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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by 보현

: 국가를 생각한다

저녁 무렵 알링턴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알다시피 이곳은 미국 최대의 국립묘지이다. 639 에이커(약 80만 평)의 대지에 약 40만 명 이상의 전몰 군인들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현충원도 가보지 않은 내가 굳이 미국의 국립묘지를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었는데 헬렌은 워싱턴 DC에 왔으니 당연히 그곳을 봐야 한다는 듯 우리를 이끌고 나아갔다.

TV를 통해 자주 보았던 곳이라 낯설지는 않았으나 실제 이곳에 도착해 종과 횡을 맞춰 늘어선 엄청난 비석의 바다를 보니 왠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흰 돌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지만 돌비석마다에는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서 죽어간 사람들의 비극적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턱 막혔다.

무덤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막히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험한 무덤을 많이 찾아다닌 탓인 것도 같았다. <한국천주교 순교성지>를 쓰면서 순교자들의 주검을 많이 대했다. 그때마다 무덤에서 일어나는 원혼들의 원통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옛 어른들로부터 “저녁 무렵에는 무덤가에 가자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귀신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님 산소를 둘러볼 때도 저녁 무렵이 되면 괜히 머리뒤가 쭈뼛거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원혼들(전쟁터의 참상을 생각해 보면)이 잠든 곳을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는데 신기하게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 아래로 흰 비석들의 행렬이 워낙 깔끔하게 배열되어 있어 무덤이라기보다는 공원 같은 느낌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많은 관람객들이 있어서인지 두려운 마음을 떨치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면 국가에서 그들의 공헌을 소중히 떠받들어주니 죽은 자의 영혼도 구천을 헤매지 않고 평안을 누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헬렌의 안내로 무명용사의 묘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명용사의 비가 있는 묘역은 알링턴 하우스가 있는 언덕 가까이에 있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가는 길에도 한없이 펼쳐진 비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장군이나 높은 사람들의 묘역은 비석이 커서 장엄한 느낌을 주었으나 대부분의 무덤은 일반 사병의 무덤인 듯 얇은 비석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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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같이 깔끔한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완쪽이 일반 전사자 묘역, 오른쪽이 고위직 묘역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무명용사의 묘역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교대식이 임박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힘껏 언덕길을 올랐다. 그동안 강행군을 하며 다닌 탓인지 언덕을 오르기가 힘이 들었다. 남편의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휠체어가 있으면 남편을 휠체어로 모시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우리는 두 발로 열심히 걸어가는 쪽을 택하였다.

언덕 위에 성조기와 함께 알링턴 하우스의 모습이 의연히 보였다. 앞글 <마운트 버논>에서 언급한 곳이다.


알링턴 하우스(Arligton House)

알링턴 국립묘지라는 이름은 원래 알링턴 하우스에서 유래하였다. 알링턴 하우스 지역은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E. 리 장군의 가족이 살던 영지였다. 더 이전에는 조지 워싱턴의 양손자인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가 워싱턴 DC가 건너편에 보이는 이 언덕에 알링턴 하우스를 지었다. 리 장군의 아내 메리 애나 R. 커티스 리(Mary Anna Randolph Custis Lee)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양증손녀였다.


<마운트 버논>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지 워싱턴은 마사 D. 커스티스(Martha Dandridge Custis)라는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워싱턴과 결혼 당시 마사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으나 대부분 조기 사망하고 성인까지 생존한 단 한 사람이 존 파크 커스티스(John Parke Custis)였다. 존은 워싱턴의 양아들처럼 자랐다. 그러다 27세 때 요크타운 전투 직 후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병으로 죽었다(1781년).


존 파크 커스티스의 사망직후에 태어난 유복자가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였다. 이 손자는 어릴 때부터 조지 워싱턴, 마사와 함께 마운트 버논에서 살았다. 양조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던 탓인지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는 조지 워싱턴의 사후 그의 유산 계승자로서 워싱턴의 정신과 기억을 보존하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는 워싱턴의 편지, 가구 등을 보존하였고 이 유품들을 훗날 스미소니언이나 국립 기록관에 기증하였다.

