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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샬럿츠빌 기행

대통령들의 사저 엿보기

by 보현


버지니아에서 2박 3일의 식민지 역사 삼각지 여행을 마치고 워싱턴 DC로 돌아가는 길에 샬러츠빌(Charlottesvill)을 거쳐 가기로 하였다. 샬러츠빌은 내가 미국에 오기 전부터 헬렌의 권유를 받은 여행지였다. 헬렌은 샬러츠빌을 자연이 아름답고 역사와 문화가 있는 여행지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특히 초기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먼로의 사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평생 토마스 제퍼슨을 흠모했던 제임스 먼로는 제퍼슨의 생가인 몬티첼로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와의 교류를 이어갔다고 한다. 토마스 제퍼슨이 설계한 몬티첼로의 저택과 버지니아 대학의 로툰다(Rotunda) 및 아카데미 빌리지(Academic Village)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토마스 제퍼슨이 그토록 몰두했던 건축물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요크타운에서 몬티첼로로 가는 길은 아름답고 한적하였다. 마치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뉴욕주의 플랫츠버그로 내려올 때 만났던 아디론댁 산맥(Adirondack Mountains)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샬러츠빌은 애팔래치아 산맥과 블루 릿지 산맥 사이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닌듯했다.


요크타운에서 샬러츠빌로 가는 길: 한적한 시골 풍경이었다.


미키태번(Miche Tanen)에서

몬티첼로로 가는 도중 헬렌이 오래된 태번(Tavern) 앞에 차를 세웠다.

태번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좀 낯선 용어인 것 같은데 과거 유럽이나 미국에서 음식, 술, 숙박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일컬었다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주막쯤 된다고 할까. 17~18세기 미국 식민지 시대에 태번은 마을 커뮤니티의 핵심 장소 역할을 하였던 것 같았다. 마치 영국의 커피하우스가 정치인들의 모임 장소였던 것처럼.

샬로츠빌에 있는 이 미키 태번(Michiee Tanen)은 1784년 윌리엄 미키(William Michie)에 의해 버지니아 주 앨버말 카운티(Albermarle County)에 세워졌던 곳이었단다. 그런데 조새핀 헨더슨이라는 사람이 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미키 태번을 해체하여 몬티첼로에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그대로 옮겨왔다고 한다(1927년). 그의 혜안이 맞아떨어져서 이곳은 몬티첼로로 가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방문장소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이곳에서는 18세기 남부 미국의 전통 스타일의 식사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18세기 스타일의 미국 남부 전통 스타일의 식사가 궁금했지만 이미 아침을 든든히 먹은 뒤라 식당은 패스했다.


미키 태번

이곳에는 18세기의 담배 건조장과 물레방아 방앗간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버지니아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버지니아 역사 기념물(A Historic Landmark)이라는 표지판도 놓여 있었다.


미키 태번에 보존되어 있는 물레방아 방앗간과 담배 건조장


몬티첼로에서 토마스 제퍼슨을 생각하다.

몬티첼로(Monticello)에 도착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1768년, 그의 나이 26세 때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땅 외에 버지니아 알버말 카운티의 이 산등성이 땅을 구입하여 이듬해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몬티첼로’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작은 산’ 또는 ‘작은 언덕’을 뜻한다고 한다.

몬티첼로에 도착하여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약 5천 에이커(60만 평 이상의 광대한 면적)의 땅을 밟아보면 ‘작은 산’이라는 말뜻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제퍼슨은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이 집에서 약 60년간 거주하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그 사저가 바로 이곳 몬티첼로이다.

이 집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철학, 과학, 정치, 건축, 농업에 대한 비전이 집약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고 하여 뭔가 기대가 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의 몬티첼로 전경과 토마스 제퍼슨의 동상


셔틀버스 출발지에 토마스 제퍼슨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으로서 펜을 손에 든 모습으로 주로 묘사되는데 이곳에서는 손에 망원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망원경은 제퍼슨의 과학을 사랑하는 정신을 상징하려고 했다는데, 제퍼슨은 실제 망원경을 이용하여 자신의 농장을 살펴보기도 하였고 버지니아대학을 건축할 때는 손에서 이 망원경을 놓지 않은 채 건축을 독려하고 감독하였다고 한다.


