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꿈꾼 세상

전주에서

by 보현

전주의 천주교 성지를 방문하여 보면 이곳의 주인공이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라는 데에 이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얼마나 큰 인물이었던지 전주와 근처에 있는 거의 모든 성지에 그의 체취가 남아있다 . 전주의 성지순례 길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꿈꾼 세상에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닫고 새삼 놀라웠다.


유항검과 관련이 있는 성지는 다음과 같다.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초남이성지>, 그가 마을 주민들을 가르쳤던 교리당, 그가 잡혀 능지처참 형을 당했던 <전동성당>, 그의 가족들이 고초를 겪거나 순교한 <전주옥순교지>와 <전주숲정이성지>, 그와 그의 가족이 가매장되었던 바우배기, 그와 그의 가족이 합장된 <치명자산성지>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그의 집 가정교사였다가 순교한 한정흠을 기리는 <김제순교성지>와 고창의 최여겸의 <개갑장터순교성지>도 유항검과 관련이 있는 성지이다.

유항검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기 위해 잠시 그의 이력을 돌아보고자 한다.

유항검(1756-1801)은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열 곳이 넘는 동네를 못 지나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부호였다고 한다. 열 곳이 넘는 동네를 요즘 식으로 계산해 보면 450만 평 정도의 규모라고 하니 유항검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부자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유항검이 전라도 지역 최초의 가톨릭 신자가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유항검의 어머니는 윤지충의 어머니와 자매간인 권 씨 부인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유항검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친척인 권철신(유명한 남인 학자였다)의 집에 머무르며 신학문을 배웠다. 권철신의 동생이 권일신이었는데, 일신은 그리스도교 교리 전파에 열심이었다. 유항검이 일신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되자 그는 이 교리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 후 고향에 내려가 교리당을 짓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문헌에 남아있는 유 아우구스티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고향을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신자 공동체처럼 만든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신분의 벽을 허물고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수십 명의 종들과 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몸소 교리를 가르쳤고 그들을 평등하게 존중하였다. 그리고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는데 유항검의 부인을 필두로 여인들은 큰 가마솥에 쌀밥을 가득 지어 교리당에 천주학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유항검이 지상에서 그리스도교의 이상향을 이룩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대목이다.


1786년 봄, 조선에 가성직제가 도입되었을 때 유항검은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천주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중 가성직제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문제를 이승훈 등 교회의 지도층에 알려 가성직제에 의한 성무 활동을 중단하도록 한 사람도 유항검이었다.

그 후 조선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부를 모셔 오는 일에 적극 나서게 되는데, 북경으로 윤유일 밀사를 파견하고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를 모셔오는 데 필요한 비용을 유항검이 헌납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항검은 아우 유관검을 보내 주 신부의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유항검의 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이곳에 일주일을 머무르며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타개하고자 애쓰던 주문모 신부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대박청래大舶請來’ 계획을 구상하였다. 당시 서양인을 태운 큰 배는 곧 그리스도교의 세력을 의미했다. 역시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부당하게 여기고 있던 유항검이 앞장서서 이 계획을 지지하였다. 이 계획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이 일로 인해 유항검 일가는 후일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동정을 원하는 유항검의 장남 중철 요한의 뜻을 알고 역시 같은 소망을 가진 한양의 이윤하의 딸인 이순이 루갈다가 혼인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 아버지 유항검의 지지가 있었기에 동정부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셈이었다.

1801년 , 초기 신도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히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대박청래 계획의 주동자로 지목되면서 대역부도 죄인으로 능지처참형의 형벌을 받았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된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유항검의 일대기를 간단히 언급한다는 것이 꽤 길어졌다.


아침의 차 키 찾기 소동을 치르고 산청을 출발한 우리는 익산장수고속도로를 타고 마이산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을 한 후 전주에 도착하였다. 산청에서 전주까지는 길이 좋아 한시간 30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처음 우리가 방문한 곳은 <숲정이성지>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유항검의 가족으로서 아내 신희와 제수인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와 조카 유중성이 순교하였고 유항검 집안의 노복이었던 김천애 등도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김천애 안드레아의 순교를 통해 노복을 대했던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천애뿐만 아니라 집안의 어떤 노복도 주인을 고발하지 않았다.


