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총포의 전래와 그리스도교 전교

일본과 포르투갈과의 인연이 시작되다.

by 보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도착한 1549년은 일본이 한창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을 때였다. 시대 배경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때였다.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1338년, 교토의 무로마치에 막부(幕府, 바쿠후)를 연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무로마치 막부는 건립 초기부터 남북조시대로 나눠져 막부의 권위가 약했다.

15세기에 들면서 막부의 장악력이 더욱 약화되었고 이를 틈타 지방 사무라이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영주화되어 있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들의 세력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오닌(應仁)의 난’ (1467년)이라고 불리는 하극상 전쟁이었다.


‘오닌(應仁)의 난’ 은 무로마치 시대 가장 강력한 쇼군이었던 요시미쓰가 죽은 후,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슈고 다이묘들이 대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당대 최대의 슈고 다이묘였던 시바(斯波)와 하타케야마(畠山) 두 집안은 25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무려 11년을 싸웠다. 이 싸움으로 교토는 완전히 불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하극상 풍조가 만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1세기간의 전쟁 시대를 맞게 되니 이때를 전국시대(戰國時代, 센코쿠시대)라고 한다.

이때 대항해시대를 타고 일본으로 포르투갈산 화승총이 전래되었다. 화승총의 전래는 각 영지의 다이묘들에게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흥미를 갖게 하였고 이때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과의 인연의 시작; 다네가시마(種子島) 총

일본이 한창 전국시대의 와중에 있을 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1492년). 이후 대항해시대의 막이 열리면서 모험가들이 세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일본에도 서양인들이 도착하였다. 최초로 일본에 도착한 서양인은 포르투갈의 모험가 프란시스코 제이모토와 안토니오 다 모타였다. 그들은 중국 해적선을 타고 여행길에 나섰다가 폭풍우를 만나 일본의 규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하게 되었다(1543년).


그때 이 섬의 젊은 영주는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제 화승총의 위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영주는 당시 돈으로 금 2천 량이라는 거금을 주고 조총 2자루를 사들였다. 2000냥은 200명의 군대를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거금(현재 가치 20억 원)이었다고 한다.

16살의 도주는 이 화승총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기슈(紀州, 현재의 와카야마 현)의 승려에게 한 자루를 건네주고 나머지 한 자루를 가지고 도검제작자에게 총포의 제조를 의뢰하였다.

야이타 킨베에(八板金兵衛)라는 도검업자는 마지막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이모토가 그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면서 야이타의 딸과 결혼시켜 달라는 조건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고민을 지켜봤던 딸 와카사(若狹)가 선뜻 그 포르투갈 상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image01.png 조총을 만드는 일본의 도검업자


이렇게 하여 일본 최초로 다네가시마 뎃포가 완성되었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화승총을 ‘뎃포(鐵砲, 철포)’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 뎃포를 처음으로 대면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고 하여 ‘조총(鳥銃)’이라고 불렀다.


1920px-EdoJapaneseArquebuse.jpg 다네가시마 조총: 사진 Wikipedia


전국시대의 일본에 도입된 새로운 무기인 뎃포는 일본의 정치 판도를 단번에 일신시켰다. 다이묘들은 저마다 총포를 확보하려고 경쟁을 벌였고 철포 산지를 확보하려는 싸움도 치열해졌다.

철포는 자체 제작하였다고 하나 화약이 문제였다. 지방의 영주들은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화약을 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그러자 포르투갈과의 교역이 활발해졌고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의 항구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포르투갈의 무역선을 ‘남만선(南蠻船)’이라 부르고 포르투갈 사람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다.

다네가시마에서 대량생산에 성공한 철포는 오사카의 무역항 사카이(堺)의 상인이나 승려 등에 의해 일본 각지에 빠르게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총이 전래된 지 5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할 즈음에 일본은 세계 최대의 총보유국이 되어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의 전교

동시에 예수회 신부들에 의한 기독교 포교가 시작되었다. 앞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를 일본에 처음 전파한 사람은 에스파냐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였다. 그가 일본 전교의 큰 꿈을 안고 가고시마에 첫발을 디딘 것은 1549년 8월 15일이었다.

하비에르를 이어 서양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계속 들어오면서 나가사카를 중심으로 서일본에는 이른바 ‘남만문화(南蠻文化: 포르투갈인의 내항으로 전래된 유럽 문화)’가 짧지만 화려하게 일어났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영웅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그가 천하를 재패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신무기인 철포를 대량 확보할 수 있어서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는 오와리국(나고야, 아이치현)이었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의 큰 꿈을 가졌다.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천황과 쇼군이 머무르는 교토를 접수해야 했다.

교토 진압의 가장 큰 난관은 교토 가까이에 있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다이묘였다. 그런데 이 요시모토가 성장하는 노부나가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먼저 오와리성을 공격해 왔다. 오다의 군신들은 모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다가 한밤중에 단기 이천의 군사를 이끌고 적진을 공격하여 적장 다이묘를 죽이고 간단히 승리를 거두는 기적이 일어났다(1560년). 게다가 요시모토 휘하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오다 측에 항복해 온 것도 큰 수확이었다. 이때 오다 노부나가는 겨우 27세였다.


오다의 명성은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천황이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살해된 13대 쇼군의 동생인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노부나가에게 몸을 의탁해 왔다. 노부나가에게는 교토 진출의 더없는 명분과 기회가 찾아오게 된 셈이었다. 1568년 노부나가는 마침내 교토로 진군하였고,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제15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 그는 기내(畿內) 지방을 차례차례 평정하면서 한 세기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교토 재건에 앞장섰다. 오다 노부나가의 인기는 매우 높아가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가고 있을 때 토레스 신부 일행의 노력으로 히라도와 그 근처의 섬들로 기독교 사상이 서서히 번져나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569년에는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신부가 오다 노부나가를 방문하여 선교 허가를 얻게 되면서 기독교는 더욱더 일본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 1579년,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신부가 예수회 전교단장으로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의 기독교는 더욱 기세를 얻었다.

이때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가 나가사키와 도모기를 예수회에 기증하면서 예수회의 위세는 더욱 고양되었다. 발리냐노 신부는 일본인 어린이 4명을 유럽으로 보내 교황을 알현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이른바 ‘덴쇼유럽사절파견 소년단’이었다.


그런데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가 그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 할복자살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다. 1582년, 노부나가의 나이 49세 때였다.


조선에 전해진 조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을 재빨리 수습하고 천하를 차지하였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관대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하지만 그가 천하통일을 이루자 변심하면서 1587년 ‘바테렌(신부) 추방령’을 발표하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을 노출하였다.


1590년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통해 조선 국왕의 복속을 요구하였다. 1589년 소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통신사의 일본 파견을 요청하기 위하여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때 요시토시는 선물로 조총 한 자루를 조선 정부에 바쳤다. 당시 선조 임금은 이 조총의 위력에 관심이 없어 일본이 바친 조총을 군기시(軍器寺, 군대의 무기를 만들던 기관) 창고에 보관토록 하였다. 이때 조총의 위력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밖에 없었다. 서애는 조총 사용법을 익혀 조총 부대를 육성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정부에서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임진왜란 시 조선이 엉망으로 허물어졌던 가장 큰 원인은 신무기인 조총 때문이었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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