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시탄 농민의 난
어디든지 가혹한 압박과 수탈이 있으면 민심이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637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도 전형적인 민심 폭발의 현장이었다. 이 난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 전쟁이었다는 점이 특이했고 이 사건 이후 철저하고 혹독한 박해로 일본에서 기독교의 싹이 완전히 잘렸다는 점에서 일본 기독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원래 시마바라(島原) 반도는 센고쿠(戰國) 시대 이후 아리마(有馬) 일족이 지배해 왔다.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 때 세력이 컸다. 아리마 하루즈미의 장남의 아들이 아리마 하루노부였다. 부친 사후 아리마 가문을 이어 시마바라의 영주가 된 하루노부는 열렬한 기리시탄 다이묘로서 예수회의 초등교육기관인 세미나리오와 고등교육을 가르치는 콜레지오를 아리마가(家)의 거성인 히노에(日野江) 성 아래에 설치하였고 덴쇼소년사절단 파견에도 앞장서서 지원하였다.
아리마 하루노부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 당연히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그런데 그 아리마 하루노부가 1609년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에 연루되어 할복의 형을 받았다. 막부는 아리마 일족의 영지를 휴가(日向國)의 노베오카(延岡)로 전봉하고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를 시마바라 번의 새 번주로 책봉했다(1616년).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인정사정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리시탄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는데, 기(切), 시(支), 탄(丹) 등이 새겨진 달궈진 도장을 이마에 지졌고, 신자들을 운젠 지옥 온천 열탕 속에 집어넣는 잔인한 형벌을 고안해 냈다. 또 년공(年貢)을 바치지 못한 농민들에게 도롱이를 입혀 불을 붙이는 등 잔혹함이 끝이 없었다. 그 아들인 마츠쿠라 가츠이에(松倉勝家)는 아버지보다 더욱 폭정을 일삼아 주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시마바라와 하야사키 해협(早崎海峡)을 사이에 두고 아마쿠사(天草)가 있다. 본래 이곳은 1589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봉토로 주어진 곳이었다. 당시 이 지역의 총인구 3만 명 중 2만 3천 명이 기리시탄이었고 60여 명의 신부와 30여 개의 교회가 생겨나며 아마쿠사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유키나가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되고 그 뒤로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가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테라자와 히로타카의 아들인 테라자와 가타타카(寺沢堅高)도 기독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으며 주민들에게 과도한 조세를 부과했다.
이처럼 이 두 지역에는 기독교를 믿는 주민들이 많았으며, 영주가 바뀌면서 주군을 잃고 낭인 신세가 된 무사 계층도 많았다. 아리마 일족과 고니시 일족에 종사하던 가신들도 평민의 신분으로 몰락하게 되자 불만이 많았다. 기리시탄들도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막부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려 했다. 때마침 흉작이 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영주가 된 마쓰쿠라 시게마사와 테라자와 히데타카가 각각 시마바라성(島原城)과 도미오카성(富岡城)을 새로 쌓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지역의 주민들은 각기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시마바라에서는 1637년 10월 25일 기리시탄 농민들이 시마바라 성을 공격하면서 잇끼(난)가 시작되었다. 난이 일어나자 시마바라 번은 곧바로 토벌군을 보냈으나 반란군의 규모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자 토벌군은 시마바라성으로 물러나 막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반란군은 시마바라성을 에워싸며 기세를 올렸고, 난은 시마바라 반도 서북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아마쿠사 지역에서도 고니시 일족의 옛 가신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그들의 총대장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라는 16세 소년이었다. 아마쿠사 시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였던 낭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구원자로 숭배받게 된 이유는 아마쿠사의 선교사 마르코스가 1614년에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25년 후에 천동(天童)이 나타나 파라이조(천국)가 실현된다”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가 예언한 해에 아마쿠사 시로가 태어났고 그는 물 위를 걷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등의 기적을 베풀어 이 지역 기독교도들에게 구원자로 숭배되었다.
