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초의 신대륙 식민지
마침내 제임스타운(Jamestown)에 도착하였다. ‘마침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번 미 동부 여행을 준비하면서 영국 최초의 식민지 제임스타운을 방문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주요 희망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좋은 경치를 보거나 맛난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어디를 가건 그 땅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에 특별히 마음이 쓰인다. 이런 여행기를 쓰면서도 자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를 끄집어 내게 된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미없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으니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내가 딸과 사위를 독려하여 케이프 코드를 간 이유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이주한 청교도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청교도들의 배가 케이프코드에 도착한 것이 1620년이었다. 그런데 제임스타운은 이미 1607년에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였다. 매사추세츠에 닿은 청교도들도 원래는 버지니아 주의 제임스타운이 목적지였지만 폭풍을 만나 우연히 보다 북쪽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여정이 판이하게 갈렸다.
그래서 미국에 가기 전부터 친구에게 제임스타운행(行)을 수차 부탁하였다. 헬렌이 나의 부탁을 들어주어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 요크타운을 둘러보는 2박 3일의 일정을 마련해 두었다.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 요크타운은 오늘날 버지니아 식민지 역사 삼각지를 구성하는 세 곳에 해당한다.
남의 나라 역사에 과도한 관심을 갖는다고 뭐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헬렌은 나의 취향을 나무라지 않고 성의를 다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고 남편도 두 말 않고 아내를 따라나서주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한번 나의 여행 동반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래 지도는 북미 땅에 처음 영국 식민지가 만들어진 장소를 나타낸 것이다. A가 제임스타운이다. 이곳에 1607년 처음으로 버지니아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B가 윌리엄스버그이다. 제임스타운에 있던 버지니아 식민지 정부가 1699년 공식적으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유는 제임스타운이 저지대여서 모기 등의 곤충의 피해가 잦자 고지대에 위치한 새로운 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스버그는 1699~1780년까지 약 80년간 버지니아 식민지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 뒤 1780년 미국독립전쟁 중 수도가 다시 리치먼드(D)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편 C 요크타운은 담배수출기지로 항구가 필요하여 1691년 버지니아 식민지 정부가 설립한 항구도시이다.
제임스타운은 처음에는 제임스타운 요새로 건설되었다가 1616년부터 제임스타운 식민지 거주지로 거듭났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이 윌리엄스버그로 옮겨갈 동안의 83년간 식민지의 수도 역할을 한 곳이다.
그러나 실제 제임스타운에 도착하고 보니 옛날 이곳에 정착하여 삶을 일구려고 처절하게 애썼던 사람들의 흔적은 간 곳이 없었고 Historic Jamestown에 성채 유적이나 교회터, 건물터, 묘지 등이 약간 남아있을 뿐이었다. 내 눈에는 이곳도 역시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 서운함을 달래주기 위하여 실제 유적지 인근에 제임스타운 재현 박물관(Jamestown Settlement)이 세워져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는 실물크기의 요새도 재현되어 있고 모형 선박 3척이 모형 항구에 정박되어 있으며 포우하탄 원주민 마을도 조성되어 있었으며 인터렉티브 박물관에서는 Historic Jamestown에서 발굴된 17세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식민지조성에 관한 해설과 영상 자료 등이 구비되어 당시 생활을 이해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실패한 로어노크 식민지 사업(Roanock Colony, 1585, 1587년)
처음 영국이 북미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던 이유는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멕시코와 페루 지역의 은이 에스파냐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면서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에 자극을 받은 영국은 중국으로 가는 뱃길 개척에 나서는 존 캐벗(John Cabot)을 후원하였다(1497년). 캐벗은 중국으로 가는 항해 길을 발견하지는 못하였지만 북아메리카 동해안을 탐험하여 후일 영국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는 주요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캐벗의 항해는 이후 프랜시스 드레이크, 월터 롤리 등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북미 대륙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영국 정부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584년 탐험가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에게 북미 해안탐사 및 식민지 개척 특허(Royal Patent)를 부여하였다. 롤리 경은 1584년 1차로 약 100명의 정착민을 북미 대륙 동해안에 보냈다. 그곳은 로어노크 섬(Roanock Colony)으로서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롤리 경은 이 땅을 버지니아(virginia)라고 불러 여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의 보급이 지연되면서 극도의 식량부족에 허득이던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의 식량 약탈에 나서게 되고 결국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1년 만에 철수하게 된다.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가 115명의 정착민을 이끌고 다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화이트는 식민지에 필요한 물품의 보급요청을 위해 이듬해 영국으로 귀환했으나 스페인과 영국의 전쟁으로 3년간 식민지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가 3년 뒤인 1590년 식민지로 귀환했을 때 정착지에는 정착민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른바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 사건’이었다. 미국은 현재도 역사적 미스터리로 남은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1607년)
영국은 새로운 식민지 개척 방법을 시도하였다. 식민지 투자 회사를 이용한 식민지 개척 방식이었다. 1604년 버지니아 회사(The Virginia Company)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는 1606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로부터 특허증을 받아 식민지 건설에 나섰다. 이 회사에는 런던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의 두 지부가 있었다.