제퍼슨이 설계한 정원을 따라 걸었다. 몬티첼로의 사저로 가는 도로 양 옆에는 뽕나무(mulberry)가 줄지어 심겨있었다. 거리 이름도 Mulberry Row였다. Mulberry Row 옆으로 농장 유지에 필요했던 주택, 대장간, 목공소, 세탁소 등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노예들이 노동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이 농장에는 노예가 약 600여 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몬티첼로의 Mulberry Row(뽕나무 길)


언덕 위에 제퍼슨의 유명한 몬티첼로 저택이 나타났다.

이 저택은 그가 프랑스 대사(1785~1789)로 유럽에 체류할 때 로마 신전에서 받은 건축적 영감을 바탕으로 대대적 리모델링을 실시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탄생시켰다고 한다. 네오클래식 구조에다 제퍼슨의 독창적 설계, 집안의 과학적 기능성 등이 이곳을 특별히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는 몬티첼로 저택뿐만 아니라 리치먼드 주 의사당 및 버지니아 대학의 설계에 신고전주의 건축을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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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첼리의 정면 모습(왼쪽)과 뒷모습(오른쪽)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앉거나 서서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무언가 건국 대통령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방문객들: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토마스 제퍼슨은 1743년 4월 13일 버지니아의 앨버말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플랜테이션 가정이었다. 성장한 그는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서 철학, 과학, 법률 등을 공부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 뉴턴, 존 로크 등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 특정 종파에 치우친 교육과 과학 교육의 부재로 인해 큰 실망을 하였다. 그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한 고등교육기관을 세우고 싶어하였다. 이것이 후일 그가 버지니아대학 설립에 앞장서는 계기가 되었다.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774년 영국의 압제에 항의하는 <버지니아인의 권리 개요>를 집필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저 유명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게 되었다(1776년, 29세). 1786년에는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을 제정하여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명문화하였다.

그 후 그는 제3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으며(1801~1809) 대통령 직에서 퇴임한 후로는 몬티첼로를 리모델링하였으며 온 힘을 다해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의 최대 치적이라고 하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미국 영토를 2배 이상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일생을 통해 정열적으로 일하던 그는 1826년 7월 4일 몬티첼로에서 사망하였다. 이날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50주년 되는 때였고 공교롭게도 제2대 존 애덤스 대통령도 같은 날 사망하였다. 버지니아대학이 막 개교(1825년) 한 후였으니 그는 필생의 업무를 다 마치고 눈을 감은 셈이었다.


몬티첼리의 아래쪽에 제퍼슨의 무덤이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제퍼슨의 의지에 따라 그의 업적 세 가지만 기록되어 있다. 즉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 잠들다.


여기서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이었던, 버지니아 주지사, 미국 국무장관, 제3대 대통령 등 자신의 지위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오로지 한 사상가요, 교육자로만 후대에 알려지기를 원했다.


토마스 제퍼슨의 무덤: 그의 유명한 묘비명이 세겨져 있다.


그의 자랑인 독립선언서의 초안이 몬티첼로에 당연히 보존되어 있었다.

제퍼슨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선언은 세계사적인 선언이었고 세계인들의 가슴에 불을 붙인 선언이었다.


그러나 몬티첼로에서는 제퍼슨의 어두운 모습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라는 흑인 노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이 여인과의 관계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헤밍스는 아내 마사 웨일스의 이복 여동생(마사 웨일스의 아버지와 흑인 여성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제퍼슨의 노예였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부임해 갈 때 샐리를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제퍼슨이 40대 초반이었고 샐리가 14세였기 때문에 둘 사이가 정상적인 애정에 기반한 사이가 아니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고 하는 세계적인 선언문을 쓴 그였지만 그의 삶이 그의 선언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정치가의 거짓된 삶은 다반사로 여겨져 충격을 주지 않지만 사상가요 교육자를 자처하는 삶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왜 그는 그의 묘비명에 자신이 사상가요 교육자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걸까! 그가 말한 모든 인간(all men)에는 백인 남자만이 포함되어 있었던 걸까?

