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산책>
양재천과 탄천이 만나는 쪽으로 난 양재천 산책길을 걸어가노라면 SETEX 뒤쪽에 감나무들이 여럿 심겨 있다. 이 나무들은 강남구민들의 기증으로 심어진 듯 기증자의 이름표를 달고 나란히 서 있다. 감나무는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부지방에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양재천에 감나무가 있다는 것은 다소 의외로 여겨진다. 감나무 중에서도 단감나무는 추위에 약해 우리나라 김해의 진영지방이 최적지로 여겨졌었는데,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단감나무도 북상하고 있다고는 한다.
이곳의 감나무는 이름표를 보지 않았더라면 감나무인지도 모를 정도로 내가 본 감나무 중 가장 기이한 꼴을 하고 있다. SETEX 뒤쪽의 그늘에 심어진 데에다 느티나무와 벚나무 등 키 큰 나무 틈새에 끼여 감나무들은 가지를 가련하도록 길게 뻗어 힘겹게 햇빛 경쟁에 나서고 있다. 이 감나무들의 가녀린 줄기를 볼 때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뼈만 앙상히 남은 유대인들 생각이 난다.
남부지방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감나무와 친구같이 지냈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감나무는 흔한 나무였다. 감나무에는 단감나무도 있었고 떫은 감이 열리는 나무도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단감은 정말 귀한 존재였다. 동네아이들이 담감서리를 많이 했다. 그러면 감 주인이 작대기를 들고 쫓아와 아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곤 했다. 그때의 결핍감 때문인지 요즈음도 단감철이 되면 상자째 사 들고 와야 직성이 풀린다. 단감 값이 싸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우리 집에만 감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었다. 요새같이 세계의 온갖 과일들이 슈퍼마켓을 장식하는 즈음에야 감을 최고 과일의 반열에 올리기는 뭐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감은 가난한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과일이었다. 감나무는 해거리를 하기는 했지만, 병충해를 하지 않고 잘 자라는 데다 거름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저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심어두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어 훌륭한 양식이 되어주었다.
나의 고향집에 있던 감나무는 엄마가 시집왔을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오래된 고목임이 틀림없었다. 우리 엄마는 18살에 부산의 귀퉁이에 있는 장전동으로 시집을 왔다. 18살이라면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싶은데 당시 일제가 처녀들을 정신대로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시대였으므로 엄마는 아무 남자에게라도 시집을 가야 할 형편이었다고 했다. 그 아무 남자가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살던 장전동 골짜기 땅은 척박하고 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엄마의 옛날 시집살이 이야기의 시작은 늘 이랬다.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시집이라고 왔더니 돌무더기 사이에서 새카만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기라”. 나는 이 대목에서 늘 웃음이 터지면서 쏟아져 나온 새카만 사람들이 누구일까 상상해보곤 하였다. 할머니와 우리 아버지 형제자매 여섯 명, 거기다 마을 사람들도 새색시를 구경하러 나왔을 테지. 그 새색시는 당장 식구들의 새카만 무명옷을 벗겨 양잿물을 넣고 삶아 냇가로 가져가서 빨랫방망이로 탕탕 때려 하얗게 만든 후 입혔다고 하니 우리 엄마의 기개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엄마는 장전동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우리 육 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나는 자라면서 이 이야기를 하도 자주 들어 어떤 때는 지겹기도 했지만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난 지금은 그때의 이야기가 그립기만 하다.
감나무는 가지가 약해 우리 집안 남자들은 모두 다 감나무에서 떨어져 부상한 경험이 있었다. 감나무에서 추락한 당시에는 온 집안이 근심으로 가득했지만, 감나무귀신은 식구들을 지켜주어 그래도 큰 장애를 남기지 않고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
가을에 감이 익으면 진짜 소중한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다. 감이 주홍색이 되면 부모님은 감을 따서 고모네랑 삼촌 댁에 보냈다. 이즈음 땡감들은 상자에 들어가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였다. 우리 형제들은 날마다 홍시가 되었는지 이불을 벗기고 감을 만져보는 것이 그즈음의 일과가 되었다. 안감이라고 불렀던 이 감은 홍시를 만들면 시원하고 상쾌한 단맛을 내어 우리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나는 나를 만든 세포의 일부분은 이 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감나무와 친구같이 지내서인지 감은 그냥 과일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단어와 함께하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양재천에서 감나무들을 만나니 반갑다가도 그들의 초라한 몰골이 너무 애처로워 기분이 상한다.
왜 이곳에 감나무를 심었을까? 도시인들에게 흰 감꽃의 추억과 주홍색 감이 열리는 낭만을 선사하고자 함인가? 아니면 근처에 고욤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일부러 감나무를 심은 걸까? 나는 그곳에 감나무가 있는 이유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고욤나무도 일부러 심은 것인 듯 감나무 주변에 꽤 여러 그루가 서 있다. 고용나무는 먹을 수 있는 감이 열리는 것은 아니지만 관상용으로는 꽤 괜찮은 편이다. 이 나무는 야생성이 강하여 추위를 잘 견디고 생명력이 일반 감보다 강하다. 시골에서는 단감나무나 일반 감나무의 접목용으로 고욤나무를 키운다. 이곳에서도 어떤 고욤나무는 키가 10미터는 됨직하게 늘씬하게 자라 버즘나무나 벚나무와 경쟁에서 하나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짐작건대 강남구의 공원 담당자는 이곳을 감을 테마로 하는 구역으로 꾸미고 싶었던 모양이다.
양재천의 감나무는 햇볕을 향한 가차 없는 경쟁 속에서 큰 나무 그늘에 가려 일부는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무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감을 매단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감나무는 제 본래의 생명현상을 유지하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감나무의 그 노력이 애처로우면서도 장하게 느껴진다. 나무는 참 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