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대규모 순교 사건: 26인순교사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은 일본 순교사의 상징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26명의 기리시탄이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고, 이후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신자가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의 피를 뿌렸다. 니시자카의 26인 순교 사건 이후 250년 동안 일본의 기리시탄들은 지독한 박해를 겪게 되었고 이로써 일본에서 기독교의 싹이 잘리게 되니 이곳이 일본 기독교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니시자카(西岸) 언덕은 ‘서쪽의 언덕’이라는 말 그대로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해 있다. 나가사키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이어서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접근 가능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나가사키의 시내 전망이 눈 아래 보인다.
이곳의 공식 명칭이 ‘니시자카코엔(西岸公園)’이다. 이런 역사적인 곳을 짐짓 의미를 뭉개며 굳이 ‘공원’이라고 표현하는 일본인들의 이중성에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야이자사적공원>에서 느낀 울분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으~으~ 참 고약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발표하고 일본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퇴거를 명했으나 발리냐노의 진화 및 포르투갈과의 무역관계를 고려해 칙령을 시행하지는 않았고 예수회의 활동을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건이 일어나 이런 히데요시의 인내력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이른바 ‘산펠리페호 사건’이었다. 역사에 검은 백조가 나타나 역사를 바꾸어버리는 사건이 간혹 일어나는데 ‘산펠리페호 사건’이 바로 일본 기독교 역사에 있어 검은 백조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1596년 10월 1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향하던 에스파냐 선박 산펠리페호가 태풍으로 일본의 시고쿠(土佐)의 고치현 우라토만(浦戶湾)에 표착하였다. 배에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신부들과 수사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표착함으로써 생명은 구했으나 히데요시는 이들을 포박하고 적하물 및 선박을 몰수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선원 중 하나가 “에스파냐는 선교사를 파견해 신자를 늘리고 결국은 그 나라를 정복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듣고 격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수도원을 포위하고 에스파냐와 인연이 깊은 프란치스코 회원 및 프란치스코회 관련자들을 체포하였고 오사카에서 4명의 관련 신자와 3명의 예수회원을 붙잡아 교토로 호송하게 했다. 총 24명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들을 나가사키로 끌고 가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들이 나가사카로 가는 도중 두 명의 신자가 합류함으로써 압송 인원은 총 26명이 되었다. 여기에는 여섯 명의 서양 선교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여섯 명 중에는 에스파냐인 4명, 포르투갈인과 멕시코인이 각 1명씩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인 중에는 12, 13, 14살의 어린이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어린 12세의 루도비코 이바라키는 당시 교토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1597년 1월 4일 교토를 출발하여 오사카를 거쳐 히로시마, 야마구치, 시모노세키, 하카타를 거쳐 한 달 만인 2월 5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혹한의 추운 날씨에 맨발로 거의 1,000km를 걸어서였다.
처음 나포된 24명은 1597년 1월 3일, 교토의 이치죠 모도리바시(一條戾橋)에서 왼쪽 귀가 잘렸다. 그리고 죄인들에게 최대의 모욕과 수치를 주는 관습에 따라 소달구지에 태워져 교토의 대로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많은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이들이 가는 길에 따라나서며 기도도 하고 조롱도 퍼부었다. 신학교 출신의 바오로 미키 수사는 자기들을 따라다니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강론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따라가던 간수가 한 달 동안 그들과 생활하며 순교자들이 고통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순교행렬에 합류하였고 또 한 명의 신자가 교토에서부터 그들과 동행하였는데, 그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 둘이 합류함으로써 순교자는 도합 26명이 되었다.
이들 중에 포함된 12살의 루도비코 이바라키는 “지금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살려주겠다”라고 제안하는 관리인의 제안을 뿌리치고 "잠시뿐인 인생과 영원한 삶을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라고 거절하고 숙부와 함께 순교의 길을 갔다.
아버지 미카엘 코자키를 따라 순교 행렬에 나섰던 14살의 토마스 코자키도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1월 19일, 그는 히로시마 근처에서 어머니에게 이별 편지를 썼는데, “현세는 허무한 것이기에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에게서 오는 어떤 것이든 잘 인내하고 큰 애덕을 실천하십시오. 내 동생들 만쇼와 필립보를 비신자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는 어머님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 어디에도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통에 대한 호소도 없고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과 가족에 관한 걱정과 사랑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14살의 소년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의엿함과 깊은 믿음이 읽는 사람들을 놀랍고 부끄럽게 만든다. 이렇게 어린 나이의 신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오늘날의 14세 소년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신통하다. 이 편지는 <26 성인기념관>에 남아 있다.
1597년 2월 5일,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추운 겨울 날씨에 1,000km의 길을 걸어 나가사키까지 끌려온 기리시탄들은 거의 초주검 상태였다. 고난의 먼 길을 끌려오며 26명의 기리시탄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형장에 이르렀지만, 자신들을 위해 세워진 26개의 십자가와 그들을 찌를 무사들이 창을 들고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었다. 이때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키가 “내 몸을 의탁할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라면서 기쁘게 자신의 십자가를 향해 뛰어가자 다른 기리시탄들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십자가를 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숙부와 함께 순교하기 전, 이바라키는 십자가에 묶인 후에도 몸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천국, 예수, 마리아”라고 외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33세의 바오로 미키의 십자가 상에서의 마지막 설교도 전해지고 있다. “나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죽으며, 죽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입니다.”
