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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서

버지니아 식민지 시대의 재현

by 보현



다음날 윌리엄스버그로 향했다.

제임스타운에서 윌리엄스버그로 향하는 콜로니얼 파크웨이(Colonial Park Way)는 제임스 강변을 통과하였는데 백강(Back River)과 칼리지 강(College River) 등이 제임스 강으로 흘러들고 있었고 곳곳에 습지가 펼쳐진 저지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제임스타운의 정착민들을 가장 괴롭힌 것이 모기 같은 해충이었다고 하더니 현장에 와서 보니 그 실정을 알 것 같았다.


제임스타운은 여러 강의 하류에 형성된 반도에 건설되었는데, 습지가 많은 저지대였다.


숙소에서 윌리엄스버그까지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윌리엄스버그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가 제임스타운에서 새로이 옮겨간 곳이었다.


제임스타운의 불리한 점

처음에 식민지를 건설한 정착민들이 제임스타운에 정착촌을 세운 이유는 이곳이 강과 습지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베네치아가 아띨라의 공격을 피해 습지 위에 도시를 세웠던 것처럼. 그런데 그 여건이 정착지로서 불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일 힘든 것이 모기 등의 해충의 공격이 극심했다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같은 질병이 정착민들을 괴롭혔다. 두 번째는 습지여서 식수 오염이 심해 음용수 확보가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이질 같은 질병이 자주 발생했다. 세 번째는 이민자들이 증가로 도시 확장과 인프라 구축을 하려고 해도 좁은 반도에 갖춰 어려움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들이 쌓여가던 터에 1698년 식민지 의회 건물이 화재로 대파되는 사건이 생겼다. 그러자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는 공식적으로 수도를 제임스타운에서 윌리엄스버그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1699년). 제임스타운에 뿌리를 내린 지 약 80년 만의 일이었다.


윌리엄스버그로 이주

윌리엄스버그는 당시 Middle Plantation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제임스타운과 요크타운 사이의 비교적 높은 지대(dry ridge)에 위치해 있었다. 땅이 건조하고 병충해가 적었으며 배수가 잘되어 오염된 식수문제가 덜한 위생적인 환경으로 여겨졌다. 더 나은 곳을 찾아 식민지 초기인 1630년대부터 이 지역으로 식민지 정착민들이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 작은 교회(후에 Bruton Parish Church가 됨)가 들어서고 농장, 상점, 학교들이 흩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William & Marry College)가 설립(1693)된 것이 이곳으로의 수도 이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버지니아 식민지인들의 경제 활동의 중심은 담배 재배였다. 담배라는 작물은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일정한 경작 후에는 새 땅으로 이동하여 농사를 지어야 했다. 담배 재배에는 대농장(plantation)과 노예노동이 필요하였다. 그러자 제임스타운 인근에 있던 일부 유력 가문들이 이곳 지역의 땅을 구입하고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중산층 지주들도 이 지역에 토지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Middle Plantation 지역은 수도이전에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이미 마련되어 있던 곳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버지니아 식민 정부는 신도시를 만들면서 윌리엄스버그를 체계적인 계획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 방문

남편과 나는 헬렌의 안내로 먼저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William & Marry College)로 갔다.

제임스타운에서 이곳으로 수도가 옮겨온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이곳에 먼저 설립(1693년)된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시에 대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곳이 교육 문화 중심지로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는 미국에서 하버드대학(1636년) 다음으로 오래된 유서 깊은 대학이었다.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에는 대자연 속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식민지 시대의 고색창연한 건축물들이 산재해 있었다. 마치 동화나라에 들어선 것 같이 아름다웠다. 대부분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아나폴리스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조지안식 건물들이었다.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William & Marry College) 정문 앞에서: 정문 위에 윌리엄 왕과 메리 여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대학을 설립한 사람은 성공회 성직자인 제임스 블레어(James Blair)였다.

그는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성공회 성직자 교육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버지니아 식민지는 영국 성공회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식민지였고 교회는 식민지 사회의 중심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양성과 식민지 엘리트 자녀들의 고등교육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은 식민지 사회의 염원이기도 하였다.
이런 염원을 등에 업고 블레어 목사는 7년 동안 영국 왕실과 교회 관계자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다 1693년 2월 8일 마침내 잉글랜드의 왕인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부터 왕실헌장(Royal Charter)을 받았다. 이 왕실헌장에 의해 학교는 토지, 자금, 세금 일부를 학교에 투자하는 등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식민지 지도자들이 학교 부지를 Middle Plantation으로 제안했는데 영국정부와 종교당국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식민지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학교는 더욱 탄탄하게 발전하였다. 설립자 제임스 블레어는 초대 총장을 지냈다.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는 식민지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중 하나로 수많은 정치인과 법률가를 양성하였다. 이 대학을 졸업한 유명 인사에 조지 워싱턴(초대), 토마스 제퍼슨(3대), 제임스 먼로(5대), 존 타일러(10대) 등 4명의 미국 대통령이 있다. 그래서 한때 이 학교를 ‘국가의 모교’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작은 한 칼리지에서 미국의 저명한 대통령이 네 명이나 배출되었다니 이 학교의 자부심이 얼마나 높을지 짐작이 갔다. 이곳은 미국 최초로 로스쿨을 설립한 학교이기도 하단다.


