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시작되다.
덴쇼소년단을 만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년들이 자기 휘하에서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특히 그는 이토 만쇼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두 번이나 이토에게 그와 소년단이 자기 휘하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소년들은 그의 제의를 거부하고 의리를 내세우며 예수회에 입회하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해 가고 있는 일본 제일의 권력자인 자신의 권유를 거절하고 선교사들과 더 끈끈하게 결합하는 소년들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유대의 견고함에 의혹과 함께 불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계승, 기독교 전도를 용인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가 1585년 음력 3월 16일,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일본 총책임자였던 코엘로를 접견하였는데,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오사카성 천수각과 재보가 저장된 금고들을 열어 구경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이때 그는 코엘로에게 규슈 정복 계획과 조선 출병, 명나라 정복 계획 등을 밝혔다. 이 만남에서 히데요시가 코엘로에게 가장 중점을 둔 요구사항은 조선과 명나라 정복을 위한 전쟁에 사용할 대포와 총을 갖춘 포르투갈 선박 두 척의 알선이었다. 그는 조선과 명나라 정복이 성공한다면 선교사들에게 조선과 중국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두 크리스천이 되도록 명령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에 대해 코엘로는 선박을 조달할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무기공급을 약속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의 합동작전을 제안하였다. 이때 히데요시는 포르투갈의 무기를 요청하면서도 조국의 힘을 과시하는 코엘로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도 히데요시로서는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가진 그의 아내 네네의 요청으로 예수회에 대한 포교 허가증을 발급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카 성 근처의 땅도 코엘로에게 하사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실제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군사들은 기리시탄 다이묘와 그 산하의 군사들이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을 위해 1587년 3월, 20만의 대군을 규슈로 보냈다. 당시 규슈는 사쓰마의 시마즈(島津) 씨가 80%를 장악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대군을 보내자 규슈의 영주들이 앞다투어 귀순, 투항해 와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그해 5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백기를 들었다. 히데요시는 하카타의 하코자키에 본영을 설치했다.
규슈를 잘 다스리기 위해 사무라이, 승려, 농민 등 민중의 불만을 청취하던 히데요시는 기리시탄들이 신사를 부수거나 절에서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나가사키가 교회령이 되어 예수회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히데요시를 격분시켰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그 분노를 숨겼다. 그만치 코엘로를 통한 서양 선박의 도입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시마즈 요시히사를 항복시키고 규슈를 평정한 다음, 하코자키에 머무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다시 코엘로를 불렀다. 그가 포르투갈의 선박 조달을 채근하자 코엘로는 예수회가 소유하고 있는 후스타(fusta) 선박의 양도를 제안하였다. 기대를 가지고 예수회의 후스타 선박에 오른 이에야쓰는 크게 실망했다. 그 배는 해적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몇 문의 포를 장착하고는 있었으나 가볍고 빠른 작은 배에 불과했다. 히데요시가 필요한 것은 조선 침략에 사용할 큰 배였다. 이런 실망감이 그의 분노와 함께 표출되었으니 바로 이날 발효한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이었다.
바테련(伴天連)은 Padre로서 ‘신부’라는 뜻이다. 선교사 추방령에는 “일본은 신국이므로 크리스천 나라에서 악마의 가르침을 설교하기 위해 온 것은 나쁘며 예수교 신도들은 신과 부처의 사원을 파괴하니 일본의 법이 파괴되는지라 선교사들은 20일 이내에 떠나라. 단 포르투갈 나우선들이 상거래를 위해 오는 것은 허락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코엘로를 불러 나가사키에 예수회 깃발을 게양한 사실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코엘로에게 “너희는 왜 일본 방방곡곡 거리에서 포교하는가? 왜 말고기와 소고기를 먹는가? 왜 너희 유럽 상인들은 우리 일본인 부녀자들을 돈을 주고 사서는 외국에 노예로 파는가?” 라며 선교사들과 유럽 상인들의 형태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힐난에는 그동안의 그의 불만이 다 함축되어 있었다.
격분한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에 이어 휘하의 기리시탄 무장들을 불러 모아 기독교를 버릴 것을 압박하였다. 하코자키로 호출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마키무라 마사하루 등의 기리시탄 다이묘들은 히데요시로부터 기독교를 버리지 않으면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협박을 마주해야 했다. 그들은 침통하게 앉았다가 차례로 이에야쓰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다만 다카야마 우콘만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지와 가신을 포기하겠다고 답하여 그 자리에 모여있던 가신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의 그러한 태도는 가신들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다카야마 우콘은 이후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비호를 받으며 숨어 지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하자 가족과 함께 필리핀으로 이주한 후 객지에서 타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에는 오다와라의 호조씨와 동북지방의 다이묘들을 복속시켜 일본 통일을 이루게 되자 그의 권세는 아무도 누를 수 없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 최고의 권력자 히데요시가 내린 ‘선교사 추방령’은 선교사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동안 닦아놓은 일본 전도의 꿈이 물거품이 되려는 위기상황이었다.
예수회는 도요토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포르투갈 무역선의 사령관이 그를 예방하였고,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였던 발리냐노 선교사가 인도 부왕의 사절을 칭하며 많은 선물을 바치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다.
한편, 도요토미의 선교사 추방령에 격앙된 선교사들은 코엘로가 중심이 되어 히데요시에 맞서 기독교 영주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고아, 마카오, 마닐라에서 무기를 조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발리냐노와 기독교 다이묘들의 반대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포르투갈의 남만무역선이 일본 항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자 남만무역을 통해 조선 침략자금을 모으려 했던 히데요시로서는 바테렌 추방령을 곧바로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회는 도요토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는 1587년 쓰시마의 도주 소 요시토시를 불러 조선 국왕의 복속과 상낙(上洛)을 명했다. 상낙이란 지방에서 교토로 올라가는 상경을 의미했다. 그는 조선을 자기의 다이묘의 하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1591년에는 에스파냐가 점령한 필리핀에 사자를 보내 일본의 속국이 되라는 엉뚱한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놀란 필리핀 총독은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바우티스타 신부를 사절로서 일본에 파견하였다(1593년). 신부는 한동안 교토에서 체류하며, 허가를 받지 않고 성당을 세운 후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프란시스코회 선교사들의 일본 방문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이 도요도미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은 1596년 일본 해안에서 난파된 에스파냐 상선 산펠리페 호였다. 이 배의 한 선원이 "에스파냐는 선교사를 먼저 파견해 주민들을 길들인 뒤 개종한 원주민의 도움으로 군사 침략을 일으켜 영토를 점령한다"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이 대화 내용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격분하게 된다. 그는 전국의 모든 기독교 선교를 폐지하도록 명령했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1597년 2월 5일 26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형되는 박해사건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말하는 ‘일본 26위 성인’ 순교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