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숙적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엔도슈사쿠의 <숙적>으로 본 임진왜란

by 보현


임진왜란의 최일선에 섰던 두 사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앙숙지간이었다. 두 사람의 경쟁과 미움은 임진왜란의 전쟁 양상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이러한 지독한 미움은 두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근시(近侍)로 지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숙적>을 쓴 엔도슈사쿠는 두 사람의 관계를 ‘그냥 주는 것 없이 싫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는 의미에서 엔도슈사쿠가 쓴 <숙적>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앙숙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어릴 때 이름은 야쿠로)는 사카이(오사카 동남쪽에 있는 도시) 출신이었다. 그곳은 16세기에 번성했던 상업도시이자 항구도시였다. 노부나가가 이곳을 직할령으로 삼기 전에는 에고슈(會合衆)라고 불리는 지역의 대표 호상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 고니시의 부친인 고니시 류사는 이곳의 대표적인 에고슈였다. 그는 조선과의 인삼거래를 주로 하는 유명한 약종상(藥種商)이었다.

고니시는 처음에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어, 주로 외교 사자로 일했다. 그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야쿠로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일찍이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이유는 당시의 많은 사람처럼 남만과의 무역을 통한 사업상의 이점을 노리고 서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가톨릭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이에 그 가르침이 몸에 배게 되었다.


image04.png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상


고니시 유키나가와 죽을 때까지 숙적관계에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어릴 때 이름은 가토 도라노스케였다)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히데요시 문하로 들어가 무장으로 자랐다. 도라노스케의 어머니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와는 사촌 자매 간이었다. 그런 관계로 도라노스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히데요시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도라노스케의 어머니는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도라노스케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 중에서도 일연종(一連宗)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image05.png <가토 기요마사>의 초상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자결한 후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휘하의 근시들을 두 파로 나누어 끊임없이 경쟁시켰다. 이는 이시다 사스케(후일 이시다 미쓰나리로 개명)나 고니시 야쿠로와 같은 관료적인 근시와 가토 도라노스케나 후쿠시마 이치마쯔(후일 후쿠시마 마사노리로 개명) 같은 무장 근시의 두 그룹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을 능가하는 거대한 오사카성을 쌓았다. 그 축성 업무를 이시다 사스케와 고니시 야쿠로가 맡았다. 반면,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이후의 판세를 장악하는 전투에서 무장 근시 그룹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가토 도라노스케의 무공이 단연 빛났다. 도라노스케는 마음속으로 축성이나 담당하는 야쿠로를 ‘장사꾼의 아들’로 경멸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 휘하에서 규슈 정벌과 히고 고쿠진 잇키에서 전공을 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고 남부 우토, 야시로, 마시키 3군 20만 석을 받았고, 고니시는 우토(宇土) 성을 새로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성을 쌓을 때 동원한 아마쿠사 제도의 다섯 고쿠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토벌해 아마쿠사 4만 석도 고니시의 영지가 되었다.


면종복배(面從腹背)

야쿠로는 같은 기리시탄이면서 전투능력도 뛰어난 아카시의 영주 다카야마 우콘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1587년 6월 19일 밤, 다카야마 우콘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영지와 가신을 버리고 믿음의 길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자 야쿠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야쿠로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두 사람의 기리시탄 다이묘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밤낮없이 싸움으로 지새우던 전국시대에, 뛰어난 무장이었던 우콘이 영지를 버리고 종교를 택한 사건은 기리시탄 다이묘들뿐만 아니라 히데요시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람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하고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타입도 있고 시선을 현세의 욕망 너머에 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타입도 있는 법이다. 엔도 슈사쿠는 다카야마 우콘이 원래부터 종교적인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날 밤, 야쿠로의 참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기리시탄으로 살아왔으나 아버지처럼 장사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선택한 측면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흠모하던 우콘이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엄청난 충격이 몰려왔다. 야쿠로는 자신의 유약함이 부끄러웠고 따라서 마음이 참담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도라노스케는 “야쿠로는 ‘장사치의 아들’에 불과하고, 진정한 사무라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 야쿠로를 경멸하였다. 야쿠로는 도라노스케의 그런 경멸의 눈길도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더욱 싸늘해져 갔다. 신앙의 길을 택한 다가야먀 우콘은 자기 가신들을 모아놓고 이별 인사를 한 후 섬으로 몸을 피했다. 히데요시의 칼날을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이 사건 후 야쿠로는 한동안 자기혐오와 굴욕감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이 충격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교토지역에서 활동하던 파드레들이 야쿠로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본을 떠나지 않을 터이니 야쿠로 당신이 앞으로 다카야마 우콘이 하던 역할을 맡아 우리를 보호해 주시오”라는 요청이었다. “이제 우리가 믿을 데는 야쿠로 당신밖에 없습니다”라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고뇌에 빠져있던 야쿠로는 마침내 교토 인근에 숨어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러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도우기로, 즉 자신의 주군을 속이기로 마음을 정한다. 이른바 ‘면종복배(面從腹背)’로서 앞에서는 기독교를 버린 듯이 행동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주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기독교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이후 이 면종복배가 야쿠로의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교토의 파드레들과 다카야마 우콘을 자기가 하사 받은 영지인 소토시마(小豆島)로 숨겨주고 그들을 돕는 일을 은밀히 수행하였다.


