619년 11월 26일 나가사키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하비에르 신부는 교토로 떠나면서 토레스 신부를 히라도에 남겼으나 다음 해인 1551년 그를 다시 야마구치로 불렀으므로 토레스 신부가 히라도에서 전교 활동을 한 것은 채 일 년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히라도 및 그 주변에 그리스도의 씨를 확실히 뿌렸다.

히라도 전교의 초석 고테다와 이치부 가문

한편 1552년 9월 7일, 발다살 가고(Baltasar Gago) 신부와 알카세바 수사가 분고(豊後, 현 오이타)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듬해 여름, 포르투갈 배가 히라도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가고 신부 일행은 히라도로 갔다. 15일간 히라도에 머문 가고 신부는 그곳에서 몇 명의 인사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중 두 명이 바로 고테다 야스츠네(籠手田安経)와 이치부 가게유(一部勘解由) 였다. 이들은 히라도의 영주 마츠우라와 친척 관계에 있던 가신으로서 히라도의 일부와 이키츠키섬을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키츠키섬을 관리하고 있던 사람은 이들의 가신인 니시(西) 가문이었다.


이키츠키섬에서의 본격적인 선교는 1558년에 시작되었다. 그 전해에 일본에 들어온 가스팔 뷔레라(Gaspar Vilela) 신부가 히라도 교회를 담당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가스팔 신부는 종교적인 열정으로 사찰과 신사를 파괴하고 불상과 경전을 불태워버리는 등 과격한 면을 보이자 그의 전교 활동은 불교도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런 연유로 뷔레라 신부는 기리시탄 가신인 고테다와 이치부가 관할하던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결과 고테다가 다스리던 이키츠키섬 남부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기리시탄이 되었다. 그때 타치우라 지역의 관리직이었던 니시 일가도 기리시탄이 되었다. 당시 두 살이던 니시 일가의 장남은 뷔레라 신부의 세례명인 가스팔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563년 1월 3일, 이키츠키섬에 토레스 신부가 찾아오면서 그에 의해 철저한 사목이 이루어졌다. 그가 체재하는 30일 동안 이키츠키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주민을 포함하여 열 살 이상의 신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모셨다.

이후 이키츠키 인근의 신자들은 사제가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가스팔 니시의 순교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금교령이 내려지자 히라도의 영주 마츠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마츠우라 다카노부의 아들)는 재빨리 기리시탄 탄압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키츠키섬의 주군 고테다 일가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영지를 버리고 600 명의 가신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망명을 떠났다(1599년). 주군이 섬을 떠났으나 가스팔 니시는 그대로 섬에 남아 이키츠키 기리시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두 살에 가스팔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리시탄이 된 니시는 훌륭한 신자로 성장하였다. 성인으로 자란 가스팔 니시는 젊은 미망인 우르술라 토이와 결혼했다. 우르술라가 데리고 온 아들인 가스팔 토이를 위시하여 그들 사이에서 네 명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장남인 조안(요한) 마타이치, 차남인 토마스 로쿠자에몬, 삼남인 미카엘 가사에몬과 딸 마리아였다.

가스팔 니시의 장녀 마리아는 신앙을 버리기를 종용하는 시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친정에 와서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리아의 시아버지의 밀고로 가스팔 니시가 체포되었다. 가스팔은 그리스도 신앙을 버리기는커녕 신자들의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세례까지 주었다는 이유로 영주로부터 처형 명령이 내려진다.

이리하여 가스팔 니시는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1609년). 그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서 처형되기를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십자가가 서 있던 쿠로세의 츠지에서 처형되기를 원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부인 우르술라와 장남 조안도 이때 같이 순교하였다.

순교한 그들의 시체는 방치되어 있다가 겨우 허가를 받아 신자들이 사형장 근처에 이들을 묻었다. 이것이 <가스팔의 돌무덤>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이키츠키의 신자들은 가스팔의 무덤을 지켜 왔다.


성 토마스 니시

성 토마스 니시는 가스발 니시와 우르술라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토마스 니시의 일생을 살펴보면 우리는 당시 일본 기리시탄 엘리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독실한 신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소년 시절에는 아리마(有馬)의 세미나리오에서 공부하였다. 1620년 마닐라로 건너갔고 1624년에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다 1626년 사제로 서품 된 후 일본으로 돌아와 막부의 눈을 피해 박해로 고통받는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 같은 도미니코회 소속 조르다노 안살론 신부를 간병하던 중 체포되었다. 토마스 니시는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1634년 11월 17일 니시자카 언덕에서 거꾸로 매달리는 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후 토마스 니시는 1981년 마닐라에서 시복 되었고 1987년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 있는 26 성인기념관의 성 토마스 니시 조각


야마다 성당 마당 한편에 세워져 있는 <성 토마스 니시 기념비>


같은 해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던 삼남 미카엘 가사에몬도 형에게 거처를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처와 어린아이와 함께 처형되었다(1634년). 이처럼 가스팔 니시와 우르술라는 가족 모두를 주님께 인도하여 바쳤다.

