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흔적을 쫓아
소설 <침묵>은 이렇게 시작된다.
1638년 3월 25일,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배교한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찾기 위해 세 사람의 신부가 포르투갈의 벨렘 요새를 출발한다. 세 사람의 신부 중 한 명은 말라리아에 걸려 마카오에 남겨지고 나머지 두 명의 신부는 일본인 기치지로의 안내로 나가사키 근처의 작은 어촌 마을인 도모기에 숨어들게 된다.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이곳의 산속 움막에 숨어서 오랫동안 신부가 부재했던 마을 주민들의 영적 갈증을 채워주려고 바삐 지낸다. 그동안 로드리고 신부는 고토섬에 건너가 몰래 신자들을 만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밀고로 관원들이 몰려오면서 도모기 마을은 벌집 쑤셔 놓은 듯이 된다. 급기야 두 명의 신자가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각기 헤어져 페레이라 신부를 찾기로 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고토섬으로 가고 가르페 신부는 히라도로 가게 된다.
소설에서 히라도는 중요한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도 일본 가톨릭의 역사에서 히라도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그 이유는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히라도가 일본 최초의 가톨릭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도 가르페 신부가 간 히라도(平戸)로 가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히라도는 나가사키현의 최서단에 위치한 섬이다. 이곳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과거부터 중국과의 무역항으로 중요했고 왜구의 거점이 된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나가사키현 본토와 히라도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히라도대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히라도대교가 한눈에 보이는 전경도 아름다웠고 오랜만에 대하는 깔끔한 일본음식도 마음에 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식구에다 두 언니까지 함께 하는 여행이어서 들뜬 마음으로 하는 식사였다. 앞으로 마주할 가슴 아픈 광경들을 이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하였었다.
히라도 섬의 높은 산꼭대기에는 히라도 성이 당당히 서 있었고 항구에는 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의 상선들이 드나들며 서역의 문물을 교역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히라도 성 건너편에는 아직도 네덜란드 상관(商館) 건물이 그대로 서있고 히라도 성과 성 아래의 문화센터에는 이와 관련된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딸과 언니들은 여행을 떠나온 들뜬 마음으로 두 눈을 반짝였고 일본에 4년간 주재했던 남편도 나가사키는 처음인 듯 흥미롭게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이 여행을 기획하고 가족을 이끌고 온 나만 긴장하며 여정을 살폈다. 하나도 빠뜨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먼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일본 선교를 위해 최초로 일본 땅에 발을 밟은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하비에르(1532년~1597년)는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집안은 쇠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부친은 집안 부흥을 기대하며 아들을 파리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말하자면 하비에르의 어깨에는 집안을 일으켜 세울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파리대학에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된다. 이냐시오는 프로테스탄트의 세력 확산을 막고 가톨릭 교회의 부흥을 기원하며 예수회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파리대학 교수직의 제의와 일체의 영예를 버리고 이냐시오 등과 함께 파리에서 예수회를 설립하였다(1534년).
예수회는 선교지 선점을 위해 아시아와 남미 지역의 선교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으로부터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하비에르는 1541년 4월 7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하여 희망봉을 돌아 13개월의 항해 끝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고아는 1513년 이래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주요 활동 거점이 되고 있었다. 고아에 도착한 하비에르는 인도의 남부 지방,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뉴기니, 몰루카제도, 필리핀과 가까운 모로타이 섬을 찾아가 왕성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말라카에서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게 된다. (소설 <침묵>에서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기치지로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야지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말라카에 도망 와 있던 인물이었다. 야지로로부터 일본에 대해 듣게 된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 전교를 결심하게 된다.
1549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야지로를 앞세운 하비에르 신부는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 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ández) 수사 등을 대동하고 야지로의 고향인 가고시마에 도착하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처음 야지로의 친척들에게 전교활동을 하던 하비에르 일행은 9월 29일 사쓰마(현 가고시마)의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를 만나 전교 허가를 받게 된다. 이때 하비에르 일행은 처음으로 공개적인 복음전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승들의 반감이 거세지고 1550년 7월, 포르투갈 선박이 히라도에 정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비에르 일행은 히라도로 거처를 옮겨가게 된다.
1550년 8월, 동료들과 함께 히라도에 도착한 하비에르는 히젠(히라도의 옛 지명)의 다이묘인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降信)를 만나 전교 허가를 구하였다. 남만무역(南蠻貿易)을 통해 영지의 부강을 이루고 싶었던 다카노부는 하비에르 일행의 전교 요청을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때 영주의 중신이었던 코테다 가문과 이치부 가문이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자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이키츠키섬(生月島)과 히라도 서해안에서 개종자가 늘었다.
이렇게 하여 하비에르가 도착한 다름 해, 히라도에 일본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곳은 일본 최초의 가톨릭 거점이 되었다.
