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막부의 혹심한 종교 탄압
이에야스는 1605년 4월 16일, 정이대장군직을 아들인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오코쇼(大御所)로서 일선에서 물러났다. 1607년 그는 어릴 때 인질로 잡혀있던 스루가 지방의 슨푸(駿府)에 새로운 성(城)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며 막후에서 일본을 통치하였다. 가톨릭 지도자들이 막후 실력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왔다.
1600년까지 일본 포교는 공식적으로 예수회 담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닐라에 본거지를 둔 프란치스코회 등 에스파냐를 배경으로 한 수도회 수도사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열렬히 전교 활동을 하다 ‘26인순교사건’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예수회는 탁발수도회의 일본 내 포교활동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1600년 11월, 교황 클레멘스 8세는 탁발수도회가 일본에 가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를 기회로 1602년 6월 25일에는 필리핀의 탁발수도회 회원 15명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늘 에스파냐의 식민주의를 경계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에스파냐의 무역체계에 일본이 편입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이에야스는 마닐라에서 건너온 프란치스코회 제로니모 데 제수스 신부를 만나 일본이 필리핀과 멕시코 등 에스파냐 식민지들과 교역하고 싶어 하는 희망을 표시하였다(1598년).
1609년, 필리핀 전총독이었던 로드리고 데 비베로(Rodrigo de Vivero) 일행이 멕시코에서 일본으로 오던 중에 태풍을 만나 센다이번 이와다(岩和田) 해안에 좌초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야쓰는 그들에게 애덤스가 건조한 갈레온선을 선물하여 이들을 멕시코로 송환시켜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과 에스파냐 사이에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에야스는 이들과 에스파냐와의 통상과 일본 사절단의 에스파냐 왕실 방문을 논의했다.
1607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일본 포교장 알론조 무뇨스를 일본의 사신으로 삼아 필리핀 임시총독인 벨라스코와 함께 에스파냐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에스파냐와의 통상교섭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복인 센다이 번의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일본 사절단을 꾸려 이들을 에스파냐와 로마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 일에 에스파냐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텔로 (Luis Sotelo)가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루이스 소텔로 신부가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때는 1603년이었다. 마닐라의 일본인 마을(니혼 마치)에서 추방당한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을 도우면서 일본어를 배운 소텔로 신부는 일본에 도착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아들 히데타다 부자를 만났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에도에서 포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아사쿠사에 한센병을 치료하는 병원을 세워 활동하던 중 센다이번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와 친하게 되었다.
161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에도의 가톨릭 신자들을 탄압할 당시 소텔로는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다테 마사무네의 탄원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사절단 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로마에서 센다이로 돌아오던 도중인 1618년, 소텔로는 필리핀 총독이 억류하는 바람에 마닐라에 남게 되었다. 그 후 소텔로는 사쓰마에 잠입했다가 곧바로 체포되어 1624년 오무라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직접 외국과의 교역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바다로 나갈 수 있는 선박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는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에게 서양식 선박의 제조를 독려하였다. 이렇게 하여 1610년, 일본 최초로 먼 항해가 가능한 선박이 제조되었다. ‘San Buena Ventura’ 호로 명명된 이 선박을 타고 1610년 다케다 쇼스케(田中勝介)라는 기술자를 중심으로 22명의 일본인들이 뉴스페인의 중심지인 멕시코를 다녀왔다. 일본이 건조한 배로 태평양을 건넌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에 자신을 가진 막부는 1612년에도 자신들이 건조한 배를 멕시코로 출항시켰지만, 일본 해역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이에 실망하지 않고 막부는 다테 마사무네를 통해 에스파냐와 로마로 보낼 사절단을 위해 먼바다 항해가 가능한 새 선박 제조에 앞장섰다. 이렇게 하여 1613년 당대 일본 기술을 총동원하여 배수량 기준 500톤에 전장이 55m인 일본 역사상 최대의 선박이 건조되었다. 이 선박은 다테 마사무네의 비용으로 센다이번에서 건조되었기 때문에 ‘마사무네호’로 명명되었다가 뒷날 유럽식으로 ‘산 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호’로 개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센다이(仙臺) 번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의 명령으로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에스파냐와의 통상교섭을 위해 루이스 소텔로 신부를 정사로 하고, 자신을 부사로 하여 사절단 180여 명을 이끌고 1613년 10월 28일, 쓰키노우라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에스파냐 왕국의 수도인 마드리드와 교황청 수도 로마였다.
