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복심 윌리엄 애덤스

이에야스 대안을 찾다

by 보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나자 이시다 미스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엔케이 등 세 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다이묘에 대해서는 유화정책을 견지하였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 도주라는 이유로 살려주었다. 이는 조선과의 관계복원에 대마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 이에야스는 권력이 안정되자 1609년 조선에 사절을 보내 자신은 임진왜란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내세우며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기유조약). 그는 그 증거로 히젠의 나고야성을 허물었다.


로드리게스 신부

일본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약하게 되면서 일본 최고 권력층들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이든 간에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일본사>를 저술하여 일본의 사정을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린 루이스 프로이스와 순찰사 발리냐노 신부가 오다 노부나가의 비호를 받았다면 일본 총 대리였던 코엘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다.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신부는 아시아의 관구장으로 오면서 적응주의 선교 전략을 펼쳤다. 즉 현지의 언어와 문자를 학습해 사상과 문화를 익힌 다음 해당 지역의 지배층이나 지식인들과의 학술 교류를 통해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파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제자인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성공한 것도 발리냐노의 현지화 전략을 적용한 결과였다.


일본에서도 명나라의 마테오 리치와 유사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수회 신부인 로드리게스였다. 그는 1576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1580년에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3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의 언어, 문화, 관습을 체화하였다.


로드리게스가 부상한 것은 그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 '바테렌 추방령’을 무마하기 위하여 일본을 찾은 발리냐노 신부의 통역으로 그가 발탁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그의 탁월한 일본어 실력에 감탄하게 된다. 히데요시는 만년에 기독교 사제들을 서구의 침략 도구로 경원시했으나 로드리게스와의 인연은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일본 사정에 정통한 로드리게스는 이에야스와도 돈독한 관계를 맺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로드리게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실질적인 무역대리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예수회 일본 교구의 차석 고위직에 해당하는 '대리 사제'로 있었다. 대리 사제는 교구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였고 예수회는 재정난에 고심하던 중이었다.

로드리게스는 쇼군의 후광을 이용하여 일본 유력 다이묘들에게 남만 무역 이권을 연계시키는 중개역을 통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교역품은 생사였다. 로드리게스는 생사 수급 과정에서 가격, 물량, 판매처 결정 등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그런데 '마드레 데 데우스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막대한 양의 생사가 바다에 가라앉자 예수회는 큰 채무를 안게 되었고 로드리게스 책임론이 대두되었다. 그는 나가사키 무역과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했다는 이유로 1610년,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로드리게스의 추방에는 로드리게스에 의해 이권을 위협받은 나가사키 부교 하세가와 후지히로(長谷川藤廣) 등의 무고가 작용했다고도 한다. 이권을 둘러싼 싸움 한복판에 로드리게스 신부라는 예수회 신부가 있었던 셈이어서 흥미롭다. 이 사건은 예수회가 일본의 정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시사한다.


1811_466.jpg 1610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고 自沈한 마드레 데 데우스호의 모형


일본에서 추방된 로드리게스는 그 후 중국 선교에 종사하여 북경 등지에서 많은 활약을 하다 1633년 광동(廣東)에서 73세로 사망하였다.

'마드레 데 데우스호 사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겠다.


네덜란드 선박 리프데호의 표착

1600년 4월 말, 네덜란드 선박 하나가 일본 분고(현재 오이타현) 우스케 해안에 표착(漂着)하였다. ‘리프데(Liefde)호’라는 300톤짜리 상선(商船)이었다. 리프데호는 1598년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총 5척의 선단을 구성해 네덜란드를 떠났다. 그러나 2년이 넘는 항해과정에서 다른 배들은 침몰하거니 나포되고 리프데호 만이 태평양 횡단에 성공해 일본에 표착한 참이었다. 포르투갈 선박이 아니고 네덜란드 배가 일본해역에 나타난 것이 일본 지도층의 관심을 끌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의 명에 따라 리프데호의 선장을 오사카로 호출하였다. 그러나 선장이 병중이었으므로 영국인 항해장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와 네덜란드인 항해사 얀 요스텐(Jan Noosten)이 선장을 대신하여 출두하였다.


