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슬퍼하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플라타너스 나무에 매혹된 사람으로 유명하다.
페르시아-그리스전(戰)을 일으켜 세계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긴 이 대왕은 그리스를 침공하러 나설 때 한그루의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를 만났다. 대왕은 이 나무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매혹되어 나무에 금장식을 둘러주고 병사를 두어 나무를 지키도록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 일화로 인해서인지 헨델은 오페라 <세르세>에서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에서 노래하는 유명한 아리아 <Ombra my fu 이런 그늘은 없었다네>를 만들었다. 이 오페라에서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플라타너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너스여!
이런 그늘은 없었다네,
이렇게 까지 자라났던 나무는,
사랑스럽고 호감을 주네...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아니지만 나도 플라타너스 나무에 매혹된 사람이다. 나도 플라타너스의 그늘을 사랑하고 이렇게 까지 웅대하게 자라는 나무를 흠모하며 이 나무에 한없는 호감을 느낀다. 헨델의 아리아는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아 놀랍기만 하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을 매혹시킨 그 나무가 서울의 대표적인 가로수로서 서울길을 지켜주고 있다. 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지날 때마다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의 매혹된 마음을 나무에게 전하고 싶다.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플라타너스 나무에 매혹된다.
겨울에 플라타너스 나무가 흰 줄기만 드러낸 채 마치 지구를 떠받들기라도 하듯 서 있는 자태는 뭉클하다. 비장한 모습이다.
여름철에 무성한 잎을 내어 뜨거운 태양을 피해 갈 그늘을 만들어주는 센스도 고맙다. 그 그늘 아래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자리를 잡은 모습을 보면 내가 다 나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다.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플라타너스 잎의 위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가을에 단풍 든 플라타너스 잎이 하나씩 뚝뚝 떨어져 땅바닥에 눕는데, 누운 잎마다 모두 제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도 어여쁘다. 한 잎도 동일한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 어여쁜 모습에 반해 떨어진 잎마다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른 봄에 새 순이 돋아나는 눈부신 모습은 나의 필력이 모자라 묘사하기가 어렵다.
하여튼 나에게 플라타너스 나무는 너무 멋지다.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파크의 벤치에 앉아 거대한 플라타너스나무들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런던 플레인 트리(London Plane Tree)였다. 우리나라의 플라타너스는 미국동부지역에서 건너온 양버즘나무(아메리칸 시카모어 American Sycamore)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뉴욕의 공원에서 만나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당연히 양버즘나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뉴욕 공원의 이 거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런던 플레인 트리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런던 플레인 트리는 영국에서 아메리칸 시카모어와 동양 플라타너스의 자연교배종으로 탄생한 플라타너스 종류이다. 그런데 아메리칸 시카모어의 본고장인 미동부지역, 특히 뉴욕에 런던 플레인 트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니 어찌 된 일일까?
그러고 보니 브라이언트 파크의 플라타너스 나무들도 런던 플레인 트리였다.
동양버즘나무(Oriental Plane Tree)와 양버즘나무(American Sycamore)의 교배종인 단풍버즘나무(London Plane Tree)는 17세기 말경 런던에서 출현하였다고 한다. 교배종인 이 나무는 '잡종 강세'의 특성을 나타내어 큰 키에 잎이 줄기 높은 곳에서부터 뻗어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면서도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탁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공해를 견디는 우수한 생존력과 번식력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조지 3세 왕 시절, 런던시민들은 이 나무를 가로수로 런던에 심었다. 그 후 단풍버즘나무는 위풍당당하게 가로를 장식하여 런던의 주요 상징물이 되었다.
단풍버즘나무 곧 런던 플레인 트리는 런던뿐만 아니라 파리의 주요 가로수 수종으로도 선택되었다.