Wren Building. 학교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 현존하는 전미 대학 빌딩 중 가장 오래된 빌딩

이 칼리지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 Wren 빌딩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빌딩이 왕립 헌장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의 상징으로 식민지 시대 미국의 대표적 건축물이자 전미 대학 빌딩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빌딩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은 조지안 스타일의 건축양식을 제대로 보여주는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 Wren 빌딩 앞에 보터토트 남작(Lord Botetourt)의 동상이 서 있었다. 보터토트 남작은 노르본 버클리(Norborne Berkeley)라는 인물로 1768~1770년 사이 버지니아 식민지의 총독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는 총독 재임 시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에 재정적, 정치적으로 큰 지지를 보내었는데, 대학 측은 그를 ‘대학의 수호자’로 여겨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Lord Botetourt 동상: 렌 빌딩(Wren Building) 앞에 설치되어 있다


한편 터커 홀(Tucker Hall) 앞에는 미국의 제5대 대통령이자 이 학교의 졸업생인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미국 건국 세대의 핵심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는 설명이었다.

대학 중심에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부러운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무슨 어깃장을 대서라도 있는 동상도 끌어내렸을 터인데(나의 과도한 생각인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대통령 동상: 터커 홀(Tucker Hall) 앞에 설치


이 대학 캠퍼스를 둘러보다가 넓은 잔디 공간이 펼쳐져 있는 선큰 가든(Sunken Garden)이 인상적이었다. 약간 아래로 내려앉은 넓은 잔디밭이 자유로운 대학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이곳에서 학교의 주요 행사가 치러지기도 하고 학생들은 쉬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한다.

선큰 가든을 보는데 스탠퍼드 대학의 오발 정원(The Oval)이 생각났다. 두 곳 모두 대학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해당 대학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다만 선큰 가든은 영국식 정형 정원의 영향을 받아 좁고 길쭉한 형태에다 약간 폐쇄적인 분위기라고 하면 오발 정원은 훨씬 개방적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아무튼 대학 내에 이렇게 넓은 잔디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부러웠다.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의 중심부에 자리한 잔디 정원 선컨 가든(Sunken Garden)


캠퍼스를 지나가는데 커다란 태산목 나무 아래서 학생 십여 명이 앉아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였다. 야외 수업인 모양이었다. 자유로운 그 모습을 보는데 왜 내 마음이 울컥 부러웠는지 몰랐다. 내가 근무했던 대학의 캠퍼스는 이보다 훨씬 조촐했지만 학생들과 함께하던 그 순간이 그리움으로 불쑥 튀어나왔는가 보았다. 이 대학의 체계적인 리버럴 아츠 프로그램이 유명하다고 하더니 학생들은 지금 미국 사회의 상식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수업 중인 학생들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서

다음으로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로 갔다. 이 오래된 신도시는 윌리엄 앤 메리 대학과 바로 이웃하고 있었다. 현재의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Colonial Williamsburg)의 모습을 보고 과거 제임스타운에서 이전해 지은 신도시 윌리엄스버그를 연상하는 것은 어쩌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대규모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의 결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윌리엄스버그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한 민속촌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냥 어설픈 민속촌을 만들지 않았다. 미국 최대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훌륭한 야외 박물관을 재현해 내었다.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는 그런 곳이었다.


윌리엄스버그 살리기 프로젝트는 윌리엄 굿윈(Rev.W.A.R.Goodwin)에 의해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브루턴 교구의 목사이자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의 교수이기도 했던 굿윈은 윌리엄스버그의 역사적 건물들이 점차 훼손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였다.

굿윈 목사는 미국의 거부였던 존 D. 록펠러 주니어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굿원의 뜻에 공감한 록펠러는 1926년부터 이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통 큰 기부자답게 록펠러는 건물의 복원뿐만 아니라 18세기 윌리엄스버그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의지로 고고학, 문서사본, 건축자료 등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원래 건물이 남아있는 경우에는 보수 및 복원을 하고 사라진 건물의 경우에는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정확하게 재건축하였다.

그리하여 아래의 모습으로 거리 및 건물이 복원되었다.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의 재현 모습


대표적 건물로는 총독관저(Gavernor's Palace), 주 의사당(Capitol), 브루턴 교회(Bruton Parish Church), 타번, 호텔 등이 있고 상점, 학교, 일반 주택 등도 정밀하게 재현되었다.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버지니아 식민지는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가 경영하는 식민지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 식민사업의 어려움으로 회사가 곤경에 처하자 영국 정부는 1624년 이 회사를 해산하고 영국 국왕의 직접 통치를 받는 왕령 식민지(Royal Colony)로 만들었다. 따라서 식민지 총독은 대부분 영국 왕실 또는 영국 정부에 의해 임명되어 파견되었고 식민지 총독은 국왕을 대신하는 최고 권력자로서 입법, 사법, 군 통수권, 세금부과와 예산 권한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총독관저는 식민지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분홍색이 도는 붉은 벽돌의 아름다운 이 총독관저(Gavener's Palace)는 미국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라고 한다. 대칭과 균형을 중시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조지안 건축 양식임을 나타낸다.


