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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02. 2024

39. 양재천의 배롱나무

<양재천 산책>

    

배롱나무가 한창 꽃을 피웠다.

배롱나무는 뜨거운 여름철에 붉은 꽃을 피운다. 여름의 더위에 지쳤을 때 붉은 꽃잎이 이글이글하게 피는 배롱나무를 보면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이상한 일이다. 마치 뜨거운 온천물에 앉아 시원하다고 하는 느낌과 같다고 할까. 정열적인 그 자태가 오히려 여름의 맹서를 잊게 해 주니 이상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배롱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무궁화, 자귀나무와 함께 여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이다. 이 배롱나무를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일 동안 붉은 꽃이 계속해서 피기 때문이다. 배롱나무 이름의 유래도 백일 동안 붉은 꽃이 피는 백일홍 나무에서 왔다고 한다.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기롱나무’로 변했다가 지금의 배롱나무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궁화꽃에서 언급했듯이 여름꽃들은 크고 강렬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핀다. 식물계의 왕이 여름에 피는 꽃들이다.


양재천에도 밀미리 다리 근처에 배롱나무가 진즉에 꽃을 피웠다. 밀미리 다리 옆으로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뒤에 배롱나무가 활짝 꽃을 피웠으므로 데크에 서면 배롱나무의 화려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배롱나무는 작은 꽃들이 모여서 큰 꽃 무더기를 만들고 있다. 하나의 꽃이 피고 나면 다음에 필 꽃 봉오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들의 릴레이로 백일홍을 이루는 가보다. 백 일간 계속 꽃을 피우는 무궁화처럼 배롱나무도 작은 꽃봉오리들의 협력으로 백일동안 붉은 꽃을 피우니 협력이 만들어내는 끈질김이 바로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다.


배롱나무를 자세히 보면 6~7장으로 이루어진 꽃잎에 모두 오글쪼글 주름이 잡혀 있다. 중앙에 노란 수술이 여러 개 모여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6개의 수술이 유달리 길게 튀어나와 있다. 물론 암술도 있다. 이 꽃에는 볼 때마다 벌과 파리와 온갖 벌레들이 몰려와 있으니 화려한 자태에 덧붙여 꿀까지 풍족히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양재천의 배롱나무


작은 꽃들이 모여 큰 꽃송이를 만든다.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이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배롱나무는 줄기의 표면이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반질반질한 표피가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인들은 이 나무줄기가 미끄러워 나무 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진다고 하여 배롱나무에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는 재미난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릴 때 배롱나무의 줄기를 만지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서 잎이 흔들린다고 들었다. 그래서 배롱나무만 보면 줄기를 살살 간질였던 기억이 난다. 실제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잎이 흔들리는 것도 같았는데 식물학자들은 나무에는 신경세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하니 참 이상한 일이다. 양재천의 배롱나무 아래에서도 나는 배롱나무의 줄기를 살살 간질여 본다. 나무는 여전히 간지럼을 타는 듯 잎이 살살 흔들리는 것만 같다.


배롱나무는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나무이다. 선비들은 배롱나무를 사랑하여 그들이 놀던 정자나 서원뿐만 아니라 양반가의 무덤가에도 이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들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에서 일편단심의 지조를 보았고, 특히 배롱나무의 매끈한 줄기에서 변치 않는 지조의 이미지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소쇄원, 석영정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밀집해 있는 곳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많이 남아있다.      

담양 후산리의 명옥헌에는 배롱나무 고목 100여 그루가 모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롱나무 숲을 만들고 있다. 몇 해 전 이곳을 방문하여 오래된 정자에 앉아 붉게 만개한 배롱나무 숲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 한적하면서도 가슴 뛰게 하던 아름다움이 내내 가슴에 남았다.

이듬해 봄철, 소쇄원을 방문한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가 그 쇠락한 풍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생각이 난다. 왜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배롱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워야만 명옥헌은 비로소 명옥헌으로서의 기품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배롱나무는 고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다. 고가의 기와와 고색창연한 나무집에 배롱나무가 없다면 쓸쓸할뻔한 풍경을 배롱나무는 화사하게 받쳐주고 생기를 북돋워준다.      


사찰에서도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는 스님들이 배롱나무의 껍질이 계속 벗겨지는 것처럼 수행정진을 통해 속세의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절집 앞에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면 역시 고가의 분위기가 확 살아난다. 절집에서도 속인인 나는 수행정진의 이유야 모르겠고 그저 배롱나무의 농염한 아름다움에 혹할 뿐이다.


서원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는 배롱나무의 꽃말이 ‘청렴’이기 때문에 장차 관직에 나가게 되면 청렴한 관리가 되라는 뜻이 숨어있다고 한다. 산청에는 덕산서원의 배롱나무가 유명하다. 역시 단아한 기와지붕과 나무집과 돌담에 배롱나무가 있어 이곳의 기품이 한층 살아난다.

    

산청 덕산서원의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해 남부지방에 주로 많이 심었다. 그런데 온난화의 영향으로 이 배롱나무가 북진한 듯하다. 양재천에도 새로이 조성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옆 공원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고 있다. 미래의 어느 여름날, 양재천에서도 배롱나무 꽃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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