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임진왜란과 천주교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

by 보현



1592년 정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침내 조선 출병을 선언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히데요시는 규슈를 정벌하기 전부터 조선 출병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1590년 시코쿠(四國)와 규슈(九州)를 평정하고 일본을 명실상부하게 통일하자 이듬해 3월 조선 통신사를 통해 일본이 명나라를 칠 것이니 조선이 길을 내어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청하였다. 조선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그는 조선을 칠 준비를 서둘렀다.


나고야성의 축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10월, 전국의 다이묘들을 불러 모아 조선과 가까운 규슈의 히젠(肥前)에 나고야성(名護屋城)을 짓고 전쟁준비를 시작하였다. 나고야 성은 대한해협과 맞닿아있는 현해탄에 있어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나고야성은 착공한 지 5개월 만인 1592년 음력 3월에 완성되었는데, 성의 규모는 50만 평, 성곽 둘레는 5km나 되었다. 나고야성 근처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다이묘들의 130여 진영이 세워졌고 20만의 군사와 어마어마한 군량미가 쌓였다.


image02.png 히젠의 나고야성


규슈의 기리시탄 장수들이 침략에 앞장서다.

마침내 1592년 4월 12일, 9군으로 구성된 약 16만 명의 대군이 조선 침략에 나섰다. 제1군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만 8천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부산으로 진격하였고 제2군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2만 2천여 명을 이끌었고, 제3군 사령관인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1만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당시 조선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돌아가신 왕비의 상복을 삼 년을 입어야 할지 일 년을 입어야 할 지로 당파가 나뉘어 싸우다 당파가 세분되면서 싸움이 더욱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일본의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당시 조선 국력 쇠락의 중요 요인으로 당쟁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은 바깥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류승룡의 말대로 ‘승평한 세월’을 이어가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조선 출병에 앞장선 장수들을 보면 대개 규슈 출신의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1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최측근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끝까지 조선 침략을 반대하였으나 전쟁이 결정 나자 히데요시에 의해 1군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니시 군은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기리시탄들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집안은 부모 대에서부터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요나단이고 어머니는 막달레나이며 처는 유스티나이고 딸은 마리아로 각각 세례를 받았으며 본인은 아우구스티노란 세례명을 받았다. 그가 웅천왜성(지금의 진해)에 머무를 때는 포르투갈 선교사 세르페데스 신부가 파견되어 날마다 미사를 집전했다. 1593년, 진해에서 올려진 이 미사가 한반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미사로 기록되는 셈이다. 세르페데스 신부의 파견은 전쟁에 참가한 기리시탄 군인들을 위한 측면도 있었지만 ‘꼬라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 예수회의 오랜 염원 탓도 있었다. 1년 동안 웅천 왜성의 은밀한 곳에 칩거하면서 때를 엿보던 세스페데스 신부였지만, 1년 만에 체류 사실이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가자 조선에서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황급히 일본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도 제3군 대장인 구로다 나가마사 및 휘하 장군인 구로다 간베에, 고지마 준켄, 아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오토모 요시시게, 오무라 요시아키 등 대부분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었다. 아마쿠사나 아리마, 오무라 등은 앞에서 언급한 가톨릭이 융성한 지역명을 가진 성씨들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 영주로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그도 장인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다만 2군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도였다. 그는 불교에서도 일련종(日蓮宗)을 믿었는데 그의 휘하에는 승병들도 많이 있었다. 일본에서 승병들은 예전부터 사병을 육성해 전국시대 때 다이묘들과도 대등한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크리스천 선교사들의 입장

임진왜란을 일부 인사들은 예수회의 가톨릭에 의해 저질러진 십자군전쟁으로 호도하기도 하지만 이는 엉뚱한 역사 해석이다. 당시 선교사들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갈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기독교 다이묘들이 전쟁에 앞장선 이유는 히데요시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서 일본 선교사들, 특히 발리냐노 등이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 전면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맞는 것 같다.


한편, 엔도 슈사크는 <숙적>이라는 장편소설에서 히데요시가 기독교 종교를 버리라는 자기의 명령을 거역하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을 전쟁의 최전선으로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히데요시는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예수회의 힘에 대해 위기감과 아울러 불쾌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도 했다.


