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최초의 기리시탄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

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증하다.

by 보현


뎃포(鐵砲)로 대표되는 서양 무기의 확보는 영토싸움에 여념이 없던 다이묘들에게는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자 각 영지의 다이묘(大名, 영주)들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해 개항에 적극 나서게 된다. 그중의 한 명에 오무라(大村)의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있었다.


오무라 스미타다

오무라 스미타다는 본래 시마바라(島原) 반도의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리마 하루즈미는 당시 시마바라 최대의 호족이었다. 그런데 이 하루즈미의 아내가 오무라 가(家)의 딸이었다. 아리마 하루즈미는 세력 확장을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오무라의 영주 오무라 스미사키(大村純前)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런데 오무라 스미사키에게는 고토 다키아키라(後藤 高明)라는 서출 아들이 있었다. 스미사키는 다카아키라의 친모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친아들을 고토 가문으로 이적시키고 딸의 아들인 스미타다로 가문을 잇게 하였다. 당연히 고토는 본가 회복을 위해 오무라의 일부 가신들과 힘을 합쳐 호시탐탐 스미타다를 위협했다. 거기다 오무라 가(家)는 당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스미타다에게는 재원을 확보하고 다카아키라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히라도에 포르투갈 배들이 드나들자 히라도는 남만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히라도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철포 같은 신무기류를 도입해 군사력도 강화하고 있었다. 스미타다도 다른 다이묘들처럼 포르투갈과의 거래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기회가 왔다. 히라도에서 기독교인들과 불교도와의 갈등이 빈발해지자 히라도 영주가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해 버린 사건이 생겼다. 거기다 1561년에는 포목품 거래를 둘러싼 분쟁으로 포르투갈 상인이 살해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제 히라도를 더 이상 무역항으로 쓰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스미타다는 오무라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오무라의 요코세우라(横瀬浦)를 무역항으로 개항하였다(1562). 그는 당시 분고에 머무르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일본 포교 책임자인 토레스 신부를 요코세우라에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토레스 신부도 요코세우라로 거처를 옮겨왔다.


최초의 기리스탄 다이묘가 된 오무라 스미타다

처음에는 상업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예수회와 손을 잡은 스미타다였지만, 토레스를 시작해 알메이다, 프로이스 등 당대 일류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점차 매료되어 갔다. 스미타다는 요코세우라에 드나들면서 신부들에게 교의를 배웠고 마침내 1563년 6월,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그의 조카와 가신 25명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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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세우라 공원(오른쪽) 내 도편에 그려져 있는 스미타다 일가의 세례 모습


기리시탄이 된 스미타다는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양부인 오무라 스미사키의 위패도 불살라버렸다. 이에 반발한 승려들과 반스미타다 가신들은 고토 다카아키라와 함께 모반을 일으켰다. 스미타다는 몸을 피하여 겨우 살아남았으나 요코세우라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포르투갈의 무역선은 오무라 영내의 후쿠다(福田) 항구로 기항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무역선이 떠난 것에 앙심을 품은 히라도의 마쓰라 가문이 이곳을 습격해 왔다. 자기들과 무역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공격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지만 그만큼 남만교역은 이익이 큰 사업이었다. 포루투갈선 대포의 도움으로 일단 난을 피하게 되었지만 후쿠다 항은 파도가 거칠기도 하여 국제항구로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1570년 예수회와 오무라 스티타다는 가까운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개항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남북조시대부터 나가사키를 통치해 온 나가사키 가문의 진자에몬도 1563년 스미타다와 함께 요코세우라에서 베르나르도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참이었다. 나가사키는 파도도 잠잠하고 수심도 깊어서 무역항으로서 제격이었다.


IMG_4661.JPG 옛날의 나가사키항의 모습


예수회에 나가사키항을 기증하다.

그때까지 이름 없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선박이 입항하면서 나가사키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만 무역으로 윤택해진 마을에는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오무라는 나가사키 입항세를 예수회에 기부하여 학교와 교회, 극빈자들을 위한 거처를 짓고 운영하는 일을 도왔다. 이렇게 하여 1569년에는 나가사키 최초의 성당인 ‘토도스 오스 산토스(여러 성인의 성당)’가 건축되었고 다음 해인 1571년에는 ‘곶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1579년부터 1587년 사이가 가톨릭 포교의 절정기였다. 이때 세스페데스 신부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후일 임진왜란 시에는 조선으로 건너와 진해 웅천에 일 년간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가(佐賀)의 류조지 가문이나 나가사키 항 입구를 지배하고 있던 후카호리 가문 등이 나가사키를 계속 위협해 왔다. 이에 스미타다는 나가사키와 모기(茂木)를 아예 예수회에 기증하고 말았다(1580년). 그리하여 이곳에 예수회 본부가 설치되면서 나가사키는 명실상부한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풍운의 세월을 보낸 스미타다는 말년에 인후암과 폐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한 신앙생활로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는 로마로 떠난 <덴쇼유럽파견사절단>의 귀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들의 귀국을 보지 못하고 1587년 55세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오무라 스미타다가 인생 말년에 은거한 곳에 오무라 스미타다의 사적 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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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거 2개월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테렌(사제) 추방령’을 발표하고 나가사키와 모기를 직할시로 삼아 예수회로부터 이 땅을 빼앗았으며 ‘곶의 성당’도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남만 무역의 이익을 생각한 히데요시는 ‘곶의 성당’이 무너진 자리에 일본 최대의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승천의 산타마리아성당)’이 재건되는 것을 묵인하였다(1601년). 이곳은 사제관과 신학교, 인쇄소도 갖추어 명실상부한 예수회의 거점이 되었다.


그 후 도쿠가와 막부도 처음에는 가톨릭을 용인했기 때문에 나가사키에는 열 개가 넘는 성당과 병원이 건설되었고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가톨릭은 다시 전성기를 맞았고 나가사키는 ‘일본의 작은 로마’라고 할 정도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도쿠기와 막부가 1614년 전국적으로 금교령을 발표하면서 나가사키의 성당은 모두 파괴되었다.

스미타다에 이어 오무라 가(家)를 승계한 아들 요시아키도 세례를 받은 기리시탄이었으나 후일 배교한 그는 그리스도교인들 혹독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무라에서 선교사들의 순교가 잇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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