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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y 18. 2024

23. 마지막으로: 요세미티

뱃줄 달고 미국 여행


이제 요세미티 여행을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한 달을 예정한 여행이었는데, 처음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더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한 달이 금방 지나갔다. 건강이 염려되던 남편은 다행스럽게 잘 버텨주었다.

이제 아들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마지막 여행지인 요세미티국립공원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며느리는 함께 가지 않고 아들만 우리를 대동하였다. 그리하여 아들과 우리 부부의 세 사람이 요세미티로 2박 3일의 여행을 떠났다.


아들이 새로 산 제 차를 몹시 애착하는 듯하여 아들 차를 타고 요세미티까지 가기로 하였다. 문제는 뒷좌석에 문이 없어 앞문을 통해 뒷자리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뒷좌석에 들고 날 때 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차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아들의 작은 차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사흘을 지내면 옛날로 돌아간듯한 느낌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옛날 품 안의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은 계속 혼자 남겨진 제 처를 걱정하였고 몸은 우리와 함께 있어도 마음은 제 처 곁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들과 떨어져 사는 동안 아들은 아들대로의 성장을 계속해나갔는데 노인이 된 나는 옛날의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요세미티로 가는 길은 이제 어린 시절의 아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시간임을 일깨워주었다.


집에서 밀피타스를 통과한 후 북쪽으로 리버모아까지 올라간 후 120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계속 가면 요세미티에 도착하게 된다. 120번 도로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인지라 산길이 상당히 험하다고 하여 돌아올 땐 마리포사를 거쳐오는 140번 도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아들의 애마는 붕붕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출발했지만 도중에 포장상태가 엄청 나쁜 길을 만나 차도 사람도 고생하였다.


 

요세미티국립공원은 워낙 유명한 곳이라 굳이 내가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단 한 줄로 이곳을 설명하자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에라 네바다 산맥 서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국립공원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얼마나 이곳을 사랑하는지 선호도 조사에서도, 방문자 수에 있어서도 언제나 5위 안에 드는 국립공원이다. 현재 매년 약 4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하다고 한다.


120번 도로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인데, 특히 모카신에서 빅 오크 플렛(Big Oak Flat)까지 가는 구간은 꼬불꼬불한 데다가 안전 펜스도 없는 절벽길을 달리도록 되어있었다. 아들이 피곤하면 교대운전해 줄 의향이 있었지만 도로가 35년 무사고 운전자인 나의 오금을 졸게 하여 그냥 포기했다. 미국은 과연 큰 나라라는 느낌이 다시 들었다. 정부에서 세세히 신경 써 줄 수 없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어디에서든 느껴졌다.   


도중에 점심 먹을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거의 빅 오크 플렛에 다가가서야 산 정상에 숨어있는 카페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남편은 차 안에서 뱃줄식사를 하고 아들과 나는 Priest Station Cafe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산중에 있는 식당치고 음식맛이 꽤 괜찮았다.



식당 앞의 작은 캐빈의 벽화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눈 덮인 요세미티의 하프 돔 아래로 노새에 짐을 실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무언가 역사가 있는 집인듯하여 주인장에게 물어보았더니 나름 이곳에서 유명한 곳이라고 하였다. 이 집이 역사는 18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처음 Margaret와 Alexander Kirkwood 부부가 금을 찾아 나선 광부들을 위한 식당을 연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몇 년 후 Alexander Kirkwood가 사망하고 난 뒤 Margaret은 Wm. Priest와 재혼하였는데, 이 사람은 요세미티 최초의 공원 위원이자 Big Oak Flat Road(현재 Hwy 120)와 Tioga Pass를 담당했던 엔지니어였다. 이들 부부는 이곳에 큰 호텔을 짓고 한때 번성하였으나 화재로 전소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Priest가의 후손들이 다시 사들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카페는 2009년 가을에 리노베이션 하여 재개장하였다고 하는데 본관의 벽은 1800년대의 것 그대로라고 하였다. 사연을 알고 보니 뭔가 옛이야기들이 집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듯하여 조촐한 이 식당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 주변의 도로에 Priest라는 이름이 붙은 도로명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요세미티 밸리 비스타 포인트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차를 대고 있기에 우리도 차를 세웠다. 눈앞에 거대한 요세미티의 위용이 펼쳐져있었다. 요세미티는 시에라 네바다의 화강암반을 빙하가 깎아 만든 독특한 지형이라고 하였다. 과연 화강암의 거대한 덩어리가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요세미티 전경