이들은 태평양을 건너,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의 멘도시노 곶(Cape Mendocino)에 도착한 다음 남하해 멕시코의 아카풀코(Acapulco)에 도착했다(1614년 1월 25일). 하세쿠라 일행은 멕시코의 에스파냐 당국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바우티스타호를 아카풀코에 정박시켜 두고 그들은 육로를 통해 멕시코 시티에 도착했다(3월 24일). 곧이어 멕시코 대서양 연안의 베라크루스(Veracruz) 항에서 에스파냐 선박으로 갈아타고 멕시코를 떠나 쿠바의 하바나 항에 들렀다가 에스파냐로 향했다. 일행은 10월 23일 세비야(Seville) 항에 도착했고 에스파냐 측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이듬해인 1615년 1월 30일, 하세쿠라 사절단은 마드리드의 왕궁에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서신을 국왕에 전달하고, 에스파냐와의 통상조약 체결을 제의했다.
사절단은 에스파냐가 마련해 준 프리킥함을 타고 로마로 향했다.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 사절단을 태운 선박은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상트로페(Saint-Tropez)에 들렀다. 그곳에서 프랑스 지방 영주들의 영접을 받았다. 사절단의 프랑스 방문은 일본인으로선 처음이었다.
사절단은 1615년 11월에는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일본어와 라틴어로 된 두통의 서신을 교황에게 제출했는데, 그 안에는 에스파냐와의 통상조약과 일본에 가톨릭 사제를 보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교황은 사제들을 일본에 보내는 것은 허용했지만, 에스파냐와의 통상 허용은 답을 하지 않았다.
1616년 4월 하세쿠라 일행은 에스파냐로 돌아와 펠리페 3세를 다시 알현했으나, 통상조약에 관해서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에스파냐 왕실이 하세쿠라 사절단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표가 아니라, 센다이 영주의 대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통상교섭에 성공하지 못해 실망한 하세쿠라 일행은 1616년 6월 세비야를 출발해 멕시코로 항해한 후 1620년 9월 20일 센다이로 귀국했다. 1613년에 출항한 후 무려 7년에 걸친 여행이었다.
그러나 하세쿠라 사절단이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일본의 선교환경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그들이 유럽을 순방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의 가톨릭 금지는 확고해지고 있었다. 하세쿠라 사절단이 일본을 떠난 이듬해인 1614년에는 일본 전역에서 가톨릭이 금지되었다.
결국 다테 마사무네도 유럽과의 교역을 포기하고 하세쿠라 사절단이 센다이에 도착하기 이틀 전인 9월 18일, 영지 내에서 가톨릭 금지령을 발표하였다. 하세쿠라는 실의에 빠져 1622년 8월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센다이 번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는 예수회 포르투갈 신부 디에고 갈바리오, 사무라이와 농민 8명을 혹한의 히로세가와에서 동사로 순교시켰다(1624년).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갖고 돌아온 ‘게이초(慶長) 유럽 파견 사절단 관계 자료’는 에스파냐 세력이 대서양을 건너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인 노예들까지 그곳으로 팔려와 있는 모습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일본 지배층 전체에 충격과 위기의식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도쿠가와막부는 국내의 가톨릭 신자들을 국외로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나가 있는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하였다. 막부는 대항해를 할 수 있는 유럽식 배 만드는 조선술을 폐기하면서까지 일본과 가톨릭 유럽 세력의 접촉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른바 쇄국정치로의 귀환이었다.
‘게이초(慶長) 유럽 파견 사절단’에서 보듯이 센다이 번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는 자신의 영역확대를 위해 가톨릭 신부들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동북부지방으로도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본격적인 전파는 1614년 교토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면서 개종하지 않은 신도들을 혼슈의 동북쪽 끝인 무쓰 쓰가루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한편, 예수회 소속 지롤라모 데 안젤리스 신부는 혼슈 동북쪽 끝으로 유배 간 가톨릭 신자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1615년 동북부지방으로 갔다가 1618년에는 홋카이도로 건너갔다. 1621년 다시 홋카이도로 건너간 안젤리스 신부는 금광에서 일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서 위로하였다. 이때 그는 홋카이도에 대한 보고서와 지도를 작성하였다. 이후 안젤리스는 에도에서 활동하다 1623년 ‘에도대순교’ 때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렇게 가톨릭이 일본 동북부지방으로 번져나가게 되면서 이곳에서도 순교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629년 1월 12일 동북지방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에서의 순교사건이 일어나 혹쿠산바라에서 57명이 순교한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성지로 나가사키 부근을 주로 거론하였지만, 일본 동북부의 아키타지역에서 성모님(秋田の聖母マリア)이 발현하여 세계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왜 아키다일까?” 하고 의아해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일본 아키타 인근 외딴 지역인 유자와다이의 성체봉사회 수녀원의 카츠코 사사가와 아녜스 수녀에게 1973년 성모님이 발현하였고 경당에 모셔 놓은 성모상이 1975년 1월 4일부터 1981년 9월 15일까지 모두 101번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었다. 이는 일본 NHK에서 보도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나는 이 사건을 일본의 동북부 지방으로 번진 그리스도교의 싹이 이곳에서도 성숙해지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이렇듯 에스파냐와의 통상교섭의 길을 찾던 이에야스였지만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이후 가톨릭 금지로 마음을 바꾸게 된다. 1614년 이에야스는 가톨릭 금교령을 전국적으로 발표했다.