일본 전국의 선교를 위해서는 천황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하비에르는 천황을 만나기 위해 교토로 가기로 하였다.
간몬해협을 거쳐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그는 야마구치(山口)를 지나가게 되었다. 당시의 야마구치 영주는 슈고 다이묘의 하나인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降)였다. 당시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 라 불릴 만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야마구치의 길거리에서 하비에르 일행은 전교활동에 나섰으나 수수한 수단 차림의 이방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이때 하비에르 일행의 선교 열매는 보잘것없었다.
하비에르 일행이 교토를 향해 야마구치를 떠난 것은 1550년 12월이었다. 혹한의 추위와 먹을 것의 부족, 이방인에 대한 불친절로 무척 힘든 여정이었다. 그런 난관을 뚫고 마침내 교토에 도착했으나 ‘오닌의 난(応仁の乱)’ 여파로 교토의 황거나 거리는 황폐했다. 천황과 막부의 쇼군을 만나려고 했으나 천황에게 바치는 헌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황거의 신하들은 그들을 궁으로 들이지 않았고 쇼군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교토에 없었다.
실망한 하비에르 일행은 교토를 떠나 히라도로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야마구치에서 선교를 시도하였다(1551년 4월). 이번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다시 영주를 알현한 하비에르는 천황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인도의 총독과 고아 주교로부터의 신임장 및 화승총을 위시하여 망원경, 탁상시계, 유리 주전자, 거울, 안경, 서적, 그림 등 값비싼 선물을 그에게 바쳤다. 요시타카는 포교 허가와 함께 당시 비어있던 절을 포교 본부로 내주었다. 이때 불교로부터 개종한 비파법사 라우렌시오의 세례는 일본의 선교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야마구치에 체재하던 4개월 동안 약 500명이 세례를 받았으니 야마구치에서 놀라운 성공을 이룬 셈이었다.
1551년 9월, 후나이(府內, 현 규슈 오이타시)에 포르투갈 선박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하비에르는 야마구치 교회를 토레스 일행에게 위임한 뒤 후나이로 가서 11월 15일, 인도의 고아로 출항했다. 일본에 온 지 2년 3개월 만이었다. 그는 내년을 기약하였지만 이것이 그와 일본과의 영영 이별이 되었다. 당시 일본 본토가 ‘오닌의 난’ 이후로 극심한 전란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의 일본 선교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서일본을 중심으로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히라도의 복음화율은 14% 정도인데, 이런 신자 비율은 일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높은 편이라고 한다.
몰루카로 돌아온 그는 2년 전에 도착한 편지 두 통을 받았는데, 그 한 통에는 그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하비에르는 즉시 중국 전교를 결심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가 일본에서 전교할 때 다이묘들이 ‘중국인들은 이 신흥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매우 관심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하비에르는 동양의 선교를 위해서는 중국 선교가 앞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험난한 뱃길을 거쳐 광둥항(廣東港)이 바라보이는 산첸(上川, 샹추안) 섬에 도착한 후 중국 본토로의 상륙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열병에 걸렸다. 결국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3일, 중국 본토까지 불과 14km의 뱃길을 남겨두고 산첸 섬에서 선종했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우리는 하비에르 일행의 방문을 기념하여 히라도에 세워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은 1931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성당은 외부는 연두색으로 칠하고, 내부는 장밋빛의 기둥을 세워 따뜻하고 아름다운 인상을 주었다. 성당 주변을 요모조모 둘러보았더니 성당 왼쪽의 탑 하나가 없는, 그래서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듯한 느낌이 나는 건물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알고 보니 성당이 미완인 채로인 이유는 공사비가 부족하여 탑 하나를 마저 올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본 내 가톨릭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여 약간 슬펐다.
성당 안에는 십자가를 손에 든 하비에르상이 세워져 있었다. 온화한 모습이었다.
현재 일본에는 1619~1622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하비에르의 초상화가 한점 남아있다. 예수회의 교육공방에서 서양식 회화를 공부한 일본인 화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그림에 의하면 하비에르는 험난한 여정과는 달리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사색적인 눈길이 그의 맑은 영혼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소설 <침묵>이 포르투갈의 벨렘 요새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포르투갈의 벨렘에는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업적을 기념하는 탑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인물들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는데, 맨 앞 줄에는 엔리케 왕자가 있고 그 열의 맨 뒤를 받치고 있는 사람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이다. 하비에르는 대항해시대가 낳은 위대한 세계인이었음에 틀림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현세적인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하늘나라에 확실한 공을 쌓았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며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개종시킨 기적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우리는 히라도의 <성 하비에르 기념 성당>에 앉아 잠시 기도하였다.
나는 하비에르의 기도를 생각해 보았다. 하느님은 그가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독려하였다. 인도를 너머 일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