이에야스는 그들로부터 급변하고 있는 유럽의 정세를 자세히 듣게 되었다. 당시 세계 제일의 스트롱 맨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잇달아 패배를 당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일본은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기독교를 내세워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있는 것에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1565년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자 그 위협이 일본의 목전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산펠리페호 사건이 일본지도층의 두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에스파냐 식민지였던 네덜란드 북부 7주가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고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새로운 해상 강국으로 부상한 영국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나섰다는 이야기는 이에야스에게 흥미진진하였다.

무엇보다 네덜란드가 천주교 전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과의 무역만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이에야스는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던 포르투갈을 대신할 무역 상대를 찾은 것이었다. 사실 일본은 서양의 신식문물에 매료되면서도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선교사를 앞세워 포교에 열을 올리는 것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민평등을 부르짖는 기독교 사상은 봉건 집권 세력에게는 맞지 않았다. 집권 엘리트 층의 눈에는 기독교 사상에는 사회기강을 무너뜨릴 독소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선교사 뒤에는 식민지 확대를 노리는 그들의 조국이 버티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신흥 해상 무역 국가로 부상하는 영국과 네덜란드와 무역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일본은 도요도미 히데요시 때부터 유럽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우고 싶었으나 이베리아 반도국들은 이 기술을 국가기밀로 취급해 절대 외부로 노출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프데호가 해적선임을 주장하며 화물의 몰수와 선원들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애덤스와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을 적극 활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외교 고문에 임명했다. 이후 애덤스가 조선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서양식 배의 건조를 지시하였다. 애덤스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일본에 처음으로 80톤, 120톤의 서양식 배를 건조하였다. 그 공로로 애덤스는 사무라이 신분이 되었고, 미우라(三浦)를 영지로 받았다. 또한 일본 여자와 결혼하면서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애덤스는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통상에 진력했으며 후에는 나가사키의 히라도로 옮겨 베트남, 태국 등과의 무역 시 외국 상선과 막부의 중재자 역할에 종사했다.

lI2AlOFkHgryKfKLS5bkFnHwd9p2PVo9VKCnk_hy-3z6ZqLK1T_g30kLShnXBMhDhHXGs5RzguLOnZBoxkP7IPekpae35Ty-ChG4HLRikvNLb4ctFAQkFC2mKByfXdX0T9dd56Fw9FuVPQtF-dYhZQ.webp 윌리엄 애덤스


서양식 항해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에야스는 얀 요스텐도 중용하였다. 이에야스는 에도성 인근에 주거를 마련해 주고 에덤스와 요스텐을 수시로 불러 서양의 신기술과 세계 지리, 정세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요스텐은 '야요스(耶楊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는데 오늘날 '야헤스'라는 이름으로 동경 여러 곳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내가 동경에 머물 때 동경역 앞의 <야헤스북센터>를 자주 이용하였는데 그때는 야헤스란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몰랐다. 역시 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에야스는 1609년, 히라도에 네덜란드 상관 개설을 허용하였고 1613년에는 영국의 상관 개설도 허용하였다.


마드레 데 데우스호 사건

일본의 그리스도교 흑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1610년 발생한 ‘마드레 데 데우스호’ 사건이다.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선 마드레 데 데우스호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폭침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선장인 앙드레 페수아(Andre Pessoa)는 자신의 배가 아리마 하루노부 군대의 공격을 받아 탈취될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화고에 불을 질러 800톤급 대형 갤리온선을 자침 시켜버렸다. 이 사건으로 일본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크게 틀어지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608년 마카오에서 일어났다. 1608년 9월 마카오에 입항한 배에 100여 명의 일본인들이 일본도와 조총으로 무장한 상태로 타고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의 주인선(朱印船) 선원들로서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이들이 마카오에 상륙하여 현지인들과 싸움이 벌어지자 마카오 총독 대리이자 일본 무역 선단의 선장인 앙드레 페소아가 병사들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일본인들이 건물 안에 피신해 농성을 벌이자 페수아는 건물에 불을 지른 후 도망치는 일본인들을 모조리 사살해 4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나머지 50명은 사고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진술서에 서명한 이후에야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하루노부의 가신들이 다수 살해되었다.