이제 막부의 태도는 명확해졌다.
1614년 1월 6일, 교토의 가톨릭 신부들이 막부로부터 추방 통보를 받았다. 1월 13일, 지하교회에 남을 사람을 빼고 교토의 신부들이 모두 나가사키로 철수했다. 1월 18일부터 교토의 교회가 파괴되기 시작했고 9월에는 나가사키의 교회들도 파괴되었다. 이런 탄압을 견디지 못한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포르투갈 배 세 척에 나눠 타고 일본을 떠났다(9월 24일). 일본에 머물던 선교사의 3분의 2가 이때 일본을 떠났다. 예수회 선교사와 신도들을 실은 두 척의 배는 마카오로 향했고 그 밖의 수도회 선교사 및 신부들을 태운 나머지 한 척은 마닐라로 향했다. 마닐라행 배에는 다카야마 우콘과 나이토 조안을 비롯한 가톨릭 장군들도 타고 있었다. 나이토 조안은 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 사이에서 실무 교섭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히데요시가 유럽인과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을 대거 국외로 추방한 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숨어 있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리 세력을 뿌리 뽑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 유럽 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미리 차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1614년에 11월 19일, 이에야스는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 세력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1615년 5월 8일에 오사카성이 함락되면서 이제 천하는 명실공히 이에야스의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막부의 뿌리를 튼튼히 내려놓고 1616년 4월 17일에 눈을 감았다.
이에야스의 뒤를 이은 쇼군들도 선대의 유업을 착실히 이었다. 아니, 가톨릭 신자에 대한 탄압은 가일층 심해졌다. 제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와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철저한 금교정책과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막부의 관리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갖가지 묘안들을 짜내는데, 이에 가장 앞장선 이들이 나가사키의 부교(奉行)들이었다. 이들은 나가사키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고안한 기리시탄에 대한 고문방식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악독한 것들이어서 일본인들의 잔혹함을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
가령 1614~1626년까지 나가사키의 부교를 지낸 하세가와 후지마사 곤로쿠는 나가사키의 모든 성당과 병원 등 교회 관련 시설을 파괴하였고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숨은 사제를 탐문하였으며 기리시탄 묘지를 파헤쳐 유골을 내다 버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626년에 부임한 나가사키 부교 미즈노 모리노부는 후미에를 고안하고 실시하였으며 시마바라의 온천 열탕 지옥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1629년에 부임한 다케나카 시게요시 우네메는 아나즈리 고문을 고안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아나즈리 고문은 먼저 1미터 정도 땅 구멍을 파고 오물을 반쯤 채운 후 기리시탄의 내장이 밑으로 쏠리지 않게 뚤뚤 말아서 거꾸로 매달아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피가 몰려서 죽지 않도록 머리에 작은 구멍을 내서 며칠이고 살아있는 동안 피를 흘리며 고통을 받는 고문이다. <침묵>의 페레이라 신부는 아나즈리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배교하지만 덴쇼소년사절단으로 로마를 다녀온 나카우라 줄리안 신부는 4일간이나 아나즈리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하였다.
1635년부터는 데라우케(寺請) 제도가 시작되어 주민들을 특정 절에 등록시켜서 결혼, 양자, 취직 등 인적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이 기리시탄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서류를 작성케 하였다.
이들의 이와 같은 가공할 고문과 금교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배교 혹은 순교할 수밖에 없었다.
교토대순교 사건은 1619년(겐나元和 5년) 에도막부의 2대 쇼군인 도요토미 히에타다의 명령에 따라 교토 일대에서 벌어진 박해사건을 일컫는다. 쇼군의 명령에 따라 교토지역의 모든 성당은 불태워 파괴되고, 교토 치안과 감찰의 총책임자를 시켜 신자들을 색출해서 투옥하였다. 1월 10일, 36명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옥중에서 2살 어린이를 포함하여 8명이 순교하였고 마침내 10월 6일, 살아남은 52명의 신자를 9대 마차에 태워 교토 시내를 온종일 조리돌림시킨 후, 가모가와(鴨川) 쇼우멘교 형장에서 화형을 집행했다. 남자가 26명, 여자가 26명, 그중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11명 포함되어 있었다.
