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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17. 2024

피로사회

우리 사회의 삶은 피곤하다

  

우연히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들여다보다가 턱 하고 가슴이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급훈 때문이었다. 내가 왜 가슴이 눌렸는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공감하기를 원하여 각반의 급훈을 아래에 적었다.     

 

3학년 1반 오늘 걸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3학년 2반 열린 마음

3학년 3반 간절히 원하라 그리고 노력하라, 그러면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3학년 4반 달나라의 주인이 되자

3학년 5반 따뜻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자

3학년 6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자

3학년 7반 숭어처럼 역동적으로

3학년 8반 돼지처럼 먹고 소처럼 일하고 학처럼 살자

3학년 9반 We can do it

3학년 10반 최선을 다하자

3학년 11반 자신감을 갖자

3학년 12반 신화창조의 주인공이 되자

3학년 13반 愚公移山

3학년 14반 생각은 깊게 행동은 진실하게     


우선 서울의 어떤 고등학교의 3학년에 14개의 반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2천 년도 초였다. 인구절벽이라고 비명을 지르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불과 20년 전에 학생으로 넘치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이 든다.

전쟁이 막 끝난 시대에 태어난 우리 또래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이 콩나물시루 같았던 교실 풍경이다. 한 반에 80명은 족히 되었고 그것도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해야 했던 그 시절. 오늘날의 교실과 비교해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구절벽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급훈을 보고 놀랐다고 했으니 급훈으로 돌아가 보자.

학교에는 교훈이 있고 학급에는 급훈이 있다. 교훈이라든가 급훈이 있는 것은 학교의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고 학생들에게 살아가는 지침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때려치우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급훈은 우리 어릴 적에도 있었다. 그때는 주로 도덕적 덕목을 표방하는 ‘근면’, ‘성실’, ‘정직’ 같은 간결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교훈이나 급훈을 만들어 교실 중앙에 매달아 두는 관습에는 어쩐지 일제의 냄새가 난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국가가 제시하는 공동의 목표에 대해 두 말 않고 따른다. 최근 일본 항공 화재 사건이나 노토반도에서 일어난 강진 사태를 보아도 일본인들은 침착하게 매뉴얼을 따른다. 국가가 어떤 방향을 제시하든 옆도 안 보고 일렬종대로 따라나서는 일본인들이 그래서 무섭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 혐한론자들은 그들이 우리나라에 식민지를 개척할 때 학교를 몇 개를 세웠고 근대 교육을 실시하여 무지한 이 나라를 얼마나 계몽했는지를 열심히 나열한다. 우리의 급훈에는 일본인들이 그토록 내세우는 수만 개의 교실에 급훈을 달고 의식을 조종하려고 했던 의도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게 아닌가 하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2천 년대 초,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3학년에 걸린 각 반의 급훈을 보면서 목표가 없는 것 보다야 낫겠지만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여 학생들에게 무언가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출근할 때였다. KTX 옆자리에 선하게 생긴 어떤 외국인 남자가 앉았다.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 나는 그 미국인이 부산의 한 외국인학교의 교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교사는 자신의 미래 희망을 나에게 고백(?)하였는데 그 남자의 진심 어린 희망이자 꿈이 실소를 자아낼 만한 것이었지만 웬일인지 지금도 잊히지 않고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는 방콕의 외국인학교인 ISB의 교사가 되어 태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ISB에 교사로 가기가 엄청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버드를 나온 고학력자들이 줄줄이 그 학교 교사를 희망하여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놀란 첫째 이유는 남편이 방콕법인에 근무할 때 우리 집 아이들이 그 ISB를 다녔기 때문이었다. 태국 국제학교 교사 자리가 미국인들에게 그렇게 인기 높은 직업순위인지는 그때 알았다. ISB의 시설이나 풍토를 이해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 교사의 희망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결혼하고 싶은 대상으로서 한국 여성보다 태국 여성을 손꼽는 데 두 번째로 놀랐다.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인종적인 편견을 담아 “태국 여성 보다 한국 여성이 더 매력적이지 않아요?”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 왈 “한국여성들은 예쁘고 총명하나 너무나 스트레스풀하게 보여 접근이 어렵다”라고 하였다. 반면 태국여성들은 잘 웃고 평화로운 품성을 지녀 아내로서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나는 ‘스트레스풀(stressful)’하다는 그의 말을 ‘히스테릭(histerical)하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아무튼 ISB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아들이 고3 때 한국으로 돌아와 그것도 경쟁이 치열하던 강남 8 학군에 편입되면서 무척 힘들어하였다.      


