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맞아요.
맨해튼의 5번가와 웨스트 42번가 사이에 뉴욕공공도서관이 있다.
이곳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처럼 거창한 보자르 양식으로 지어져 궁전이나 박물관이라야 마땅한 듯, 어쩐지 도서관이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도서관이라고 하면 내게는 고착된 이미지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도서부에서 특별활동을 하였다. 책을 마음껏 읽으려는 욕심에서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서가가 몇 개 있는 조졸한 방이었을 텐데 그 공간을 나는 바다와 같이 생각하였다. 짬만 나면 도서관을 찾아 배고픈 아이처럼 온갖 책을 읽으며 그 바닷속을 유영하였던 것 같다.
늘 소박한 도서관들만 보면서 자라 형성된 고정관념인지는 몰라도 이 도서관의 외관이 너무 융성하여 안으로 들어가기가 오히려 꺼려졌다. 그래서 딸이 한번 가 볼만하다고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었다. 단지 우리가 머물던 호텔과 가까웠으므로 오며 가며 랜드마크로 삼았을 뿐이었다.
어느 날, 마침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내가 놀란 것은 비단 매끄러운 대리석과 멋진 천정화나 빛나는 샨데리아 때문이 아니었고, 그곳에 소장된 5천만 권의 장서 때문이 아니었다.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그곳에는 내가 절대로 볼 수 없었던 희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뉴욕공공도서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보물은 1455년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인쇄한 라틴어 성경이다.
이 책이 지척에 놓여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박물관의 외관에 주눅이 들어 발걸음을 떼지 못했음을 생각하자 나의 바보 같은 행동에 실소가 나며 아찔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마터면 비행기를 한번 더 탈 뻔했다.
알다시피 구텐베르크 성경은 유럽의 역사를 바꾼 책이다.
마인츠에서 태어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는 이동식 금속 활자를 이용해 유럽 최초로 책을 인쇄하였다(우리나라의 금속 활자 기술이 그보다 78년 앞섰다). 그 최초의 책이 라틴어로 쓰인 불가타 성경이었다.
성경이 대중화되면서 루터의 종교 개혁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었고 세계는 그 이전의 ‘머리 뿔 달린 일곱 마리의 용’(몽매함을 뜻하는 빅토르 유고의 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금속활자 덕분에 책이 대중화되면서 유럽의 위대한 ‘Age of Enlightment(계몽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니 구텐베르크 금속 인쇄기는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구텐베르크의 최초의 성경은 오늘날 단 49권이 남아 있는데 전 세계의 19개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자랑스러운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뉴욕의 공공도서관인 것이다.
1847년, 이 도서관의 설립자이자 고서 수집가인 제임스 레녹스(James Lenox)에 의해 이 책이 뉴욕시에 도착했을 때 세관원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모자를 벗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는 책이다.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보존상태도 훌륭하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 책을 눈앞에 두고 나의 감동은 눈물이 날 정도였다.
와우~ 미국은 놀랍다.
뉴욕공공도서관이라고 이름하여 뉴욕시가 운영하는 도시규모에 걸맞은 도서관인 줄로 지레짐작하였더니 알고 보니 이 도서관은 미 의회도서관, 영국·프랑스·러시아의 국립도서관들과 함께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라고 하였다.
시작은 도서관의 필요성을 인지한 한 개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미국은 18세기말이 되어서야 독립한 신흥국이었지만 한 세기만에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미국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고 시민 의식과 문화를 드높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거창한 건물들을 지었다. 뉴욕공공도서관도 그중의 하나이다. 역시 배가 불러야 문화를 생각할 수 있는 법이다.
1886년 뉴욕의 주지사였던 새무엘 J 틸던은 서민을 위한 도서관 설립을 제안하였다. 당시 뉴욕에는 2개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애스터(Astor)와 레녹스(Lenox) 도서관이 그것이었다. 틸던은 이 두 도서관을 통합하여 새로운 대규모 도서관을 짓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사재 24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거기다 1901년 철강왕 카네기가 510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뉴욕공공도서관의 꿈은 점점 현실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건물이 문을 연 것이 1911년이었다. 초기의 건립자들은 도서관이 그저 책을 읽고 빌리는 장소가 아니라 ‘당대의 지식을 교류하는 전당’이 되었으면 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 지식의 유산들을 적극적으로 모아들였던 것일까?