그는 워싱턴을 기리는 기념관을 짓기 위하여 1802년 포토맥 강이 내려다보는 언덕 위 땅 약 1,100 에이커를 매입하고 집을 지었다. 그 집이 바로 알링턴 하우스(Arligton House)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워싱턴 대통령의 회고록을 집필하기도 하고 연설가로도 활동하다 1857년 알링턴 하우스에서 사망하였다(76세).


조지의 사망 후 알링턴 영지는 그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메리 애나 R. 커스티스 리에게 상속되었다. 메리 커스티스는 조지 워싱턴의 양증손녀였고 그가 결혼한 로버트 E. 리(Robert E. Lee)는 버지니아의 군사 귀족 출신 집안이었다. 둘 다 버지니아 대지주 귀족 출신이었고 이들의 결합은 미국 독립전쟁 영웅 가문들의 2세대 자녀들의 결합이었다. 이들은 1831년 알링턴 하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후 1861년까지의 30년간을 이곳에서 살았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였다. 리는 웨스트포인트 수석졸업자였고, 멕시코 전쟁 영웅 등 연방군 경력이 30년 이상인 최고의 군인이었다. 링컨대통령이 그를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버지니아 출신이었다. 연방 잔류는 가문과 지역사회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 그는 링컨의 제안을 사양하고 버지니아 주 방위군 총사령관의 직을 수락하였다. 이후 남부동맹군의 총사령관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리가 버지니아 주 방위군 총사령관의 직을 수락한 다음 날인 1861년 4월 22일 리 가문은 알링턴을 떠났다. 리는 북군과의 충돌을 정면에서 피하려고 노력했고 알링턴 하우스에서 남부군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겼다. 이후 리 장군의 가족들은 버지니아 남부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리 장군이 떠난 알링턴은 곧 북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북군은 곧바로 알링턴 하우스를 몰수하여 군사 요충지로 사용하였다. 1864년 미국 육군은 워싱턴 DC 인근의 군인 시신 매장 장소가 부족해지자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메리는 평생 알링턴을 되찾으려 법정소송을 벌였고, 그녀의 아들 조지가 1882년 대법원 판결로 승소하였다. 미 정부는 이 땅을 커스티스 가문으로부터 매입해 국립묘지로 만들었다.


Arlington_House_National_Park_Service.jpg 알링턴하우스: 사진 출처 N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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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보이는 알링턴 하우스


오늘날 이 저택은 알링턴 하우스: 로버트 E. 리 기념관(Alington House and Robert E. Lee Memorial)으로 지정되어 미국 국립공원 관리청(NPS)에서 관리하고 있다.


무명용사의 묘

알링턴 하우스를 바라보며 언덕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가자 마침내 이 국립묘지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무명용사의 묘(Tomb of the Unknown Soldier)가 나타났다. 이곳은 알링턴 하우스 바로 아래, 묘지 중앙 상단에 위치하고 있어 이 묘지를 조성할 때(1921년)부터 정성을 기울인 표가 역력하였다.

무명용사의 묘는 말 그대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군인들을 기리는 곳이다.

사람들은 마지막 교대식을 기다리며 무명용사의 비 앞에 마련된 관람석에 앉거나 서 있었다.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침 석양이 무명용사의 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IMG_7996.JPG 무명용사의 비