이곳 순교비 앞에서 잠시 기도한 후 <초록바위 순교터>와 <서천교순교터>를 지나 <전동성당>에 도착하였다. <전동성당>은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피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천주교의 교리를 따르려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버린 죄로 1791년 전주 남문 밖 시장 앞에서 참수되었다.

신유박해 때는 이곳에서 유항검과 그의 동생인 유관검 및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이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다.


<전동성당>은 이곳 전주교구에 부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보두네 신부가 1908년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전주의 자랑거리인 이 아름다운 건물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에 의해 설계되었고 건축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의 혼합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보두네 신부는 이곳이 순교 터인 줄도 모르고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성당의 주춧돌을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는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세웠다고 하니 하느님의 섭리가 이곳에서 실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전동성당>의 아름다운 모습


<전동성당> 근처에 <전주옥순교지>가 있다.

이곳에서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과 차남 유문석이 교살로 순교하였다(1801년 10월 9일). 유중철의 동정 아내인 이순이 루갈다는 남편보다 늦은 1802년 1월 31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는데, 옥중에 있으면서 동정 남편인 유중철이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 소식을 듣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주옥에서 신자들은서로를 위로하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주 순교지 순례에서 가장 난제는 <치명자산성지>이다. 그것은 해발 300미터의 가파른 치명자산 정상에 성지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옥마을 초입에서 전주비빔밥으로 속을 든든히 채운 후 치명자산 아래의 <평화의 전당>에 차를 세웠다. 전에 왔을 때는 공사 중이더니 그 사이에 <평화의 전당>이 멋지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남편과 큰 언니를 남겨두고 생생한 나와 둘째 언니만 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생생하다고 표현하였지만 6월의 한더위 속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는 힘들었다. 우리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천천히 한 발씩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치명자산성지>는 전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승암산 정상에 세워져 있다. 성전 위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면 그곳에 유항검 일가를 모셔둔 합동 무덤이 나타난다.

이곳에 묻힌 순교자는 유항검과 그의 처 신희, 동정 부부로 순교한 큰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등 일곱 위이다.

<치명자산성지>의 유항검 일가의 합동묘


유항검 일가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거의 모두가 순교하였고 어린 자녀들은 노비가 되어 유배 길을 떠났다. 당시 9세였던 장녀 유섬이는 거제도로, 6세이던 아들 유일석은 흑산도로, 3세이던 아들 유일문은 신지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그 후 유섬이의 묘는 발견되었지만 그 아래 동생들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없다.

유항검 가족의 유해는 노복들과 신자들에 의해 처음에 초남이 근처의 바우배기에 매장되었다가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유해를 이곳으로 모셨다(1914년). 이후 이 산의 명칭은 치명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치명자(致命者)는 하늘의 명을 받든 사람, 즉 순교자를 뜻한다.


언니와 내가 땀을 닦으며 무덤 앞에 도착하였을 때 묘지 옆에 작은 돌이 하나 있고 거기에 거제도 유섬이 묘에서 가져온 돌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모 단체에서 거제도 유섬이 묘를 방문하였다가 유섬이가 홀로 야산 중에 버려져 있는 것이 안타까워, 흙의 일부를 가져다가 가족 합동 묘지에 뿌리고 거제도에서 가져온 작은 돌을 묘지 옆에 놓았는가 보았다. 거제도 유섬이 묘를 이미 다녀온 우리로서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고 고맙게도 느껴졌다. 유섬이 묘를 이장해 가족과 함께 있도록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치명자산성지>에서 내려와 다시 재회한 우리는 <평화의 전당>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를 한잔씩 마시고 이번에는 유항검의 생가가 있는 <초남이성지>로 향했다.

<초남이 성지>는 전주 시내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져 있는 전북 완주군에 위치하고 있다.

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후 그 많던 재산은 깡그리 호조에 몰수되었으며, 그가 살던 집은 헐린 뒤 흔적조차 찾지 못하도록 연못으로 만들어지는 파가저택 형벌을 받게 되었다. 훗날 그 연못의 흔적 위에 새로이 성지를 조성한 곳이 바로 <초남이성지>이다.

따라서 <초남이성지>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한가운데에 예수 고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 양쪽에 마리아와 요셉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운 곳이다.