부인이 데리고 온 아들인 가스팔 토이는 아리마의 세미나리오에 들어가 나중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고 하나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의 십자가

가스팔 니시의 돌무덤 옆에 아름다운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유명한 이키츠키의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의 십자가>이다.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의 십자가>

이곳에 최초로 십자가를 세운 사람은 가스팔 뷔레라 신부였다고 한다. 1558년 히라도에 부임한 가스팔 신부는 이키츠키섬도 담당하였다. 그는 이곳에 큰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주위를 신자들의 묘로 정비하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라고 불렀다. 즉 ‘십자가(크로스)의 거리’라는 뜻이다.

그 후 이키츠키 섬을 방문하는 신자들은 먼저 여기에 와서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그 후 가스팔 뷔레라의 이 십자가를 토레스 신부가 새로 세우고 축성하였다고 한다(1563년). 당시의 모습을 예수회 수도사 페르난데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음력 정월 초하루 이키츠키에 십자가 하나가 세워졌다. 이것은 지금까지 일본 땅에 세워진 십자가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성당에서 십자가가 있는 곳까지 약 1km의 거리를 약 천 명의 신자들이 화관을 쓰고 포르투갈 사람 몇 명은 춤을 추며 그 행렬을 이끌었다. 행렬은 성모마리아의 연도와 함께 라우다테 도미넘(시편 150: 만민들아 하느님을 찬송하여라)을 노래하며 나아갔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신자들은 모두 모여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축하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십자가를 칭송하고 그것을 경배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교를 들었다”.


나는 페르난데스의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시의 광경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이 작은 섬에서 천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화관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행렬을 지어 십자가의 언덕으로 춤추며 노래하며 나아갔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순간 우리나라의 경북 상주시의 석단산 아래에 세워져 있는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가 떠올랐다. 석단산 아래에 살고 있던 김삼록 도미니코는 당시 쌀 다섯 가마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큰 돌을 사서 거기에 자신의 믿음을 새겼다. 나는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의 십자가를 보자 석단산 산야에 세워져 있던 김삼록의 신앙고백비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감동을 느꼈다. 믿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세우거나 신앙고백비를 세운 사람들의 마음이 같은 마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경북 상주시의 석단산 아래에 세워져 있는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


이후 <쿠로세노 츠지의 십자가>는 이키츠키 기리시탄의 신앙의 원천이 되었다. 박해 시에 이 십자가는 철거되었지만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저 십자가 아래 생명을 바치고 싶다”는 소망이 남았다.

1609년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 가스팔 니시와 그 가족도 이곳에서 순교하기를 원했다. 또 근처의 나카에노시마(中江ノ島: 히라도의 기리시탄의 처형 장소)에서 순교한 많은 기리시탄들도 쿠로세노 츠지(黑瀨の辻)의 십자가를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이곳에서 천국은 멀지 않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순교의 대열에 섰다고 전한다.

토레스 신부가 세운 십자가는 박해시대에 파괴되었고 현재 이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십자가의 기념비는 이키츠키의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는 의미에서 1992년 11월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기념비의 동판에는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순교자들의 영을 부조하였다.

이 십자가 기념비 앞의 뜰에 서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가 눈에 띄었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이 2018년 UNESCO에 등록된 것을 기념하는 표시판이었다. 이 표시판을 보자 무엇이든지 재빨리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인들의 약삭빠른 태도가 느껴져 마음이 씁쓸하였다. 초라한 가스팔 니시의 돌무덤을 보고 난 뒤라 더욱 마음이 복잡하였다.

이 녹색의 표시판은 앞으로 나가사키의 성지를 다닐 때 여러 곳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이 2018년 UNESCO에 등록된 것을 기념하는 표시판


이키츠키의 야마다 성당

가스팔 니시 일가의 순교 후 시간이 한참 지난 1865년, 나가사키의 오우라천주당에서 숨은 신도들이 세상에 드러나자 가톨릭 교회는 히라도와 그 인근 지역 및 고토 지역의 숨은 신자 찾기에 나섰다. 이키츠키에는 구로시마(현 사세보)의 신자들이 찾아와 이들을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제 없이 불교도로 위장하며 살아온 신자들인지라 이들을 정통 가톨릭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1878년 히라도 지역에 페뤼 신부가 부임해 오면서 이키츠키의 많은 신자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신자들이 야마다 성당을 건립하였다(1912년). 야마다 성당은 이키츠키 출신이면서 16 성인 중의 한 명인 성 토마스 니시를 기념하여 만든 성당이다.

이 성당은 테츠가와 요스케(鉄川与助)의 설계 시공으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테츠가와 요스케는 프랑스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드로(Marc Marie de Rotz) 신부와 페뤼 신부에게서 교회 건축을 배워 나가사키 지역에 많은 아름다운 성당들을 건축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우리도 성지 순례를 통해 그가 지은 아름다운 성당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야마다 성당은 성당 내부 벽면에 1990년 경 당시 주임신부가 직접 채집한 나비의 날개로 만들어진 7 성사 그림이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나비처럼 날아서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 성당은 문이 굳게 닫혀있어 성당 내부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냥 석조건물 바깥만 돌다 <성 토마스 니시 기념비> 앞에서 잠시 묵상하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돌로 지어진 조촐한 이 성당을 보자 우리나라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갈곡리 성당>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모습이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참고로 갈곡리 성당은 1955년에 건축되었으니 야마다 성당보다는 늦게 지어졌다. 갈곡리 성당을 지을 때 야마다성당을 참조했는지도 모르겠다.


야마다 성당 전경(왼쪽) 갈곡리 성당 전경(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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