나는 아들 졸업앨범의 급훈을 보면서 ‘피로사회’인 한국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사회의 병인을 정확히 간파해 내었다. 그는 21세기의 현대인들은 더 이상 감염증이 원인이 된 면역학적 질병 때문이 아니라 신경증적 질환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꼽는 대표적인 신경증적 질환에는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있다.

한병철은 독일에서 현대사회의 병리 현상을 날카롭게 진단해 내었지만, 그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사실상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상태에 놓여있음에 틀림없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OECD에서 가장 낮고, 청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며 이 사회에서 청년들은 관계를 원치 않고 혼자 지내기를 선호하며(엊그제 발표된 이케아 통계), 데이트도 마다하고 결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여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갱신 중이다. 한국은 자타 공히 세계 최고의 ‘피로사회’이다.     


한병철 교수의 진단에 의하면 ‘피로사회’를 만드는 원인은 오늘날의 세계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급격히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규율사회에서는 ‘~해서는 안된다’라는 부정성이 주제어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가 주제어로 대체되었다. 성과사회에는 ‘프로젝트’, ‘이니시아티브’, ‘모티베이션’ 등 개인의 자발적 노력을 전제한 낱말이 횡행한다.

이렇게 사회가 변모하는 이유를 한교수는 생산성의 제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경영자들은 규제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스스로 촉발시키는 것이 가장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 노력을 요구하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스스로 자신을 독려하며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징표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새마을 운동’이 그러했고 ‘You can do it’이라는 구호의 난무가 그러하다. 사회가 개인을 착취하는 방법이 바뀌었는데도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인간은 성과사회의 캐치프레이즈에 휘둘리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이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고 업무부담의 증가는 멀티 태스킹을 요구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르게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오늘의 인간은 산만한 주의력을 특징으로 드러낸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바로 그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다. 이제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느낄 때 파괴적 자책과 함께 자학을 유발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을 착취할 수 없을 때 소진증후군이 나타나면서 인간은 무력해지고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이다. 이 자아는 사색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므로 방향성을 잃고 안절부절못하여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의미 없는 대량의 인간관계(SNS를 통한 인간관계)를 쫒으며 의식의 파편화를 겪게 된다고 한다. 인간을 이렇게 내모는 구호가 도처에 널려있다.      


서울 어느 학교의 3학년 급훈들은 우리 사회가 ‘피로사회’로 몰려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 걸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자.

We can do it.

최선을 다하자.

신화창조의 주인공이 되자.    

  

요즈음은 더 발랄한 급훈들이 채용되는 모양이다.    

  

스스로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프라이

지금 성적 미래의 월급

너의 대학 나의 결혼

엄마가 보고 있다.

쟤 깨워라

우리 엄마도 계모임에서 말 좀 해보자.

재수 없음     


재미있는 듯하면서 여전히 내용은 무섭다.      

초저출산율을 깨기 위해서라도 급훈을 바꿔보자. 아니다. 급훈이 무슨 문제인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극심한 경쟁을 유발하고 경쟁에 살아남는 자만이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고 독려하는 이 미친 ‘피로사회’의 사슬을 풀기 전에는 우리 사회는 이 속에서 소멸되고 마는 초유의 사례가 되고 말 것이다.  

무서운 전망에 스스로 으스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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