미국 서부여행은 모두 붉은 사암지대의 숨 막힐듯한 아름다움을 둘러보는 여행이었는데 반해, 요세미티는 흰 화강암 덩어리로 형성돼 있어 또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사암지대의 기이함이 물과 바람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요세미티의 상징적인 지형물인 하프돔(Half Dome)과 엘 카피탄(El Capitan), 브라이달 베일 폭포(Bridalveil Fall), 밸리 등은 빙하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자연의 힘은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미국은 큰 나라라는 소감도 덧붙인다.


터널을 지나 밸리로 내려가자 흰 화강암 덩어리들이 모습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 브라이달 베일폭포 (bridal veil fall)였다. 신부의 면사포 같은 폭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 같았다.

가을에 방문한 관계로 폭포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지며 신부의 면사포같이 흩어지는 물줄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폭포보다는 폭포아래에 펼쳐진 초원이 더 멋졌다. 앞으로 요세미티의 가장 큰 매력으로 만날 메도(Meadows)의 시작이었다. 메도는 스페인어로 초원지대를 뜻한다.



브라이달 베일 폭포와 그 아래의 메도


폭포 아래에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깨끗하고 투명하여 정신이 다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곳에서 요세미티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요세미티 요세미티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다리 위에 사람들이 서서 강물을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가 모습은 완전히 고적한 분위기를 풍겼다. 강가에 보이는 미루나무의 잎이 사시나무 떨듯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고요하고 깨끗한 강가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강가에 엄청난 크기의 자이언트 쉐콰이어 나무들이 있었다. 자이언트 세쿼이아들은 이름 그대로 굵은 나무 덩치를 쿡쿡 땅에 박아놓은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남편과 부둥켜안아보았는데 두 사람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굵기였다.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다는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를 껴안아보았다!


브라이달 베일 폭포 아래의 강가, 거대한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가 있었다.


강가에서 넋을 빼다 저녁 무렵이 되어 예약한 아와니(Ahwhnee)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 이름이 대단히 어려웠는데, 아와니는 본래 이곳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요세미티(Yosemite)라는 이름도 아와니족의 언어로  '큰 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큰 입'이 요세미티의 U자형 지형 자체를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요세미티를 상징하는 하프 돔(half dome)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쩠거나 요세미티 밸리 내의 유일한 4성급 호텔인 아와니는 1927년에 건축되었는데, 본래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인 아와니족으로부터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내부 장식까지 독특한 모양새를 보여주는데 모두 아와니족의 전통을 채용한 것으로 보였다.


아와니 호텔의 전경


아와니 호텔은 바로 앞에 요세미티의 상징인 하프돔이 자리하고 있고 Glacier Point가 이웃하고 있으며 이 호텔 뒤편에 요세미티 폭포가 있는 절묘한 곳에 지어진 호텔이다. 실내 장식뿐만 아니라 호텔 리셥센 룸도 인디언의 문양을 살린 독특한 데코레이션이 눈에 띄었다.

마침 석양에 하프 돔의 흰 화강암이 붉게 물들어  황금색으로 빛났다. 절묘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곳은 호텔비가 비쌀 뿐만 아니라 예약자체가 어려운 것 같았는데 아들이 부모를 모시기 위해 엄청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 고마워!


호텔 내부와 리셥센의 독특한 장식


좌: 하프 돔이 호텔 바로 앞에 있다.   우: 석양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하프돔


호텔 바에서 저녁을 먹고 어둠에 싸인 호텔 앞 벤치에 앉았다. 날씨는 쌀쌀하였으나 의자 앞의 화로에서 불이 피어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아들이 식사를 하면서 마신 포도주 탓인지 불그레해진 얼굴을 나의 어깨에 기대었다. 뭉클한 감정이 솟구쳤다. 우리는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회포를 풀었다.


