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 MET에서 만난 메디치가의 청화백자

언제나 설레게 하는 청화백자

by 보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둘러보다가 몇 점의 청화백자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청화백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자기이다. 하얀 바탕에 푸른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새긴 청화백자는 질박하면서도 청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볼 때마다 마음이 혹해진다.


코발트의 푸른 안료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물감으로서 원석인 코발트 광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지역을 서역(西域)이라고 불렀으며 이슬람을 회회(回回)라고 불렀으므로 서역에서 유입된 푸른색 안료를 회회청(回回靑)이라고 일컬었다. 코발트블루는 청결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색으로서 이슬람 모스크의 푸른 타일의 제조 등에 쓰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코발트블루 안료를 이용하여 청화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14세기 초, 원나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흰색 도자 위에 푸른 문양이 그려진 아름다운 그 모습에는 누구라도 넋을 빼앗겼던 모양이었던지 그 후 한국, 일본, 유럽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나갔다.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청화백자가 들어왔을 때 세조도 그 아름다움에 반해 청화백자 제조를 독려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조선은 15세기 초에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회회청 안료의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이 도자기는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개최된 <조선의 백자전>에 전시된 아름다운 도자기들을 보면 왜 조선시대 ‘왕실’에서만 이 도자기를 사용하게 했는지, 왜 조선의 양반들이 이 도자기 한 점을 가지기를 그렇게 소원하였는지, 왜 임진왜란 때 왜(倭)에서 우리나라의 도공들을 싹 쓸어갔는지, 왜 간송은 전재산을 털어 도자기를 샀는지, 왜 이병철과 이건희 부자는 국보급 도자기들을 사 모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조선의 도공이 빚은 백자는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아플 지경이다.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리움 미술관, 2023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된 청화백자 접시들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설명문을 읽어보았더니 이들은 메디치가의 공방에서 만든 유럽 최초의 도자기라고 쓰여있었다. J.P. 모건이 기증한 접시도 있었다.


메디치 가의 도자 접시: 투르크 이즈니크의 영향을 나타낸다.


메디치 가의 도자 접시: 서사 그림을 그려 넣었다


메디치가의 도자 접시: 사울 왕의 죽음을 나타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청화백자가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까닭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방의 비단과 향료가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유입될 때 피렌체의 실력자 메디치가의 프란치스코 1세 대 메디치(1541~1587)가 이 아름다운 청화백자를 보고 완전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많은 중국 도자기들을 사 모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하기 위하여 1560년, 피렌체에 도자기 공방을 설립하였다는 것이다. 이 공방에서 위와 같은 모양의 도자기를 제조하기까지는 약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소위 ‘메디치 도자기’라고 불리는 도자기들이다. 이 도자기는 중국인이 만든 단단한 도자기가 아니고 연성 도자기였지만 이만한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기술적 진보라고 했다. 기술적으로 어렵고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메디치 도자기는 매우 소량만 생산(주로 다른 왕실에 대한 선물용)되었으며, 1587년 프란체스코가 사망하면서 제조가 중단되었거나 적어도 크게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메디치 도자기는 단 59점만 남아있다고 하는데, MET에 몇 점 소장되어 있어 내 눈이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메디치 도자기 접시’는 흰 백토에 푸른색 코발트로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넣었는데, 대부분 중국의 청화백자나 터키 이즈니크 도자기를 흉내 낸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한스 세발트 배헴(Hans Sebald Beham, 독일, 1500~1550)의 목판화가 유명했는데, 메디치가의 도공들이 접시의 그림을 그릴 때 배헴의 목판화 그림을 참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맨 아래 접시의 중앙에 있는 문양은 다윗 왕에 쫓기던 사울 왕이 칼에 엎드려 자진하는 배헴의 목판화 그림을 참조하였다고 하는데, 정교한 서사가 일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메디치 접시’는 유럽에서 최초로 성공한 청화백자 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아래 사진과 비교해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만든 단단한 도자기들보다 품격이 떨어져 보인다. 바탕을 이룬 백자도 깨끗한 백색이 아니고 문양도 흐릿한 것이 이 문외한이 보기에도 성공적인 복제기술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우리나라 청화백자 접시와 비교해 보면 그 품격의 차이를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다.