총독관저(Gavernor's Palace & Garden)


다음으로 중요한 건축물이 의사당(Capitol) 건물이었다.

제임스타운 초기에는 입법기구가 없었으나 정착민의 불만을 수렴하고 식민지 자치를 통해 효율적인 통치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1619년 ‘버지니아 하원(House of Burgesses)’이 설립되었다. 하원의 공식적인 회의 장소가 의사당(capitol)이었다. 수도가 이전될 때 의사당도 윌리엄버그로 이전되었다. 이곳은 북미 최초의 대표민주주의 기관으로서 선출된 대표들이 식민지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총독과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였다.

이곳에서 영국의 세금정책에 대한 저항이 공식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이곳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Give me liverty, or give me dearh!)”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여 영국의 인지세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이끌었다. 나중에는 이곳에서 버지니아 권리장전이 선언되어 훗날 미국 권리장전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의사당이 총독관저에서 가장 떨어진 안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통치자와 민의를 대변하는 입법기관의 반목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하였다.


주 의사당(Capitol)


총독관저에서 직선거리로 내려오다 보면 브루턴 페리쉬 교회(Bruton Parish Church)가 있다. 1674년에 설립된 이 교회는 처음에는 조촐한 목조 예배당이었으나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1711년부터 벽돌로 된 현재의 건물을 착공하여 1715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버지니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성공회 교회 중 하나로 윌리엄스버그의 중심에서 종교적, 사회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패트릭 핸리 등 식민지 지도자들이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의자에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점이었다.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저 16번 좌석에 앉아 예배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일까 잠시 마음이 설레기도 하였다.


브루톤 페리쉬 교회(Bruton Parish Church)


교회 뜰에는 당시 명멸했던 영웅들이 무덤 아래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야말로 인걸은 간 데 없고 고요한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교회 뜰의 무덤들: 식민지 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의 상업거리에는 갤러리, 극장, 양조장, 서점 등을 위시하여 18세기 모습 그대로 운영되는 상점들이 50여 곳이 있었다.


윌리엄스버그의 상업 거리


이 상업거리에 토마스 제퍼슨의 동상이 있었다. 그는 미 독립선언문을 쓸 때처럼 손에 펜을 들고 친근한 미소를 띠며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헬렌이 그의 팔을 붙잡고 포즈를 취하였다.


토마스 제퍼슨 동상 앞에서


도시의 외곽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시하여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묵었다는 윌리엄스버그 인(Wliilamsburg Inn) 호텔이 있었다. 호텔 외부의 전경도 아름다웠지만 내부의 고풍스러우면서도 고급한 인테리어들이 눈길을 끌었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 패널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낸시여사, 처칠과 대처 수상 등 호텔에 머물렀던 귀빈들의 모습이 붙어있었는데, 이는 호텔의 자부심이자 역사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윌리엄스버그 인(Wliilamsburg Inn) 호텔; 섹ㅖ 유명인사들이 이곳에 묵었다는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 외에도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는 18세기의 가정집과 정원, 극장, 타번(선술집) 등 수많은 볼거리가 재현되어 있었고 거리에는 18세기의 의상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이곳이 민속촌임을 환기시켜 주는 모습이었으나 어쨌든 식민지 초기 모습을 만날 수 있어 헬렌과 나는 호기심 넘치게 이 거리를 누볐다. 남편은 너무 피곤하여 오후에는 숙소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만 호기심 충만하여 뛰어다녔으니 여자 중늙은이들의 에너지가 병약한 남편을 압도하는 것 같아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의 거리 모습


복원된 윌리엄스버그는 미국 역사를 멋지게 재현해 낸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일에 미국의 대재벌이 발 벗고 나섰다는 사실도 솔직히 부러웠다.


윌리엄스버그의 식민지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국의 식민지로 남지 않고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결심하였고 실제 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내일 요크타운에 가면 그 흔적을 더 확실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스턴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다시 떠올랐다. 보스턴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싸운 자신들의 선조들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은근히 남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지니아 식민지 사람들의 투쟁도 보스턴 사람들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자유로운 미국 건설의 맹아가 이곳에서도 자라났던 것이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개인들의 이야기들을 이곳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서 들었다.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저녁에는 근처 와이너리 식당에서 버지니아산 와인을 마시며 윌리엄스버그 여행의 소감을 나누었다. 나파밸리와는 비교되지 않았지만 조촐한 이곳 와이너리의 모습이 소박한 버지니아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와이너리에서 버지니아 와인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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