런던 회사는 신대륙으로 이주할 사람들 144명을 모집하여 존 스미스 선장을 정착민들의 지도자로 하여 1606년 12월 20일 런던을 출발하여 1607년 4월 26일 이곳 체서피크 만에 도착하였다.
제임스타운 세틀먼트에 들어서자 첫 이주자들이 세운 식민지 요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넓지 않은 공간을 에워싸고 목책이 둘러싸고 있었다. 실물 크기의 요새를 재현하였다는 설명이었다.
재현 요새 앞에는 원주민인 포우하탄족의 마을이 재현되어 있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건설할 당시 주변에는 1만 5천여 명의 포우하탄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원주민들의 주거지와 집 안을 둘러보는데 우리나라 신석기 주거지를 둘러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집안에 걸려있는 많은 동물 가죽들이 그들과 백인들 간의 주요 교역품이었음을 나타내는 듯하였다.
목책을 두른 요새 내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놓여있는 대포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대포들은 원주민과 자주 갈등을 일으켰던 당시의 긴장된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요새 도시는 마치 우리나라의 읍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듯했다. 목책 내에 여러 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가브너가 살던 집, 일반인들의 집, 선박 건조장, 철공소, 창고 등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건물들이 세워졌던 것 같았다.
그중 가장 커다란 건물은 교회였다. 이 교회에서 정착민들은 예배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모임도, 중요한 결정도 이곳에서 행했다고 한다. 정면에 1609년을 나타내는 영국식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첫 이주민의 항해 경로도가 제임스타운 세틀먼트 박물관에 표시되어 있었다. 4개월의 항해 끝에 이주자들이 이곳 체서피크 만에 도착했을 때 40명이 사망하였고 104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첫 이주자들이 타고 온 세 척의 배의 실물모형이 제임스 강 모형 부두에 재현되어 있었다. 수전 콘스턴트 (Susan Constant) 호(號)와 갓스피드(Godspeed) 호(號), 디스커버리(Discovery) 호(號)가 그것이었다. 우리는 갓스피드(Godspeed) 호(號)에 승선하여 당시 이민자들의 기분을 잠시 느껴보려고 하였다.
이렇게 재현 Settkement의 풍경은 깨끗하고 아름다웠지만 실제 제임스타운의 초기 이민자들의 삶은 로어노크 식민지처럼 가혹했다고 한다. 제임스타운은 거주지로서 매우 불리했다고 전한다. 우선 지대가 낮고 습하여 모기 같은 해충이 득실거렸고 농사에도 불리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인근에는 막강한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식량부족과 인디언들의 위협과 본국으로부터의 보급품 부족이 항시 이주민들을 괴롭혔다. 1607년 5월 이 땅에 처음 도착한 정착민 104명 중 그해 9월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초기 정착의 어려움을 상징한다.
런던회사는 식민지 개척 성공을 위하여 영국에서 계속 식민지 거주민을 리쿠르트 하였고 1608년에는 폴란드 인과 네덜란드 인들을 식민지로 데려왔다. 1619년에는 90명의 여성을 싣고 와 정착을 장려했고 흑인 노예들도 제임스타운으로 끌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억척스럽게 현지에 뿌리를 내렸다. 인디언으로부터 배운 담배라는 새로운 작물이 그들의 희망이 되었다. 존 롤프가 트리니다드에서 달콤한 담배씨를 여러 종 가져와 제임스 강가에 담배 농장을 만들었다. 담배 경작은 이들에게 중요한 소득원이 되어주었다.
포카혼타스와 존 롤프의 사랑
앞에서 버지니아 일대에 살고 있던 인디언부족이 포우하탄족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약 30개 부족, 1만 5천 명 이상이 거주했다고 하니 꽤 큰 인디언 집단이었다. 초기에 식량이 부족했던 개척민들은 원주민들과 무역을 통해 옥수수 등 식량을 확보했으나 개척민들의 지도자였던 존 스미스가 화약사고로 중대한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귀국(1609년 10월경)하고 나자 식민지 내 지도력이 붕괴되면서 원주민들과의 무역도 중단되고 무력충돌이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담배산업이 흥행하면서 개척민들이 인디언의 땅을 침범하게 되자 포우하탄 족은 정착민을 포위하고 식량공급을 차단하였다. 이일로 1609년~1610년 겨울 사이에 개척민 약 80%가 사망하였다.