형장에는 십자가가 27개가 세워져 있었고 십자가 하나에 여러 명을 묶어 매달아 화형을 집행했는데, 그중에는 세 아이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가사키의 부교인 하세가와 후지마사 곤로쿠에 의해 일어난 대박해가 1622년 9월의 겐나대순교이다. 도쿠가와막부는 기독교 금교령을 어긴 가톨릭 사제 및 수도사, 전도사 등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둬두고 있었다. 그러다 1622년 9월, 전원 처형 명령이 내리자 가톨릭 신자들은 나가사키의 우라카미를 경유하여 니시자카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일괄처형되었다. 예수회,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부 9명과 수도사 13명, 신자 33명 등 총 55명을 니시자카언덕에서 처형하였는데, 20명은 화형으로 35명은 참수형으로 처형했다. 화형 당한 사람 중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일식 관측을 통해 위도를 측정한 것으로 알려진 카를로 스피노라 신부가 포함되었다. 그를 숨겨준 포르투갈인 도밍고스 조르지와 그의 부인 및 어린아이도 희생자에 포함되었다.
일본인 첫 사제인 기무라 세바스티앙도 이때 순교했다. 조선인 안토니오도 화형 당하였고 그의 아내 마리아와 세 살짜리 아기 페트로가 참수되었다. 여성과 어린이가 많이 포함된 것은 선교사들을 숨겨주었던 일가를 전원 처형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이 탄압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겐나대순교’라고 한다.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취임하자마자 에도에 안젤리스(Girolamo de Angelis) 신부와 갈베스(Francisco Galvez) 신부가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격노한 그는 “탐색을 엄중히 해서 체포 처형하라”라는 불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일본 내에는 30여 명의 선교사가 잠복하여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1623년 12월 4일, 에도(江戶, 동경) 시바구치 후다노츠지(札の辻)에서 예수회 안젤리스 신부, 프란치스코 갈베스 신부와 엔보(遠甫) 수도사, 신자 하라 몬도 등 50명이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갈베스는 1606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614년 추방되었으나 4년 뒤인 1618년 다시 일본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라 몬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신단의 주요 인물로서 1600년에 세례를 받았다.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배교를 거부하다가 1615년 체포되어 손가락, 발가락이 잘리고 이마에 십자 낙인이 찍혀 추방되었으나 다시 에도에 돌아온 것이 발각되어 화형 당했다.
또한 12월 2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순교자들의 가족과 순교자들을 숨겨준 신자들까지 화형과 참수로 처형되었고 이후에도 이곳에서 많은 신자들의 순교가 이어졌다.
시바구치 후다노츠지(札の辻)는 오사카와 나고야 방면에서 에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지였다. 후다노츠지(札の辻)라는 명칭은 여기에 포고 법령 등의 방을 붙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현재도 동경 미나토구에 후다노츠지보도(札の辻步道)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많은 신자들을 참수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서소문 밖도 삼남지방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죄인을 처형하거니 효수하여 목을 내걸면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은 조선시대 공식 국가 참형지였다.
겐나대순교 사건은 국내적으로는 전국적으로 가톨릭 탄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빠르게 해외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닐라의 신부들이 앞다퉈 일본에 잠입해 순교의 대열에 몸을 던졌다.
동북 지역의 센다이를 위시하여 히로시마, 오무라 등지에서 선교사들의 순교가 계속 이어졌다.
1632년 7월 19일에는 이시다 안토니오 신부 등이 시마바라의 운젠 화산에서 열탕고문을 당한 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해 9월 16일에는 로마에 다녀온 덴쇼 소년사절단 가운데 한 명인 나카우라 줄리안이 순교하였다.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배교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갔지만 흔치 않지만 배교자도 생기게 되었다. 1633년 가을 예수회 신부 크리스토방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을 받고 배교한다. 이 배교 사건이 엔도 슈사크의 <침묵>에 주요 모티브로 등장한다. 소설에서와 같이 그는 배교한 후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였고 일본인 이름(사와노 주안)으로 일본에 정착하였다. 그 후 그는 가톨릭 비판에 앞장서게 된다. 그는 가톨릭 비판서를 집필하는 한편 일본에 잠입하는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을 심문하고 논박하며 배교하도록 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페레이라 신부가 가톨릭을 버린 데 자극받은 이탈리아 신부 안토니오 루비노가 신부 5명, 종자 3명과 함께 사쓰마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1642년). 흥미롭게도 이들을 심문한 이가 페레이라였다고 한다. 그 후 페레이라는 일본인 제자를 육성하여 네덜란드 학문, 즉 난학(蘭學)으로 향하는 길을 연다.
이제 일본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온전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숨 막히는 환경 속에서 1637년 11월, 규슈 시마바라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시마바라의 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