계몽주의를 받아들여 시대를 앞서가고자 했던 그도 결국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아 기분이 착잡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


버지니아대학교 방문

버지니아 대학은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 1819년 설립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제퍼슨은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이때 특정 종파에 휘둘리는 교육체계에 큰 실망을 한 뒤였다. 제퍼슨은 시민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며 학문이 이성과 자유 탐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에는 국립대학 시스템이 없었을 때였다. 그런데 제퍼슨은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이용해 버지니아 주의회에 로비하여 15,000불이라는 당시로서는 거금을 승인받았다(1818년). 이때 제임스 매디슨이나 제임스 먼로 같은 그의 동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는 버지니아대학을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 정치 이상, 건축적 비전이 집약된 살아있는 계몽주의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 상징으로 그는 캠퍼스 중심부에 로툰다(Rotunda)를 두고 로툰다를 중심으로 유자형의 아카데미 빌리지(Academic Village)를 직접 설계하였다.

로툰다는 고대 로마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아지었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이 직접 설계한 로툰다: 지하에 토마스 제퍼슨의 동상이 있고 버지니아 대학 설립 당시의 모습이 설명되어 있었다.


제퍼슨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가장 빛나는 곳이 아카데미 빌리지(Academical Village)라고 부르는 교수와 학생의 공동 주거지였다. 그는 열 개의 파빌리온을 지어서 교수들의 주거지와 강의실로 삼고, 파빌리온 사이마다 방을 여러 개 만들어 학생들이 교수 옆에서 살게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직접 발로 건축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건축의 재료(적벽돌, 목재), 기둥의 형태(도리아식, 이오니아식)까지 세세하게 지정하였다. 실제 현장을 드나들며 건축 공사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고 장인들과 소통하며 품질을 통제하였다. 그의 손에는 늘 망원경이 들려있었다.

제퍼슨이 땀과 열정으로 세운 이 건물들은 훗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제퍼슨이 당시 버지니아 대학을 건설할 때 건축의 대부분을 흑인 노예 노동에 의지하였다는 어두운 면이 비판되고 있다. 오늘날 제퍼슨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핵심 중 하나가 흑인 문제이다.


버지니아 대학의 자랑인 아카데믹 빌리지(Academical Village)


1825년에 첫 학생들이 입학하였고 제퍼슨이 초대 이사장 겸 학장을 지냈고,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과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각각 2대, 3대 학장이 되었다.


먼로 홀


버지니아 대학교는 남부의 부유한 집안 자제들을 끌어모으며 계속 성장하였고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860년에는 하버드대학 다음으로 많은 학생을 가진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이 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시 이 대학이 남부연맹 편에 서면서 1865년 3월에 샬롯츠빌이 북부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버지니아 대학교의 성장을 크게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모든 역사를 거쳐 현재 버지니아대학은 학문적 명성과 공공 교육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25년 미국 내 종합대학 순위 공동 24위를 기록하고 있고, 공립대학 중 4위로 선정되어 있으며 공립대학 중 최고의 가치 대학 3위로 기록되고 있다. 토마스 제퍼슨의 이상이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넌도서관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한 인물은 <검은 고양이>의 저자로 유명한 에드가 알란 포(Edgar Allan Poe)이다. 에드가는 이 학교가 막 개학한 다음 해인 1826년 이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경제적 이유(도박빚, 양부와의 갈등 등)로 1년 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곳에 그가 머물렀던 기숙사와 방(13 West Range)이 재현되어 남아있었다. 나는 에드가 알런 포가 머물렀던 방 안을 바라보는 행운을 누렸다. 작가가 머물렀던 방이라는 어감만으로도 뭔가 신비스러운 아우라가 느껴졌다.