히데요시의 수하들은 나가사키 주민들의 동요를 두려워하여 외출 금지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4천 명이 넘는 군중이 몰려와 순교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들이 처형된 후 나가사키 신자들은 감시자의 눈을 피해 일부의 유해를 가져가기도 했고 십자가가 서 있던 곳에 순교의 상징으로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심어 순교자를 기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붉은 동백꽃을 순교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런데 내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담벼락에 핏빛의 붉은 꽃이 한창 피어있었다. 일본어로 ‘구루메쯔쯔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쯔쯔지라니 철쭉 종류인가 본데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붉은 꽃이었다. 처음 보는 꽃이라 우리말의 꽃이름을 알지 못하였으나 붉게 무리 지어 꽃 핀 모양이 동백의 붉은색보다 더 강렬한 핏빛으로 보였다. 그래서 저 핏빛 꽃을 이 순교터에 심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당시 일본에 주재하던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 순교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여 로마 교황청에 보고하였고 이 순교 사건이 유럽으로 전해지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이들 26인을 성인(聖人)으로 선포하게 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니시자카를 가톨릭교도의 공식 순례지로 지정하였다(1950년). 1981년 2월 2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였다.
니시자카 언덕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26 성인부조물>이다. 이 부조물은 도쿄예술대학교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후나코시 야스다케(船越保武)가 4년 반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조각에서 성인들은 감사와 기쁨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각 성인마다 브론즈 1장씩에 조각하여 통합한 예술작품으로서 성인들은 실물 크기로 나타나 있다. 그 자신 크리스천인 야스다케는 이 조각상을 통하여 성인들과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부조하였다고 전한다.
순교자 조각 윗부분에 ‘라우다테 도미눔 Laudeta Dominum (찬양하라 주님을)’이 새겨져 있어 주님을 찬양하며 기쁘게 순교한 성인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순교 부조물의 아래에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는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다.
26 성인 조각상 머리 위로는 성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주로 프란체스코회와 관련된 자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이 조각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잠시의 여정을 쉬고 조각가가 의도한 대로 성인들과의 대화를 나누어보려고 하였지만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였다.
26 성인조각상 뒤편에 <26 성인기념관>이 있다.
이마이 겐지(今井兼次)가 시공, 설계한 이곳에는 26 성인에 관한 자료와 천주교 금지령과 관련된 자료, 1995년 마카오 교회로부터 반환받은 일본인 순교자(17세기 히로시마, 구마모토, 야마구치, 후쿠오카 등지에서 순교한 신도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그 외 후미에 진품과 신부들이 본국에 보낸 편지, 순교 당시 상황을 묘사한 순교화(畵)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귀중한 것으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한(1546년)', 로마로 파견된 4명의 소년 사절 '덴쇼견구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의 한 명인 나카우라 쥴리안의 자필 서한, 후미에, 신자들이 지켜온 <피에타・성모자상>, 잠복 기리시탄이 몰래 숨겨 기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눈의 산타마리아・성모마리아의 회화> 등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잠복 기리시탄들이 예수 마리아 대신 사용했다고 하는 관음성모자상, 예수상이었다.
특히 그들이 예수로 모셨다는 조선시대의 불상이 그곳에 있었다. 조선의 반가사유상 불상을 그리스도로 삼아 기도하였다니 아연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불상 앞에 오래 머무르며 불상을 바라보자 사색하는 그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이마이 겐지(今井兼次)는 이 기념관의 외벽을 도자기 파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도자기들은 26 성인들이 걸은 교토부터 나가사키 사이에 있는 도자기 산지 제품이라고 한다. 멕시코, 스페인의 유명한 도예가로부터 기증받은 것도 있다고 하였다. 도자기는 일상생활의 모습과 종교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기념관 벽에 굳이 도자기 파편을 붙인 작가의 의도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성필립보성당
니시자카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으로 니시자카공원 오른편에 서 있는 성당이 성필립보 성당이다. 성필립보는 멕시코인으로서 사제가 되기 위해 필리핀에서 신학을 마치고 멕시코로 귀국하던 중 배(산펠리페호)가 일본 근해를 지날 때 풍랑으로 난파함으로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26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당시 24세였다.
오우라대성당이 정식명칭으로 <26 성인성당>을 표방하였으므로 성인들이 순교한 이 자리에 건립된 성당은 외국인 선교사 6명 중의 한 명으로서 멕시코 최초의 성인인 성 필립보 데 헤스스(St. Philip of Jesus)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이 성당은 26 성인기념관 건축과 같은 해(1962년)에 이마이 겐지(今井兼次)에 의해 건축되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바르셀로나의 가우디가 연상되는 독특한 외양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선 힘차게 쏟아 오른 두 개의 탑이 압도적이다. 좌측 탑은 기도와 찬미의 탑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하늘에 중개하는 성모님을 나타내고 우측 탑은 천상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통로로 성령의 은사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두 탑에도 도자기 파편을 붙여 26 성인기념관과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이 교회에는 바오로 미키와 야고보 키사이, 요한 고토 성인의 유해가 성당 우측 공간의 특수 용기 안에 보관되어 있다. 박해 때문에 성인들의 유해는 350년 동안 필리핀에서 보관되어 있다가 해금 후 고향 나가사키로 모셔져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갈매못 네 성인의 유해가 박해를 피해 일본의 오우라천주당에 잠시 피신했던 것과 같은 일이다. 순교자들은 죽어서도 유랑을 계속했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졌다. 350년 뒤에라도 고향에 돌아와 안치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