히데요시가 나가사키와 도모기의 예수회 영지를 몰수하고,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자 선교사들은 어떡하든지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어 바테렌 추방령을 철회시켜야 할 처지였다.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격파인 코엘로는 동남아시아의 포르투갈 무력을 이용하여 히데요시를 제압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동인도 선교 구역 관찰사였던 발리냐노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그 대신 발리냐노는 히데요시를 찾아 그를 달랬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라고 생각했다. 이는 발리냐뇨 관찰사가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1592년). 그 편지에서 발리냐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적어 히데요시의 광기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최초로 조선 땅에서 미사를 올렸던 세스페데스 신부도 그의 보고서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선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예수회로서는 명나라의 크기, 역사와 문화를 생각하더라도 “조선을 치고 나면 다음은 명나라까지 치겠다”라고 하는 히데요시의 꿈은 허황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예수회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 어떠한 관여나 지지도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 될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에 출병하기 전부터 이 전쟁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그는 선봉대 1군 지휘관으로서 18,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였다. 그들은 부산진성, 다대포성, 동래성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북상하였다. 특히 탄금대 전투에서 궁기병 중심의 신립장군의 조선군 8천 명을 단 4명만 남기고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통탄스럽지만 고니시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키나가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선조가 재빨리 도성을 비우고 의주까지 도망가버려 선조를 잡는 데 실패하였고 이순신으로 인해 해상을 통한 보급로가 끊긴 데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무엇보다 명나라가 전쟁에 참가하였다. 전쟁 개시 후 거의 한 달 만에 평양성까지 진격한 제1군의 유키나가 군과 제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 군은 사면초가의 처지가 되었다.


출구전략: 강화교섭

히데요시의 세 측근 참모가 한양에 들어와 일본의 어려운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들은 길어진 전선의 허약함을 간파하고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부산에서 한양까지 각지에 성채를 쌓을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제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를 북상하여 회령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전쟁상태가 교착되면서 이듬해인 1593년 음력 4월 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수 심유경 사이에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교섭하는 척하며 사실은 군대를 남하시키고 있었다. 1594년의 정월이 되자 명군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명나라 군대는 조선 군대와는 격이 달랐다. 불화살과 투석포에다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혼비백산의 일본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혹한의 평양성을 나와 한양까지 그야말로 죽음의 후퇴 길에 올랐다.


한양에 돌아온 일본군들은 조선인들에게 분풀이를 하였다. 그들은 도성 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을 거의 불태워버렸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성중의 유민들은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생존자도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안색이 귀신과 같았으며, 사람과 말이 즐비하게 죽어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안팎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공사 간의 집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으며 오직 불탄 기왓장들뿐이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한양으로 파견된 히데요시의 측근인 미쓰나리가 은밀히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공모를 하였다. 그들은 명나라와 휴전협정을 맺고자 다시 명나라의 장수 심유경과 마주 앉았다. 그러면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세 측근을 통해 일본군의 한양 철수를 강력 요청하였다. 나고야에 있던 히데요시는 세 측근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일본군을 한반도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지시하였다.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한양을 떠날 때 한양에는 굶어 죽은 남녀 시신이 여기저기 뒹굴었고 대부분의 민가가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일본군은 부산, 울산, 서생포, 김해, 웅천 등 한반도의 남쪽 지역의 바닷가에 왜성을 쌓고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반도 남부에는 무려 26개의 왜성이 건축되었다.


이때 전쟁에 회의를 품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한양으로 파견된 미쓰나리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히데요시를 속이기로 공모하였다. 그들은 명나라로 보내는 히데요시의 사죄문을 조작하였고 명나라와 조선의 가짜 사죄 사절을 일본으로 파견하기로 공모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공모가 들통이 나자 히데요시는 1597년 음력 2월 14만의 대군을 조선으로 파견하면서 정유재란이라고 불리는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미 건강을 잃고 있었고 1598년 8월 5일 히데요시는 조선에 파견한 병사들의 철군을 명하고 18일 오전 2시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켰던 저 망상의 전쟁은 엄청난 상흔을 남기고 그의 사망과 함께 끝이 났다. 조선에서 일본군이 완전 철수한 것은 1598년 11월 말이었다.


조선 노예들

조선에서 임진왜란의 참화는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특히 가토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절과 궁은 불타고 사람들은 죽거나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정유재란 때에 종군해 전란의 참상을 일기로 남긴 승려 게이넨처럼 "산도 강도 불타고 있다. 지옥의 옥졸조차도 죄수를 저렇게까지 학대하지는 않을 텐데..."라며 조선인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을 슬퍼한 이도 있었다.