에드가 알란 포가 머물렀던 기숙사 13 West Range


먼로 대통령의 생가 하이랜드에서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대통령의 생가인 하이랜드(highland)는 토마스 제퍼슨의 몬티첼로에서 3.2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이랜드로 가는 길의 입구에 멋진 가로수들이 우리를 맞았다.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었으나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나무였다. 이 나무는 White Ash라는 미국 물푸레나무로써 하이랜드 측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서 관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제임스 먼로의 사저인 하이랜드로 가는 입구의 미국 물푸레나무 가로수 길


제임스 먼로가 몬티첼로에 가까운 곳에 사저를 미련한 것은 그의 토마스 제퍼슨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로가 이 부지를 매입한 때는 1793년(35세)이었고 이때 이미 토마스 제퍼슨의 몬티첼로는 버지니아 공화주의자 지식인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로는 젊은 시절부터 제퍼슨을 정치의 스승으로 따랐고 제퍼슨은 먼로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자임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상적 동지로 여겼고 서로를 깊이 존중하였다.


가난하였던 먼로는 제퍼슨처럼 거대 영지를 소유할 수도 없었고 몬티첼로의 신전 같은 집을 지을 수도 없었지만 그는 이곳에 일천 에이커 정도의 부지를 마련하고 조졸한 연방 스타일의 집을 지어 제퍼슨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제임스 먼로의 저택: 조졸한 연방양식의 건물이다.


제임스 먼로는 1758년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소규모 농장주로서 검소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민병대에 입대하면서 아들에게 공공 봉사정신, 애국주의 같은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제임스 먼로가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조기에 자립할 수밖에 없었다. 1776년 먼로는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그해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대륙군에 자원입대하여 워싱턴 장군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그런 중 트렌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 일로 용감한 병사로 이름을 알렸다. 군 복무를 통해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같은 지도자들과 교류하였고 이들 선배 정치인들은 먼로를 유망한 젊은 정치인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토마스 제퍼슨은 그가 버지니아 하원의원으로 나설 때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먼로는 제퍼슨의 정치 철학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길을 따랐는데 미국 상원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프랑스 대사, 국무장관, 대통령이 된 그의 인생여정이 제퍼슨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자주 교류하며 가족 간에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25년을 지내며 이곳을 영원한 집으로 여겼는데, 지금도 텃밭에서는 채소가 재배되고 있었다.


제임스 먼로의 하이랜드의 양배추 밭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최대치적은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1823)의 선언이었다. 그는 이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이 신세계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었다. 이는 미국 외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선언 중 하나로 이후 약 100년 이상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원칙이 되어왔다.

1817~1825까지의 그의 재임기간 중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영토로 편입하였고, 전쟁이나 위기 없이 평화롭고 안정적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국가 통합, 경제사회기반 구축 등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국립도로(National Road) 건설을 추진하여 동부와 서부를 연결한 것도 그의 업적으로 볼 수 있다. 하이랜드에는 미국 최초의 연방지원 고속도로인 40번 도로를 건설토록 지원한 먼로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주행거리 표시기의 철제주조가 서 있었다. 본래 이 마커는 펜실베이니아주의 하이웨이 40 구간에서 사용되던 것을 먼로의 업적을 드러내기 위해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일리지 마커를 옮겨온 이유는 방문객들에게 당시의 도로건설과 국가발전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의미로 여겨졌다.


미국 최초의 연방지원 고속도로인 40번 도로에 있던 주행거리 표시기


그는 미국 역사상 드물게 ‘좋은 느낌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 1817~1825)’를 주도한 행복한 지도자였다.

하이랜드에 제임스 먼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저 종이는 먼로 독트린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며 이 행운의 사나이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하이랜드에 세워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동상


헬렌 덕분에 계획에 없던 미국 초기 대통령들의 생가를 방문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의 정열적인 삶과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조용한 치적이 나란히 눈앞에 있었다. 정열적인 에너지가 클수록 인생에 그림자도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지도자의 약간의 인간적 오류도 비판의 대상이 될 텐데 이곳을 방문하는 미국인들에게서는 국부를 존경하는 마음만 가득한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하이랜드를 떠나오려는데 주차장의 큰 나무에 단풍이 너무 곱게 물들어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는 우리 마음의 경계를 쓱 허문다. 나는 헬렌과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다.


하이랜드의 단풍나무 아래에서 헬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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