우콘과 교토의 파드레들의 행적을 탐문하던 히데요시가 야쿠로의 배신행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분노를 마음속에 숨겨두었다. 왜냐하면 파드레 추방령으로 인해 남만선박이 일본으로 오지 않아 군자금 조달 수단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그는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슬쩍 늦추어주는 시늉을 하였다.

그 대신 히데요시가 규슈의 구마모토현에 있는 우토(지금의 우토시宇城市)를 고니시 야쿠로에게 봉토로 하사하면서 가토 도라노스케에게는 고니시의 바로 옆 동네인 구마모토를 봉토로 내주었다. 이때 고니시 야쿠로는 고니시 유키나가로, 가토 도라노스케는 가토 기요마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히데요시는 두 사람이 태생적으로 서로를 싫어한다는 것을 이용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이웃한 봉토를 하사 받자 접경지역에서 영토 문제로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종교문제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고니시는 기리시탄 다이묘의 대표 격으로서 이 당시 가톨릭 신자들의 가장 큰 힘이 되고 있었다. 고니시는 영지를 하사 받자마자 소토시마에 숨겨두었던 다가야마 우콘과 파드레들을 은밀하게 우토로 불러들였다.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리시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 섬은 후일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유키나가는 자비롭게 우토를 다스렸다고 알려져 있다.


기독교 다이묘들을 제일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웠다. 자기의 명령에 불복종한 고니시에게 조선 출병의 제1진을 맡기고 제3진에는 규슈의 기독교 다이묘들을 대거 배치했던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기리시탄으로 유명한 마쓰라, 오무라, 아리마, 고토의 무장들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것에서 히데요시의 의중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이번 작전의 소모품으로 삼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어떤 다이묘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제1진 사령관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용할 수 있는 자는 누구든지 이용한다는 히데요시의 용인술에는 고니시 집안이 조선 인삼의 수입원이었으므로 그만큼 조선의 정세에 밝다는 사정도 고려하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불교도이자 가장 싸움에 뛰어난 가토 기요마사를 제2군에 배치한 것도 히데요시의 뛰어난 용병술이었다.


이리하여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출병의 제일선에 섰다. 본래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가 늘 경멸했듯이 상인 집안의 아들이었고 상인들은 협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마음은 유키나가뿐만 아니었다. 거의 100년에 가까운 전란으로 다이묘들은 모두 전쟁에 지쳐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다. 특히 조선으로부터 쌀과 콩의 원조를 받아 근근이 살아가던 쓰시마로서는 조선과의 전쟁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히데요시의 최측근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뿌리가 약한데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해 염려가 많았다. 이들에 비해, 가토 가요마사는 조선과 명나라를 쳐부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불만에도 불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1진 사령관으로서 조선 출병에 나서야 했다. 고니시 나이 38세 때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첫발을 디딘 고니시 부대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쳐들어갔다.


유키나가는 명나라가 이 전쟁에 끼어드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명나라가 전쟁에 끼어들기 전에 조선과 협상을 지으려던 유키나가는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포로를 통해 조선 측에 화의 교섭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측은 도망가기 바빠 유키나가의 회의 교섭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유키나가 부대가 상주를 함락시켰을 때 가토 부대는 경주성에서 조선군의 수급 1천5백을 벤 뒤, 고니시의 성공을 시기하여 미친 듯이 충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이 충주에 들이닥쳤을 때 고니시 부대가 이미 조선군 8천 명을 거의 다 도살하고 신립 장군조차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토 부대는 이번에는 한양에 먼저 입성하기 위하여 미친 듯이 북상하였다. 가토 부대에게 한양 입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고니시 부대도 밤잠을 미루며 한양으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두 부대가 거의 동시에 한양에 입성했을 때 한양은 텅 비어 있었다. 왕은 의주로 도주하고 대궐은 성난 민중에 의해 불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도 조선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유키나가와 조선을 점령하고 명나라로 진격해야 한다는 가토의 입장이 예리하게 부딪혔다. 둘은 서로의 의중을 의심하였다. 유키나가가 어렵게 조선 측과 화의 교섭을 시작했을 때 이를 눈치챈 가토 부대가 조선 병영을 공격함으로써 화의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고니시와 가토의 증오는 더욱 깊어졌다.