조선의 노예들은 주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동원된 일본 각지의 농민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각 영지로 흩어져 노역에 강제되기도 하고 세계 각지로 노예로 팔려나가기도 하였다.


일본에 파견되어 있던 선교사들에게 조선 노예문제는 커다란 관심사였다. 1598년 9월 4일 나가사키에서 세르게이라 주교가 일본 각지의 선교사들을 소집하여 조선인 노예 매매에 대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인신매매에 종사한 포르투갈 상인에 대하여는 선교사에게 주어진 권한에서 최고의 형벌이라 할 수 있는 파문에 처하는 동시에 노예 한 사람의 매매에 10 쿠루자아드의 벌금을 징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오타 줄리아

고니시는 조선의 전쟁고아들을 많이 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타 줄리아와 권 빈센시오가 있다. 일본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어떤 사람이 어린 딸을 두고 도망을 가자 병사들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진지로 데리고 왔다. 아기를 불쌍히 여긴 고니시는 그 아기를 규슈의 자기성(우토)에 데려가 그의 처 유스티나에게 맡겼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부인은 아기에게 오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양녀로 삼아 키운 뒤 줄리아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했다. 미모가 출중했던 오타는 자라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줄리아는 양부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당하고 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궁 시녀가 되어 막부에 머무르게 되었다. 줄리아의 미모에 끌린 이에야스는 그녀에게 수청을 요구하였으나 오타는 자신은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이므로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화가 난 이에야스는 그녀를 섬으로 유배시켰다. 이에야스는 그녀를 다시 불러들여 재차 수청을 요구했으나 줄리아가 이에야스의 청을 거듭 거절하자 이에야스는 그녀를 절해고도인 고즈시마로 유배시켰다(1612년). 끝까지 이에야스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던 그녀는 여생을 가난한 섬사람들에게 신앙심을 전해주다 죽었다고 한다. 이 신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즈시마에서는 매년 5월 셋째 주 토, 일요일 줄리아제(祭)가 열리고 있다. 줄리아제에는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뱃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023719e1-c5dc-4c23-9a68-f9c3a41a68f6.png 고즈시마에 있는 <오타 줄리아 현창비>


오타 줄리아를 보면 제주도로 유배 간 황사영의 처 정난주 마리아가 떠오른다. 그녀도 남편인 황사영이 능지처참을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관노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의 인품은 그녀를 서울 할망으로 존경받으며 살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잘 묻어주었는데 그곳이 오늘날 제주도의 대정성지가 되었다.


20210223_153359.jpg 정난주 마리아의 <대정 성지>


권 빈센시오

고니시 유키나가가 구한 또 한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진주성 싸움에서 일본군들이 열 살 약간 넘는 소년 하나를 잡아 왔다. 조선의 장수의 아들이라는 이 소년은 적진을 살피다가 일본군에 첩자로 오인되어 잡혀 왔던 것이었다. 고니시는 대마도주의 아내인 자신의 딸 마리아에게 이 소년을 보냈다. 마리아는 소년을 계속 데리고 있을 처지가 되지 못해 소년을 예수회 신부에게로 보냈고 이리하여 이 소년은 신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청년은 1603년 예수회 수사(修士)가 되었다. 그가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수도자인 권 빈센시오였다.

빈센시오는 신부들의 도피를 돕고, 일본인과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에게 전교하다가 1625년에 당국에 붙잡혔다. 그는 감옥에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다음 해 6월 20일 니시자카(西岸)에서 숯불 화형을 당해 죽었다. 그는 특히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권 빈센시오는 1867년 7월, 205인의 일본인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내가 나가사키의 니시자키 성인기념관에서 한국인 화상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국의 양반의 모습으로 잘 생긴 사내의 인물 그림이 있었다. 바로 권 빈센시오였다. 자세히 보니 한국인 화가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일본인들이 한낮 노비에 지나지 않았던 기리시탄의 얼굴을 저렇게 품위 있게 그리지는 않았겠지.


IMG_4243.JPG 니시자카의 성인기념관에 있는 <권 빈센시오의 초상화>


고니시 외에도 일본에서는 신부들이 조선인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극소수이기는 하나 천주교 신자인 주인 밑에서 착실히 산 덕분에 자유를 얻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유의 몸이 된 후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그 때문에 순교의 대열에도 합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조선인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고 일본의 박해 시에 많이 죽어간 사연이 되었다.

keyword
이전 09화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