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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01. 2024

38. 폭우가 지나간 풍경

<양재천 산책>


강남에 물폭탄이 떨어졌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가 세찬 빗소리와 함께 아파트 홈통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쾅쾅 들려 잠이 깨었다. 관리사무실에서 보내는 다급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입주민들은 빨리 주차된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관리사무실도 물에 잠겨 이게 마지막 방송입니다”라는 긴급한 내용이었다.

   

대치동은 본래 저지대였던 곳이라 물 폭탄이 떨어지면 물난리를 심하게 겪는다. 주차장은 이미 물바다가 되었고 반쯤 물에 잠긴 차들이 서둘러 대피하느라고 서로 뒤 엉겨 야단이었다. 다행히 차에 시동이 걸렸다. 무조건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양재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미 길 양쪽으로 차들이 빼곡히 주차하고 있어 어디 빌붙을 데가 없었다. 양재천 메타세쿼이아 가로길이 눈앞이었다. 이제 아파트를 벗어나야 하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때 남편이 지형정찰을 하더니 인도 위로 차를 올리자고 하였다.

“인도 위로?”

운전 경력 40여 년 동안 인도 위에  차를 세운 적이 없었던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인도 위로 차를 반듯하게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를 주지 않으려고 창을 열고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겨우 주차를 완료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눈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비에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불길한 썩은 냄새가 나는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신고 있던 샌들이 달아날 것 같아서 신발을 벗어 들고 걸었다. 남편과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로 의지하여 겨우겨우 우리 동 앞까지 왔다. 그때가 밤 10시경이었다.


다음날 인도에 올려둔 차를 가져오기도 할 겸 해서 양재천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곳저곳 팬스가 쳐져 출입을 막아 놓았다. 겨우 제방 제일 높은 방죽에서 내려다보니 누런 흙탕물이 제방 중간길까지 차 올라있었고 성난 물결에 휩쓸려 나무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도 할 수 없었다. 이때만 해도 나의 사랑하는 나무들이 사라져 버렸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다시 양재천으로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홍수가 지나간 양재천은 그야말로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망초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던 물억새 밭은 큰 물이 지나가면서 반쯤 죽은 잡초밭이 되어버렸다. 산책객들을 쉬게 하던 나무 의자는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앉아 있었고, 가을맞이를 위해 무언가 꽃씨를 뿌렸을 하천변은 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양재천의 수해 현장: 강변을 지키던 의자가 떠밀려와 돌아앉아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모감주나무였다. 올여름에도 화려한 노란 꽃을 피워 모감주꽃을 예찬한 지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내 눈을 의심하게 모감주 세 그루가 눈앞에서 싹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모감주나무가 있었던 곳의 흔적은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나무 난간과 잘린 나무 그루터기뿐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양재천변에서 중국굴피나무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강변에 긴 수술을 드리우고 있던 연녹색의 나무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너무 슬펐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중국굴피나무가 있었던 곳에는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만 참혹하게 남아있었다.


잘린 중국굴피나무의 그루터기


얼른 귀룽나무에게로 달려가 보았다. 다행히도 귀룽나무들은 살아있었다. 귀룽나무의 뿌리 부분이 드러나고 뿌리 근처에 있던 새끼나무들이 많이 사라진 듯 보였지만 본체가 살아있다니 너무 다행스러웠다. 물에 잠긴 탓에 줄기에 상처가 생기고 모습도 위축돼 보였지만 살았으니 안심이 되었다. 힘내라! 귀룽나무


귀룽나무


왕버드나무 몇 그루가 베어졌고 왕버드나무 곁의 논에 심어진 벼도 심각한 손상을 입은듯하였다.


수해를 입은 논과  쓰러진 왕버드나무


회색 왜가리가 망연자실하여 물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물속에 들어가 먹이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지  입을 벌린 채 뭐라고 말하려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였다.




그 후 중국굴피나무의 베어진 그루터기 곁은 지나다가 죽은 나무에서 새잎이 왕성하게 자라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반갑고 기뻤다. 원래의 나무처럼 큰 나무로 자라기까지에는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죽은 그루터기에서 새 생명이 움트고 있다니 자연이 키워내는 생명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새 잎이 왕성히 돋고 있는 중국굴피나무



모감주나무의 베어진 그루터기도 살펴보았다. 나무 주변으로  새끼 줄기들이 자라고 있었다. 희망이 보였다. 나는 이 어린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 어미가 보여주었던 멋진 모습을 양재천에 드리워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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