아와니 호텔의 화로 앞에서


우리가 아와니호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 아와니족은 이 아름다운 곳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백인들에 의해 대학살을 당하고 쫓겨난 인디언족이다. 이곳으로 백인들이 들이닥친 것도 역시 골드러시 때문이었다. 골드러시 이전에 이곳의 원주민 인구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는데, 1848년부터 시작된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California Gold Rush) 때 9만 명 이상의 유럽계 미국인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원 주민들과의 사이에 벌어지던 소소한 싸움은 대대적인 토벌전쟁으로 진행되게 되었다(마리포사 전쟁). 미정부와 캘리포니아 주에서 보낸 대대적인 토벌대는 원주민들을 대거 학살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보호구역으로 이주시켰다. 골드러시가 벌어진 10년 후에는 아와니족이 약 5만 명 정도만 남았다고 하니 참 슬픈 이야기이다.


마리포사 전쟁으로 요세미티의 신비한 모습이 알려지자 이곳으로 관광객이 쇄도하였는데, 존 뮤어(John Muir) 등이 자연보호 운동을 강력히 펼쳐 1890년 이곳이 국립공원으로 설정될 수 있었다. 존 뮤어는 샌프란시스코의 뮤어우즈국립기념물의 탄생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서 그곳에도 그의 이름을 남겼다.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그 이름으로 호텔을 지어 원주민 인디언을 기념하는듯한 형세를 하는 것이 오늘날 미국 백인들이다. 그곳의 옛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약간의 양심이 남아 사죄의 마음을 담아 그들을 기억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은 요세미티 폭포를 보러 갔다. 거리가 멀지 않아 걸어가도 될 거리였지만 공원 안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다길래 셔틀버스를 이용하였다. 폭포로 가는 길에 눈에 띄는 것은 엄청나게 키가 큰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가 이렇게 쭉쭉 뻗었나 싶게 요세미티의 소나무들은 늘씬하게 위로 곧게 뻗었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사탕소나무, 폰데로사소나무 그리고 전나무 들이라고 한다. 참고로 요세미티 공원 안에는 참나무들도 많아 아름다운 노란 단풍 숲을 주도하고 있었다.


자이언트 세쿼이아와 소나무 슾

 

요세미티 폭포는 미국에서 가장 높이가 높다는 3단의 폭포로 유명하다. 역시 유량이 많지 않아 놀라운 정경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이 폭포는 눈이 녹는 4~5월경이 폭포 구경이 압권이라고 한다.


요세미티 폭포: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는 커플이 있어 이채로웠다.

 

폭포구경을 하고 나서자 폭포보다 더 멋진 넓은 메도가 펼쳐졌다. 아침의 메도에는 몇 명의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일뿐 한적하였다. 저 멀리에는 흰 화강암의 하프 돔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요세미티의 또 다른 명물인 엘 카피탄(El Capitan)으로 갔다. 가는 도중 숲에 임의로 화재를 일으키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워낙 화재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바닥에 쌓여있는 낙엽 등을 미리 태워 대형산불을 예방하는 조치라고 하였다.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인간의 지혜로 보여 흥미로웠다.

요세미티로 들어오는 Big Oak Flat Gate 근처에서 엄청난 면적의 산야가 불탄 곳을 본 바 있었다. 요세미티 밸리 안은 U자형 계곡이기 때문에 대형산불이 나면 대피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매퀘한 연기가 공기 중을 메웠으나 진귀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일부러 산불을 일으켜 퇴적물을 태우고 있다.


연기너머로 엘 카피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 가려진 엘 카피탄


엘 카피탄은 높이만도 9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강암덩어리이다.

엘(El)은 규모가 엄청나거나 신성한 것에 붙이는 접두어이다. 그러므로 이 돌덩어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메도에 앉아 흰 바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자세히 보니 바위에 매달려있는 록크라이머들이 보였다. 하나 둘 헤아려보니 다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메도의 나무등걸에 앉아 한참을 그들을 쳐다보았다.