뉴욕에 이렇게 런던 플레인 트리가 주류가 된 까닭은 런던 플레인 트리의 가로수로서의 탁월함 때문인지 아니면 영국이 뉴욕을 식민지로 개척할 때 이 나무를 대거 옮겨 심어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거대하게 자란 이 나무 아래서 뉴요커들이 휴식을 취한다는 사실만은 명료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자라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마음껏 가지를 뻗으며 멋들어지게 모양을 내고 있는데 비해 서울의 가로수들은 마구 잘린 채 오그라들어 두 나무가 완전히 다른 나무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매디슨 스퀘어 파크에서 멋지게 자란 플라타너스 나무를 올려다보며 서울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생각했다. 뉴욕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나무들에게 까지도 미치건만 서울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엉망으로 가지치기를 당하여 ‘닭발’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서울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불쌍하다.
가지치기는 물론 서울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19세기말까지 그루터기만 남기고 줄기를 몽땅 자르는 강전정을 했다.
2024년 서울에서 열린 고흐의 그림 전시회에서 가지치기를 당한 나무 그림을 보았다. <석양의 가지치기한 버드나무>라는 작품이었는데, 고흐의 화려한 색칠로 인해 강전정을 당한 나무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프랑스에서도 무자비한 강전정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씁쓸한 기분이었다. 다만 이 그림이 그려진 때가 1888년이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런데 1851년 드 크루발(De Curval)이라는 사람이 가지의 그루터기만 남기고 나무를 자르는 두절(頭切)은 부후균(Wood Decay Fungi)의 침입으로 나무가 잘 썩는다고 하면서 두절 대신 평절(平切)을 권고하였다. 평절을 하면 새 살이 나와 나무를 보호하므로 나무가 잘 썩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상처도포제로서 나무에 타르를 바르고 시멘트를 충전하는 방식을 제안한 사람도 크루발이었다. 크루발의 이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도 고목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 산림청의 알렉스 시고(Alex Shigo, 1930~2006) 박사가 평절 효과에 의심을 제기하면서 나무의 상처를 타르와 시멘트로 덮는 크루발의 방식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는 만 오천 그루의 나무를 잘라 나무가 외부의 공격을 받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보호벽을 발견하고 이른바 부후구획화(Compartmentalization of Decay in Trees, CODIT)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나무가 부후균의 공격이나 물리적 손상을 입게 되면 손상된 부위를 격리하여 부패가 획산 되는 것을 막는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작용시킨다는 것이다. 나무는 일차적으로 물관 내부에서 방어물질을 분비하여 부후균이 위아래로 퍼지는 것을 막고 이차적으로는 나이테 경계에 따라 후벽세포를 만들어 부후균의 수평확산을 막으며 세 번째로는 수지선, 방사조직 등의 구조를 통해 감염이 안쪽으로 확산하는 것을 억제하며 네 번째로는 손상 주변에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내어 외부로부터 감염을 막는 작용을 하여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네 개의 방어기제 중 네 번째의 방식이 가장 강한 방어벽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시고 박사는 CODIT를 돕기 위해 가지치기가 매우 중요한데, 가지치기를 잘하여 나무의 네 번째 방어벽이 작동하여 스스로 상처가 아물게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이를 실패하게 되면 나무 내로 부후균이 침투해 나무 전체가 썩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알렉스 시고 박사의 CODIT 이론을 알고 난 뒤로부터는 집 주위의 플라타너스 줄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나무는 벽이 잘 만들어져 상처가 아무러져 감쪽같아 보이는데 어떤 줄기는 가지치기를 잘못하여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올 겨울에도 거리에서는 가차 없는 가로수 가지치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서울의 가지치기는 드 크루발의 권고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시고 박사가 밝힌 과학적 CODIT의 실체보다는 가로수 전정의 경제성만 중시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돈으로만 계산하는 한국적 현상이 가로수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모습이 방영될 때 나는 런던 가로를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길에 감탄하였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국가수목표준작업지침서를 마련하여 두절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나아가 썩은 줄기만 제거하는 최소한의 처리만 하고 전정을 하지 않는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런던에 비하면 강전정을 당해 초라하게 서 있는 서울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우리나라의 국격을 말없는 웅변으로 나타내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서울 가로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크세르크세스대왕이 경탄했던 그 나무처럼 만들어줄 수는 없을까? 나의 경애하는 나무 모습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파크의 벤치에 앉아 멋지게 자란 플라타너스 나무를 올려다보며 서울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위해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