백자청화철채 난초청낭자문병 (白磁靑畵鐵彩蘭草靑娘子文甁), 조선, 19세기


‘메디치 접시’ 옆에는 청화백자 물병 도자기도 한 점 전시되어 있었다.

물병의 제조기술은 진일보한 듯 백자의 색은 더욱 깨끗한 흰색이고, 코발트의 푸른 문양이 더욱 선명하여 아름다웠다.



그 옆에는 노란색 무늬를 넣어 변화를 준 도자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 이 도자기 옆에 같은 시기에 제조된 조선의 청화백자를 놓고 보면 기술의 차이, 품격의 차이를 뚜렷이 느낄 수 있다.


백자청화 매죽문 호, 조선, 15세기, 국보


조선에서는 1467년(세조 13) 도자기 제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옹원(司饔院)이 만들어졌고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1575년부터 유럽에서 최초로 청화백자를 제작하였다. 메디치가의 도자는 비록 백토의 자화(磁化)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연질(軟質) 백자였지만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에서 청화백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고(네덜란드 델프트에서 만든 청화백자는 유명하다) 결국 이 노력들이 영국의 웨지우드(Wedgwood), 이탈리아의 지노리(Ginori), 덴마크의 로열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독일 마이센, 헝가리 헤렌드 등의 명문 도자기들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MET에도 세계각국의 도자기들이 소개되어 있다(그리스의 신화 이야기가 새겨진 도자기, 프랑스 궁정의 화려한 채색 도자기 등). 그러나 청화백자를 능가하는 도자기나 도자 접시가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명기들은 흰 바탕에 푸른 안료로 문양을 넣은 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조도, 메디치가의 프란치스코 1세 대 메디치도 인성적으로는 악명이 높았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어 청화백자의 세계화에 일조한 역할은 높게 쳐주어야 할 것 같다.


메트로폴리탄의 한국관에는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시대 운용무늬 청화백자 한 점이 전시되어 있다. 도자기의 모양 하며 웅비하는 용의 그림이 완벽하여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조선의 백자청화용무의 항아리(白磁靑畫龍文壺), 조선, 18세기 후반


나는 앞에서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재벌이 아니기 때문에 국보급 청화백자 한 점을 두고 안목의 호사를 누릴 수는 없지만 나 나름대로 즐기는 소박한 방법은 있다.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가급적 도자를 사 모은다. 포르투갈의 파티마를 갔을 때도 묵주보다는 포르투갈의 청화백자 꽃병 하나를 샀고, 투르크에서도 이스푸닉의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타일 한 점을 샀으며 홍콩에서는 골동품 가게에서 중국 찻잔 한 세트를 샀다.


중국 청화백자 찻잔: 나의 애장품이다.


나는 로열 코펜하겐의 청아한 푸른 문양이 있는 찻잔도 사랑하고 러시아의 생 페테르브르그에서 만든 우아한 찻잔도 사랑한다. 다칠까 보아 장식장 안에 소중히 모셔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것이 나의 낙이다.


로열 코펜하겐의 청화백자 다기


생 페테르브르크의 청색 문양 도자: 금박 장식이 요란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20년간 아침저녁으로 애용해 온 국그릇 밥그릇을 자랑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실 자랑할 꺼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의 손 때가 묻었고 그동안 나름 애지중지해 온 그릇이라 이 자리에 그 흔적을 남겨두고 싶어서 이 그릇을 동참시킨다. 이 그릇과는 20년 전쯤, 싱가포르의 한 백화점에서 만났는데 처음부터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네 세트를 사서 지금껏 사용해 왔는데 이 가볍고 단단한 그릇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였는지 세 세트의 그릇에 이빨이 빠지고 멀쩡한 것은 한 세트만 남게 되었다.

이 그릇과 이별하려고 하니 참 서운하다.

어디서 또 이렇게 아름다운 그릇을 만날까!

물건과도 인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나의 애착하는 마음을 달래 본다.


나의 국그릇, 밥그릇


keyword
이전 12화12. 뉴욕의 두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