아마쿠사의 반란 세력은 1637년 11월 13일 혼도성(本渡城)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도미오카성을 공격해서 함락 직전까지 갔으나 규슈 지역의 번들이 토벌군을 파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마바라 반도로 건너가 시마바라의 반란 세력과 합세했다.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반란 세력은 옛 아리마 일족의 거성이던 하라성(原城)을 수축(修築)하면서 공격에 대비했다(12월 1일). 당시 반란군의 세력은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3만 7천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11월 8일) 막부는 규슈 지역의 번들로 구성된 토벌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하라성을 포위하고 1637년 12월 10일, 일차 공격에 나섰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12월 20일의 2차 공격도 실패하여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막부는 다시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를 새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벌군의 이타쿠라 시게마사는 자신의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둘러 공격을 감행했다가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1638년 1월 1일). 그러자 막부는 후쿠야마 번(福山藩)과 고쿠라 번(小倉藩)에게 출정을 명령했고, 토벌군의 병력은 12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규슈에 도착한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는 하라성에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성을 포위해 물자의 보급을 차단하는 작전을 펼쳤다. 1월 13일에는 나가사키에 주재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장(商館長) 니콜라스 쿠케바커르(Nicolaas Coeckebacker)의 지원을 받아 함선에 포르투갈 깃발을 내걸고 성으로 포격을 가하게 했다. 포격은 성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포르투갈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던 반란군의 사기를 꺾는 데는 효과를 거두었다. 식량이 떨어진 반란군은 바다에서 해초를 따먹으며 근근이 버텼으나 2월 27일에 진행된 총공격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2월 28일 마침내 하라성은 함락되었고, 시마바라의 난은 진압되었다. 진압까지 무려 128일이 소요되었다.
막부는 농민이 포함된 잇끼(봉기) 세력을 가톨릭 신자들의 봉기로 몰아 3만 7천 명 전원을 몰사시켰다. 아마쿠사 시로는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효수되었다. 진압군은 3월 1일 하라성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3월 9일, 에도에 시마바라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토벌군은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지역의 기독교도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난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 지내던 일부 기독교인들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막부는 난의 책임을 물어 번주 마쓰쿠라 가쓰이에와 테라자와 가타타카의 영지를 몰수했으며, 마쓰쿠라 가쓰이에게는 참수형을 내렸다. 막부는 시마바라의 난을 단순한 영주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막번체제를 부정하는 대반란으로 보고 그리스도교 금교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시마바라 봉기가 진압되고 이듬해인 1639년, 막부는 포르투갈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시마바라의 난의 배후에 포르투갈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인이나 영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와 일본인 어머니 32명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영토였던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추방되었다. 다음 해에는 무역 재개를 요구하는 포르투갈 사절 61인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하였다. 1647년에 다시 사절단이 왔지만 막부는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재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벌군을 지원했던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교역을 허용했다.
시마바라 번에서는 후미에를 특히 엄중하게 실시했다. 후미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매달린 예수상이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판 또는 금속 성화상을 만들어 기독교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밟고 지나가게 하여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밟지 않으면 기독교 신자로 간주하여 체포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을 절의 시주인 단가로 만들어 종문 호적부에 기록했다. 예전에 그리스도교 신자였다가 종교를 버린 사람과 그 자손은 유족으로 불려 5~7대에 걸쳐 감시를 받았다. 그 사람이 죽으면 쇼야나 벳토에 보고하고 관리에게 검시를 받도록 하였다.
이처럼 가혹한 탄압을 받자 그리스도교들은 은밀히 숨어서 신앙을 지키는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특히 아마쿠사의 시모시마 남부에 있는 오에(大江)나 사키쓰(崎津) 지역의 신자들은 잇키에 참가하지 않았던 탓에 비밀리에 신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1805년, 아마쿠사에서는 4개 마을 1만여 명 가운데 반이 넘는 오천이백여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이불(異佛)을 신앙하는 가톨릭 신자라고 판명되어 <아마쿠사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기리시탄의 숫자가 너무 많아 엄격한 처벌이 어려웠다. 그들이 방면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2018년 6월, ‘나가시카와 아마쿠사 지방의 가쿠레 키리시탄(伏キリシタン, 숨은 그리스도인) 관련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495호)으로 등재되었다.