좀 지켜보고 있으려니 근위병 교대식(Changing of the Guard)이 시작되는지 주변에서 두런거리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먼저 멋진 차림의 지휘관이 나타나 교대식을 알리면서 침묵과 기립을 요청하였다. 새 근위병이 소총을 메고 도착하자 지휘관과 새 근위병, 이전 근위병이 매트 위에 모여 세 차례 경례를 나누었다. 그 후 두 명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들어가고 새 근위병만 남아 매트를 따라 절도 있게 걸으며 근위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곳은 근위병들이 1년 365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근위병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상황에서도 24시간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근위병 교대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석양에 흰 대리석이 번쩍 빛나는 것 같았다. 순간 <일리어드>에 묘사된 전쟁 풍경이 뇌리를 스쳤다. 창과 칼이 쨍그렁하고 마주치며 먼지 속으로 쓰러져가는 용사의 죽음에 대한 묘사였다. 창과 칼은 아닐지라도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전장에서 사라져 간 어떤 군인을 생각하자 막막한 슬픔이 일었다. 그래서 이곳을 근위병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명용사의 묘 근위병 교대식을 보면서 장엄함과 함께 미국의 힘을 느꼈다. 국가를 위해 죽어간, 그러나 하느님만 그 이름을 아는 자를 위하여 최고의 예우를 표하는 나라 미국.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책무라고 여겨지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근위병 교대식이 끝나자 관람객들의 퇴거를 요청하는 방송이 흘러나왔으나 사람들은 한동안 무명용사의 비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우리도 그랬다. 숙연한 감동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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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의 비 근위병 교대식 광경


국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Fulfill our Nation's Promise)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전쟁 유해 발굴단의 활약이 떠올랐다.

미국은 전몰 군인에 대한 깊은 예우를 나타내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것은 미국의 역사에서 유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 전쟁 때부터 민병대로 출발하였다. “자유와 독립은 피로 지켜진다”는 인식하에서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군인이 된 그들은 군인의 희생을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신성한 의무로 여겼다. 이후 정치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명예를 진작시키기 위해 애썼다. 링컨은 1863년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그들이 마지막까지 바친 그 헌신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여 군인의 희생을 높이 기렸다.

이를 위해 미국은 전몰 군인의 유해를 끝까지 찾고 이름을 밝혀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국가의 신성한 책무로 여긴다. 이 정신을 “전우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No man left behind)”라는 군대의 핵심 가치로 연결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작업이 유해발굴 작업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DPAA라는 전쟁 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을 두고 전 세계 전쟁터에서 전사자, 실종자, 포로의 신원확인과 유해 송환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확인 전사자들을 계속 발굴 중이다. 간혹 TV에 비친 발굴 유해를 관에 모시고 미국으로 송환하는 모습은 장엄하게 보였다. 관을 성조기로 덮은 다음 군악대의 애도가 연주되고 사열, 묵념, 국가 연주, 예포 발사 등이 진행된다. 국가를 위한 희생을 고귀하게 인정해주는 노력이야말로 이들을 애국의 길로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헬렌의 딸은 미공군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군복을 입고 나서는 딸을 바라보는 헬렌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서 미국에서 군인의 위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가의 묘지

교대식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존 F. 케네디 대통령가의 묘지에 들렀다.

본래 알링턴 묘지는 전몰군인을 위한 묘지였다. 그런데 1963년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 순직하였고 그의 장례식이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재클린 여사가 남편의 장지로 알링턴 묘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었으므로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은 충분했다고 한다. 그의 무덤 앞에는 재클린 케네디가 요청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설치되었다.

재클린은 케네디 사후 그리스의 오나시스와 재혼하였지만 생전에 남편 옆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그녀의 사후(1994년) 가족들이 그녀를 남편 곁에 묻었다. 이곳에는 유산된 딸 아라벨, 요절한 아들 패트릭이 함께 묻혀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 정상과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묘지 중 하나가 이 케네디가의 묘역이라고 한다.


IMG_8016.JPG 케네디가의 무덤: 꺼지지 않는 불꽃이 지키고 있다.


헬렌의 안내로 알링턴 국립묘지를 돌아보았지만 이곳을 나서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 33,000여 명의 전사자도 묻혀있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지 않으면 그 국가는 존립할 수가 없다. 죽은 자들을 딛고 일어선 국가는 그 애국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의 자녀들이 떠올랐다. 차디찬 외면 속에 가난에 내몰리며 해외를 떠도는 우리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이 아프게 느껴졌다. 그 답을 무명용사의 묘에 바쳐진 미국의 헌사에서 찾아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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