고니시 부대는 선조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하였고 가토 부대는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기 위하여 강원도와 함경도 쪽으로 진격하였다(유성룡은 그의 <징비록>에서 이때의 진로를 두고 구지뽑기로 결정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명나라가 전쟁에 참여하자, 고니시는 명나라의 심원경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교섭에 들어갔고 이들의 교섭 내용을 의심한 가토는 여전히 첩보원을 보내 그들 사이의 흑막을 밝히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후 전쟁이 늘어지자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명나라와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완전 철군 및 사과를 요구하는 명나라와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나라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삼겠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image06.png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행로


명나라와 화의 교섭을 진행 중일 때 히데요시는 가토 부대를 통해 진주성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화의가 깨질 것을 염려한 유키나가는 가토 부대의 이동 경로를 조선에 비밀리에 알려주어 진주성의 백성들을 즉시 피난시키도록 권하였다. 조선 측이 이 통보를 믿지 않아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인들이 많이 죽었다.

유키나가는 숙적인 가토 기요마사가 회의 교섭을 방해할까 보아 끊임없이 가슴을 졸였다.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나라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나라가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연극을 벌였다. 두 사람의 화의교섭에 조선은 발을 들여밀 형편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이 히데요시에게 발각되면서 고니시는 멸문지화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주변 신하와 히데요시의 여인들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명과의 협상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14만 명의 왜군이 다시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제1진을 맡겼고 유키나가 휘하부대가 제2진을 맡도록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그야말로 무신의 전형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불국사와 경복궁 같은 중요한 건물에 불을 질렀고 조선인들을 마구 베어 그가 지나간 길은 폐허가 되었다. 유키나가는 기요마사의 동선을 조선군에게 슬며시 흘려주었다. 조명연합군은 주전론자인 가토 기요마사를 물리치면 일본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유키나가가 흘리는 정보를 믿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정보가 틀림없었다. 선조는 이 일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면하고 그 일을 원균에게 맡겼다. 원균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60척을 날리고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악수를 두었다. 이후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돌아오면서 해상권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군들이 주로 한반도의 남쪽 지방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의 재해권 장악은 일본군으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조명연합군은 기요마사가 장악하고 있는 울산성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울산성의 전투는 두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면서 일본군은 식량부족으로 큰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유키나가는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유키나가 군은 5만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을 대파하고 순천과 남원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조명연합군은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을 알자 유키나가 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유키나가는 명나라와 화의 교섭을 하며 퇴로를 모색하였으나 이순신의 철저한 항전 태도에 밀려 고전하였다.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간신히 사지에서 탈출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났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고니시가(家)의 멸문

히데요시의 사후 그때까지 눈치를 살피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군대를 일으켰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중심이 되어 도요토미 가문 수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모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미쓰나리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이에야스의 시대를 예감한 다이묘들이 대거 이에야스 편에 서면서 전쟁은 초기부터 미쓰나리에게 불리하였다. 마침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 편이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였다. 이로서 일본의 패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톨릭 신자라 할복 대신 참수를 선택했다. 그는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당했다. 죽기 전 신부를 불러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의 청은 이에야스에게서 거절당했다. 그 대신 이에야스는 그들을 교토 시내로 끌고 다니며 온갖 모욕을 주었다. 참수 시 불교의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기리시탄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때 숙적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을 공격했다.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케가 우토 성을 지키며 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우토에 전해지자 성을 지키던 유키카게는 할복하였고 고니시의 영지는 가토 기요마사의 수중에 들어갔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와 결혼한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혼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다. 소 요시토시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천주교를 버리고 불교 신자가 되었다.

고니시 마리아의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가 되었고,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신부가 되었다. 고니시 만쇼 신부는 1644년 가톨릭 박해로 순교하였다. 그는 기독교가 허용되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최후의 일본인 정식 사제였다.

후일 소 요시토시는 쓰시마 섬에 마리아와 고니시 만쇼를 위한 사당을 지어 그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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