시마바라는 나가사키에서 차로 약 1시간 반 정도 남동쪽으로 달리면 나타난다. 운젠산이 우뚝 솟아있으므로 나가사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어림해 볼 수 있는 거리에 시마바라가 있다.
이곳에 있는 시마바라성을 방문하였다.
흰색으로 깨끗이 단장된 시마바라의 성이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킨 원인이 된 성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우아하였다. 성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으며, 성곽이 주변 지역 위에 우뚝 솟아 있어 숨을 헐떡이며 천수각에 오르면 막 세수하고 나온 듯이 깨끗한 시마바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성은 1618년 새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주민들의 원성을 들으며 7년에 걸쳐 축조하였다. 번주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겪다가 1874년에 허물어진 성을 196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17세기 중반, 이곳을 휩쓸었던 격정의 흔적은 시마바라성 일층에 마련된 ‘기리시탄 자료전시관(キリシタン史料館)’에 전시된 전시물이 대변하고 있었다. 기리시탄 자료 전시관에는 일본 내 그리스도교의 전파 역사와 기독교와 관련된 예술품 및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특히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종교활동에 사용했던 소위 이불(異佛)들이었다. 관음상을 표방한 마리아상이 종류도 많고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어 치열했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는 것 같았다.
시마바라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이 시마바라 성당이다.
이 성당은 1612년부터 1658년 사이에 시마바라 반도 일대에서 기독교 박해에 의해 순교한 수만 명에 달하는 신자들을 기리기 위해 1997년에 준공되었다. 26 성인순교 사백 년과 시마바라의 난 삼백육십 년을 기념하여 지어졌다고 하는데 아담한 팔각형의 성당이 단아하고 정갈하였다.
이곳에는 시마바라와 관련 있는 인물들을 조각상이나 스테인드 글라스의 그림으로 기념하고 있다. 우선 성당 우측 마당에는 시마바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일본 최초의 서양식 병원과 유아원을 설립하여 사회복지사업을 시행했던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는 우치보리 세 부자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져 있다. 좌측 마당에는 복자 나카우라 줄리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덴쇼소년파견단의 일원이었던 줄리안은 시마바라에서 최후의 목자로 잠복 활동하다 나가사키의 니시자키에서 순교하였다.
시마바라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시마바라 반도에서 일어난 기리시탄 탄압에 대한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1613년 아리마 가와의 모래톱 위에서 8명의 신자가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으로 순교하는 모습을 그렸다. 막달레나 하야시와 그녀의 가족들이다.
두 번째 그림은 우치보리 가족에 관한 것이다.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최연소 순교자인 이그나치오 우치보리가 있다. 아버지인 베드로 우치보리가 갖은 협박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자 관리들이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았다. 베드로 우치보리가 보는 앞에서 세 아들의 손가락을 차례로 자르면서 배교를 강요했지만 아버지도 아들들도 굴하지 않았다. 이때 막내 우치보리의 나이가 5살이었다. 결국 세 아들은 바다에 수장시켜 죽였고 베드로 우치보리는 운젠의 열탕 속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스테인드 글라스는 운젠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발가벗긴 남녀 위로 뜨거운 열탕을 끼얹는 모습과 절벽에서 지옥 온천 속으로 신자들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왼쪽 창문에는 시마바라의 지도와 덴쇼소년파견단의 네 명의 소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위에서부터 이토 만쇼와 나카우라 줄리안, 하라 마르티노 및 치지와 미구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마바라 성 조금 아래에는 옛 무사들의 집들이 공개되어 있었다. 사무라이 마을 앞을 흐르는 깨끗한 실개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휴식했던 카페도 아름답고 정갈했으며 그 앞으로 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마바라의 어디에서건 맑은 물이 솟아 거리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2023년 시마바라의 수려한 풍경이 1638년의 시마바라의 난을 망각하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웃한 운젠 지옥 온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