저곳에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죽은 록 클라이머들이 5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바위가 너무 높아 하루 만에 등정할 수 없어 적어도 하루 이틀은 바위에 매달려 비박을 해야 한다고 한다. 왜 록 클라이머들은 저렇게 위험한 일에 계속 도전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학시절 나도 한때 록 클라이머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때 금정산 부채바위를 오르던 아찔한 순간이 생각났다. 그때 내가 생사를 걸고 오르던 부채바위가 고작 50미터였으니 저 엘 카피탄은 부채바위의 약 20배에 해당하는 높이이다.

이제 나이 든 나는 바위를 오르는 사람들보다는 엘 카피탄 아래에 펼쳐진 황금색 메도에 탄복하며 메도를 걷는다. 나파밸리에서 만났던 까만 새들이 이곳에도 많이 보였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


엘 카피탄, 수직의 암벽에 매달려있는 클라이머의 모습이 보인다.



오후에는 해피 아이랜즈로 산책을 나갔다.

해피 아이랜즈라는 이름에 매료되어서 나선 산책길이었지만 숲 속 계곡으로 올라가며 맑은 계곡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는 했으나 이름처럼 해피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요한 숲과 계곡이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것이 행복인지는 모르겠다.


해피 아이랜즈의 계곡길


그 길을 따라 하프 돔이 있는 근처까지 걸었다. 곰이 출몰한다길래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길 가로 나 있는 산책길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쯤 걸어가자 눈앞에 하프돔이 가까이 나타났다. 저곳은 노스페이스(North Face)라고도 불린다는 요세미티의 상징적인 곳이다. 빙하가 어떻게 화강암의 단단한 바위를 저렇게 싹둑 자를 수 있었을까 하고 빙하의 위력에 새삼 감탄했다.

엘 카피탄도 그렇지만  하프돔은 깨끗한 순백의 바위이다. 화강암은 우리나라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반인데 우리나라에 저런 위용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쉽게 여겨졌다. 아! 인왕산이 있긴 하구나.


하프돔의 경이에 빠지다.


도중에 캘리포니아 땅다람쥐를 만났다. 오전에 호텔 계단에서도 이 다람쥐를 만났었다. 토끼처럼 통실한 몸매에 흰색 반점의 털이 귀티 나게 보였다. 꼬리는 짧고 무엇보다 눈가에 두른 흰 테가 인상적이었다. 이곳에 참나무들이 많으니 다람쥐들의 먹이는 충분할 터였다. 그러나 국립공원의 땅다람쥐들은 관광객들이 버리고 가는 음식물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호텔 근처를 땅바람쥐가 배회하고 있었던가 싶었다.


땅다람쥐들


요세미티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끈 것은 초지인 메도였다.  

빙하가 지나가면서 만들어진 평지가 초지가 되어 밸리의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흘째 아침에는 하프돔 아래의 메도인 콜더빌까지 산책을 나가 아름다운 하프돔과 메도를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었던 관계로 사람도 거의 없었고 초지 속에 사슴 한 마리만 나왔다 숨었다 할 뿐이었다.

메도가 브라운 색으로 차분히 빛나고 있고 그 메도 바로 위로는 하프 돔의 어마어마한 위용이 보였다. 나무에는 단풍이 들고 벌써 낙엽들이 길에 떨어져 계절의 쓸쓸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프돔과 메도. 이것이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풍경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슴 깊이 이 풍경을 새겨두려고 하였다.

요세미티!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140번 도로를 이용하였다.

광활한 사막을 지나가는데 양쪽에 엄청난 규모의 과수원들이 펼쳐져있었다. 아몬드와 호두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것 같았고 간혹 감나무도 보였다. 저 광활한 땅에다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햇살을 받고 자란 과일들인지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부러워하였다.



도로 곁으로 한없이 이어진 과수원


요세미티 안녕!

나는 앞으로도 요세미티를 그리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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