이 박물관 앞에는 두 개의 사자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모체가 된 두 개의 도서관의 이름을 따 각각 애스터, 레녹스라고 칭했다. 그러다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당시 뉴욕 시민들에게 ‘인내(Patience)’와 ‘불굴의 용기(Fortitude)’라는 두 자질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인내’와 ‘불굴의 용기’ 사자상은 지금도 뉴요커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 모형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도서관 건물은 후발주자인 미국이 유럽을 따라잡기 위한 분투로 보인다. 이 도서관은 지금도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수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한다. 1920년 러시아가 혼란을 겪으면서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이 훼손되거나 유출되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의 도서관에서 흘러나오는 자료들을 뉴욕공공도서관에서 아낌없이 사들였다는 것이다.
뉴욕공공도서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은 3층의 '로즈룸'으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풍의 천장화와 책상이 늘어선 모습은 지금도 중세의 고풍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어 영화의 배경으로도 여전히 사랑받는다고 한다. 부럽다.
나의 넋을 빼앗은 또 하나의 책은 14세기 초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Tickhill Psalter>이다. 화려한 중세 필사본으로서 정교한 삽화와 세밀화가 눈길을 끌어 딱 보아도 예술적, 종교적 가치가 어마어마한 책으로 보였다. 시편과 기타 기도문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내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중세의 수도원에서 성경을 필사하고 세밀화를 그려 넣던 수도사들의 업적을 여기서 실제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였는지 모른다!
정교한 삽화와 세밀화가 눈길을 끄는 중세의 필사본 <Tickhill Psalter>
아래의 책은 1781년 모스크바 장인들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호화로운 복음서로서 복음서 낭독 직전에 높이 올려져 전체 회중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중앙에 통치자인 그리스도를 나타내었고 네 모퉁이에는 네 명의 성서 저자들을 나타내었다.
또 하나 나의 지대한 관심을 끈 책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La Divina Commodia>의 첫 번째 일러스트 에디션이다. 1481년 독일인 인쇄업자 니콜라우스 로렌츠는 목판화 대신 판화를 사용하여 단테의 첫 번째 삽화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뉴욕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버마에서 사용되던 불교 경전도 있다.
오래된 문화유산들은 대부분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한한 인생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인류의 소망을 나타내는 듯하여 보는 내내 가슴이 찡했다.
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물에는 성경 관련 도서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래된 과학 서적도 있는데 그중 놀라운 것이 갈릴레오의 노트와 아이작 뉴턴이 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와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다.
뉴턴(Isaac Newton)이 1687년에 출판한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현대물리학과 천체역학의 기초를 마련한 작품으로서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에서 뉴턴은 운동의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하여 당시 과학자들이 설명하지 못했던 행성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책인가! 이 책의 1686년 초판본을 포함하여 희귀본을 뉴욕공공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니!!!
다윈의 <종의 기원>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기타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의 친필 문서도 있으며 셰익스피어 첫 작품집인 <First Folio>,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원고도 소장되어 있다.
아래의 책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모은 첫 번째 정식 출판본(1623년, 런던)이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보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 초안도 있다. 원문과 수정된 부분이 함께 기록된 중요한 역사적 문서로 인정되는 것이다.
워싱턴 대통령의 퇴임 연설문도 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부터 현대까지의 희귀한 세계 지도와 도시계획 자료 등 50만 장을 보유하고 있다니 이 도서관의 저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헨리 허드슨이 뉴욕을 탐험했을 당시 초기 지도는 주목을 받고 있다.
기타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의 원고 악보도 보존되어 있다.
이들 고문서들은 일부 디지털화 되어 온라인으로도 열람가능하다고 하니 뉴욕공공도서관은 인류에게 문화와 역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만일 미국의 최첨단 무기시설을 돌어보았다고 해도 이 보다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뉴욕공공도서관에서 미국의 힘을 실감했다. 그리고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비치하고 대여해 주는 장소가 아니라 인류의 지난한 문화유산을 지켜가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힘! 부러웠다.
뉴욕공공도서관의 뒤편에는 넓은 면적의 공원이 붙어있다.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이다. 고층빌딩 숲에 포위되어 도심 속의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런던 플레인 플라타너스 나무가 가지치기를 당하지 않은 채 마음껏 자라고 있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이 공원을 지나가기도 하였고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였는데 밤낮없이 사람들이 공원을 즐기고 있어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공원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뉴요커인 딸도 이 공원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딸이 행여나 혼자서 이 벤치에 앉아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엄마 마음이다.
우리가 귀국할 때 딸아이가 뉴욕공공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 모형을 선물로 사 주었다. 현재 이 ‘인내’와 ‘불굴의 용기’라는 두 마리의 사자는 우리 집 서재를 지켜주고 있다.
두 마리의 사자를 보면서 뉴욕의 추억뿐만 아니라 Patience와 Fortitude의 정신도 늘 새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