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포르투갈의 동방 노예무역

포르투갈의 일본인 노예 교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분하다.

by 보현


만쇼소년사절단 4명의 견문록이 1590년 마카오에서 인쇄, 간행되었다. 라틴어로 된 <일본사절의 견문대화록>이다. 이 책에는 노예무역으로 거래된 ‘일본인 노예’에 대한 내용이 있다.

미겔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여행하는 곳마다 팔려나가 노예 신세가 된 일본인을 가까이 보았을 때는 이런 값싼 값에 작은 가축이나 짐승처럼 (동포인 일본인을) 놓아주는 우리 민족에 대한 격렬한 생각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만쇼는 “미겔, 우리 민족에 대해 그 개탄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사람들은 다른 일에서는 문명과 인도를 제법 중시하는데, 아무래도 이 일에 있어서는 인도주의, 고상한 교양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

마르티노가 동조한다. “진짜. 사실 우리 민족의 그 많은 남녀들이나 동남동녀들이 세상의 그처럼 저마다의 지역을 그렇게 싼 값에 휩쓸려가 팔려가고 비참한 천역에 굴복하는 것을 보며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순히 포르투갈인에게 팔려가는 것만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포르투갈 국민은 노예에 대해 자비롭기도 하고 친절하기도 하며 그들에게 기독교 교조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가짜 종교를 받드는 열등한 민족이 있는 여러 나라로 흩어져 가서 거기서 야만적인, 빛깔이 검은 인간들 사이에서 비참한 노예의 신세가 되는 것은 물론, 허위의 미망이라도 불어넣어 지는 것을 누가 감히 참아낼 수 있겠는가.”

미겔은 포르투갈인을 변명한다. “아니, 이 점에서 포르투갈인에게는 조금의 죄도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상인이니까, 비록 이익을 예상하고 일본인을 사들인 후, 인도나 그 외의 땅에서 그들을 팔아 돈을 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치 않다. 그렇다면 죄는 모두 일본인에게 있는 것이고, 당연하다면 소중하게 아껴 주어야 할 친자식을, 얼마 안 되는 대가로 어머니 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그렇게도 천연덕스럽게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나쁘다”


이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이 동남아시아와 인도, 유럽을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비참한 신세에 떨어진 일본인 노예들을 목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년들은 세계 곳곳에 팔려가 천역에 내몰린 일본인 노예들을 목격하고 충격과 연민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노예무역을 하는 포르투갈인들은 두둔하면서 자식들을 팔아넘긴 일본인 부모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위 소년들이 탄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포르투갈은 대규모 노예무역을 시작한 장본인이다. 포르투갈 왕국은 15세기부터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를 매매하였으며 그 후 줄곧 대서양 노예무역에 앞장서 왔다. 그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용한 첫 사례가 마데이라에서 생산되던 설탕 재배에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엔리케 왕자의 집념으로 가장 먼저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인들은 1502년 아프리카 동부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협력을 얻어 노예무역에 나섰다.


포르투갈 상선.png 대항해 시대에 전 세계의 바다를 누볐던 포르투갈의 범선 ‘카락’.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동방으로 가장 먼저 진출한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1500년부터 아시아 지역의 상품을 독점해서 유럽에 팔아서 네덜란드가 아시아 지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많은 수익을 올렸다. 포르투갈이 동방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상품은 후추 같은 향신료였다. 워낙 수익이 많이 남는 무역이었으므로 그 후 네덜란드, 영국 등과의 향신료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포르투갈은 일본에 유럽산 무기와 시계, 유리 등을 팔았지만 동남아시아 상품을 중개하거나 중국 비단, 생사, 도자기 등을 일본에 중개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일본에서는 주로 은을 수입하였다. 16세기 국제교역은 은을 결제수단으로 삼았고 당시 일본은 세계 최고의 은 수출국이었다. 일본의 이와미 광산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와미 은광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남미의 포토시 은광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은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초, 일본 전체의 은 생산량은 전 세계의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일본에 진출한 네덜란드 상인들의 가장 큰 교역품도 은이었다. 네덜란드의 상관이 있던 데지마에는 지금도 당시 상인들이 사용하던 저울이 전시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일본인 무예무역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 드나들면서 일본인들을 노예로 사서 동남아시아나 인도, 유럽인들에게 팔기 시작하였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의 유력 가문들은 농민들이나 전쟁 포로를 노예로 팔아 주요 수입원을 삼기도 하였다. 여성들은 주로 유곽으로 팔려나갔고 노인과 어린이와 남자는 노동력이 부족한 마을에 노동 노예로 팔려나갔다. 가령 시마즈 가문의 팽창 당시 오토모 가문의 영지였던 분고 지방을 빼앗아 분고 지방의 농민들을 노예 상인들에게 헐값에 팔았다.


16세기 당시 일본인 노예 수출의 전진기지였던 시마바라 반도 일대에는 캄보디아, 태국, 포르투갈 상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사서 인도, 필리핀, 마카오 같은 아시아 지역들뿐만 아니라 멕시코, 브라질, 페루, 아르헨티나 같은 중남미 지방 및 에스파냐, 포르투갈 같은 유럽 지역으로 팔았다.

해외로의 일본인 노예 판매는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 지역의 피해가 컸다. 다이묘들은 일본인 노예들을 해외에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조총과 화약 등을 받았다. 특히 일본인 여자 노예들은 고아(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팔려가 유녀가 되었고 포르투갈에서도 다수의 일본인 노예 소녀들을 매입하여 성적인 목적에서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 같은 아시아인들에게서 지성과 근면 같은 좋은 자질들을 발견하여 노예로서 선호하였다고 한다.

미겔과 만쇼, 마르티노가 보았던 일본인 노예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팔려나간 일본인들이었을 것이다. 소년단을 유럽에 보낸 발리냐노 신부는 소년들에게 그런 광경을 보이지 않기를 원했지만, 워낙 많은 일본인 노예가 세계에 흩어져 있었던 고로 그들 눈에도 띈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포르투갈의 노예무역의 참상이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격노한 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초대 감목대리인 코엘로를 불러 “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기독교 포교에 기를 쓰고, 일본인들을 사서 노예로 배에 끌고 가는가? 왜 그런 심한 짓을 하느냐?”라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코엘로는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코엘로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에는 판매자 역할을 하던 일본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한 노예무역은 후일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포르투갈의 조선 노예무역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은 조선인 노예들을 대규모로 사들여 전 세계에 팔아넘겼다. 당시 조선인 노예들이 전 세계 노예 시장에 풀리면서 노예 시세가 6분의 1로 내려갔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 노예들이 임진왜란 당시에 끌려갔는지 정확히 집계된 기록은 없지만, 학계에서는 대략 10만에서 20만 이상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노예무역을 일삼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파문으로 위협하였지만, 상인의 본성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조선인 노예에 대한 증언은 1598년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 일주기> 에도 등장한다. “조선에서 모든 연령대의 수많은 남녀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나도 조선인 노예 5명을 겨우 12 이스쿠도(포르투갈의 옛 화폐단위)에 살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중 4명은 인도 고아에서 풀어주고 나머지 1명을 이탈리아로 데려왔는데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였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흑인 남자 노예가 100 이스쿠두에 거래된 걸 감안하면 조선인 노예의 값은 비교할 수 없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인을 많이 끌고 가 노예시장에 공급이 넘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섬에 한국노예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 최근 보도를 보았다. 이역만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혹독한 노예살이를 했을 그 조선인 노예들의 처지를 슬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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