유항검 일가의 생거지에 세워진 <초남이성지>


과거 이곳에 있었을 높은 솟을문과 대저택은 간 곳이 없고 그대신 유항검과 동정부부상이 뜰에 세워져 있었다. 한동안 신앙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이 가족을 생각하며 동정부부상 앞을 한동안 서성거렸다.

<초남이성지>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유명한 바우배기가 있다. 우리가 전주로 성지순례를 떠날 때 사실 바우배기에 가보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바우배기는 유항검 일가의 땅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처음 유항검 일가가 순교를 당하자 집안의 노복들이 그들을 묻은 곳이 바우배기였다. 그러다 보두네 신부에 의해 유항검 일가의 시신이 치명자산으로 옮겨지고 난 뒤 이곳은 사실상 방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2021년 3월 11일, 이곳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져 한국 가톨릭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230여 년 전 사라졌던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현의 묘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 무덤들은 평토장을 하였고 아무런 표식도 없었으므로 아무도 이곳에 무덤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전주교구에서 바우배기의 성역화를 하는 과정에서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던 도중 백자사발지석과 유골이 발견된 것이었다.

도자기에는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고 더구나 사발의 위에는 ‘이 옆에는 누구 있다’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어 한 사람의 묘가 발견되면 다른 사람의 묘도 발견될 수 있도록 표시가 되어 있었다. 묘지의 발견을 간절히 바랐던 증거로 볼 수 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초남이 성지 바우배기의 순교자 유해 발굴 모습 (사진 출처 전북도민일보)


윤지충의 백자사발지석 (사진 출처 전북도민일보)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후, 친척들과 친구들이 왕에게서 그들의 장사 허락을 받은 것이 9일 후 였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무덤은 우리나라 신도들 중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라고 언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항검 가족은 그들의 무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무덤을 숨겨두면서 언젠가 이들의 무덤이 발견되기를 고대한 사람이 바로 유항검이라는 사실이 설득력있게 주장되고 있다.


유항검의 어머니는 윤지충의 어머니와 자매간인 권 씨 부인이라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따라서 유항검과 윤지충은 이종사촌 간이었고 권상연과는 외종사촌 간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였을 때 그들의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유항검 외의 인물을 생각할 수 없다. 유항검이 전주지방에서 받은 존경과 명성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항검은 당당하게 이들의 시신을 요구하여 이들의 유해를 자신의 땅인 바우배기에 묻었다. 마치 아리마대아의 요셉이 예수님의 주검을 요청하여 돌무덤 묘지에 묻은 것처럼 말이다.


유항검은 평장으로 두 순교자를 묻으면서 언젠가 탄압의 시대가 지나가고 평화의 시대가 왔을 때 그들이 온전히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았다.

유항검이 바랐던 그때가 2021년 3월 11일에 이루어졌다. 마치 일본에서 230여년 만에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신자)들이 오우라 천주당에 나타난 때처럼.


우리는 바우배기 대신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교리당의 <순교자 묘소>로 갔다. 이곳에 권상연 야고보와 윤지충 바오로와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230여년 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복자들의 유해 앞에 경배하였다.

유항검이 살아생전 바오배기의 이들 무덤 앞에서 그들이 언젠가 세상에 발견되어 공경받을 그날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 하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230여 년의 시간이 주님에게는 하루같이 여겨졌는지는 몰라도 나는 230년의 세월을 견디고 아직도 생생한 모습으로 드러난 그들의 유골이 너무나 기적 같기만 했다.

교리당의 순교자 묘소


교리당의 순교자 묘소 내에 모셔져 있는 세 복자의 유해


<김제순교성지>까지 둘러보고 전주한옥마을의 숙소로 돌아오자 늦은 시간이 되었다. 식당이 다 문을 닫았으므로 우리는 한옥마을 상가에서 사 온 맥주와 치킨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유항검이 꿈꾼 사회를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바로 지금이 그가 꿈꾸던 자유로운 신앙의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초기 신자들의 간절함을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보두네 신부는 치명자산의 꼭대기에 유항검 일가의 무덤을 마련하며 그들이 전주를 지켜주기를 바랐다고 하였다.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의 바람처럼 유항검 일가가 전주를 지켜주기를, 오늘의 우리도 지켜주기를 바라보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안토니오 성인을 외쳐 부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