일본인들이 대거 동남아시아로 무역을 나선 것은 히데요시 이후였다. 히데요시는 규슈를 평정한 후 왜구 및 다이묘들의 허가 없는 대외통교를 억제하기 위하여 붉은 인장이 찍혀있는 허가서(주인장 朱印狀)를 가진 주인선(朱印船)의 무역만 허락하였다. 히데요시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에야스는 주인선 제도를 공식적으로 제도화하였다(1604년). 그는 막부 직할령으로 편입된 나가사키를 주인선의 출, 도착항으로 지정하는 하편, 나가사키에 부교(奉行 막부의 지방통치 행정사관)를 두어 수출입 목록, 가격, 유통 전반을 관리하였다.


107982.LL.jpg
Red_Seal_Ship_departs_Nagasaki_to_Annam_(Vietnam).jpg
주인장(왼쪽)과 일본의 동남아 무역선(오른쪽): 도쿠가와가의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from the Gaiban Shokan.


주인선 제도로 동남아지역 도항이 공식적으로 허가되자 일본인들의 남방 진출이 크게 증가하였다. 매해 수십 척의 주인선이 남중국해를 왕래했으며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이 동남아 각지의 교역 중심지에 체류하면서 일본인 집단 거류지(니혼 마치)가 형성될 정도였다. 일본인들이 동남아로 진출하여 중국과의 직접무역에 나서자 중계무역을 독점하던 포르투갈의 입지가 흔들렸다. 거기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영국이 해외 무역에 나서면서 바다 위의 경쟁 관계는 더욱 불을 품었다.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게 되자 바다에는 사략선(노략질하는 배)들이 횡행하게 되었다. 무역선들도 기회가 있으면 해적선으로 돌변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의 배들도 포르투갈의 무역선을 공격하여 큰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앞에서 말한 페수아가 지휘하는 데우스호가 일본을 향하여 마카오를 출항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함선도 쫓아 나가 데우스호의 나포를 노리고 있었다. 데우스호가 VOC보다 먼저 나가사키에 입항했으나 이에야스가 먼저 알현을 허락한 것은 VOC였다. 당시 나가사키의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관리는 나가사키 부교 하세가와 후지히로였다. 후지히로는 새로운 무역방침을 들며 포르투갈에 불리한 무역 관행을 요구하였다. 이에 페수아는 이에야스를 만나 마카오 소요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아울러 하세가와가 사익을 편취하려고 비행을 저지르고 있음을 고(告)할 계획을 세웠다.

예수회 신부들의 만류로 이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으나 하세가와는 앙심을 품었다. 그는 마카오에서 부하들이 살해된 것에 대한 하루노부의 원한을 충동질하였다. 이에 하루노부는 이에야스에게 보복 허가를 얻어 데우스호를 공격하였다. 하세가와 측과 하루노부 측이 데우스호를 포위하자 페수아는 비싼 화물을 이들에게 넘겨주기 싫어 자폭을 택했다.

이 일로 예수회는 큰 손해를 입게 되었고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사건이 이것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좋았겠으나 그 후 일이 더욱 꼬이게 되었다. 아리마 하루노부가 데우스호를 공격하였을 때 오카모토 다이하치라는 사람이 하루노부의 공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여 아리마의 옛 영지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하루노부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 그 후 그의 제안이 거짓이었음이 발각되어 오카모토는 1612년 3월 21일 슨푸에서 화형 당하였다. 그가 체포될 때 ‘하루노부가 나가사키 부교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라고 무고하였다. 이 일로 아리마 하루노부도 할복명령을 받았다. 오카모토와 하루노부 모두 천주교인이었으므로 이에야스는 자기 주위에 잠복하고 있는 기리시탄 신하들에 대해 환멸과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통치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체계적 사상 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때마침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군신 간의 충의를 강조하며 예수회를 배격한 것도 그의 결심에 도움을 주었다.

히데요시의 손에는 이제 예수회가 아닌 개신교의 네덜란드가 꽃패로 쥐어지게 되었다. 과거 같았으면 교역단절을 우려해 선교사 조치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나 네덜란드와 영국의 등장은 막부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제 기리시탄 박해를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다.

keyword
이전 12화12. 니시자카(西岸) 언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