1607년 존 스미스가 포우하탄 족에 포로로 잡혀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족장의 딸인 포카혼타스가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그의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포카혼타스가 존 스미스를 사랑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포카혼타스는 10~12세 정도였고 스미스는 약 27세였으니 실제적인 로맨스의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포카혼타스라는 원주민 말은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라고 하니 활달하고 자유로운 성격을 가졌던 인디언 소녀가 백인 지도자에게 연정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포카혼타스는 자주 제임스타운을 방문하면서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포우하탄족과의 소통 통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존 스미스가 화약 폭발사고를 당해 본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 그녀는 영국인 담배 재배자 존 롤프와 결혼하였다(1614년). 이 결혼으로 인해 양측의 긴장이 일시적으로 완화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디즈니의 만화영화 <포카혼타스>로 아름답게 각색되었다.
식민지 정착을 위해 새 이주민들의 유입을 노리던 버지니아회사는 존 롤프와 포카혼타스를 런던 시가행진까지 시키며(1616년) 영국인들에게 식민지로의 환상을 자극하였다. 다음 해 포카혼타스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병에 걸려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죽어 영국땅에 묻혔다.
제임스타운 요새는 1619년, 제임스 타운으로 전환되었다. 담배농사가 번성하면서 식민지에서 일할 인력이 태부족이었다. 회사는 1619년 처음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버지니아로 끌고 왔다. 그들이 농장을 확대해 나가자 인디언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포우하탄에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하면서 1622년 인디언들이 대반란을 일으켜 개척민 약 350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생겼다, 영국 측은 대규모 반격을 가해 1644년에는 포우하탄 연맹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많은 인디언들이 서부로 도망가거나 유럽에서 들어온 천연두로 죽어갔다.
1699년 수도가 제임스 타운에서 오늘날의 윌리엄스버그로 이전되면서 이후 정착지로서의 기능은 중지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렇게 유적지만 남아 있다.
제임스타운이 담배농사로 돈을 벌게 되자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 이후 약 백여 년 동안 많은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동남부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타운과 이후 그 근처에 건설된 식민지의 대부분은 담배와 면 재배를 위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정착되었으므로 점차 노예사용 문제로 북부 미국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북부의 플리머스 식민지는 대구를 기반으로 산업화의 길을 착실히 밟아갔다. 이것이 남북전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미국인들은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을 필그림 파더라고 부르며 그들의 진정한 조상으로 여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진실을 이야기하면 버지니아에 정착하여 제임스타운을 일군 사람들이 진짜 첫 정착민들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비록 비천하였고, 청교도의 나라 건설이라는 거룩한 뜻을 품고 이주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낯선 땅에 건너와 새 삶의 기틀을 세우려고 무지무지 애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뿌린 씨로 인해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커다란 나무가 자랐다.
제임스타운을 방문하여 이곳에서 명멸해 갔던 수많은 초기 개척민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밀었던 그들의 최초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미국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지의 세계로 과감하게 발을 내미는 모습이야말로 인류의 발전을 이룬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름 모를 십자가 무덤 앞에서 그들의 영의 평안을 위해 잠시 기도하였다.
제임스타운을 거쳐 헬렌이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에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윌리엄스버그로 가기 위해서였다. 숙소는 제임스타운 섬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Colonial National Park Way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간 한적한 곳에 있었다.
주인이 관리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듯, 숙소는 깨끗하였고 주방시설도 훌륭하였다. 헬렌은 주방에 비치된 물품들을 꺼내보면서 “아이고! 이런 싸구려를 갖다 놓었네. 난 이런 싸구려는 안 먹는다야” 라며 재빨리 평가하였다.
헬렌과 함께 열흘을 지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싸구려’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에어비앤비의 어디를 가건 “이건 품질이 좋은 것이고, 이건 싸구려야”라고 말하였다. 나는 ‘싸구려’라는 말을 거의 써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녀가 음식을 대할 때마다 ‘싸구려’라고 평가하니 그녀의 음식 취향이 까다롭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가 이 ‘싸구려’ 평가를 많이 하여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나로서는 심기가 불편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헬렌은 주방에서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샌드위치를 만든다고 부산을 떨었고 피곤한 남편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소파에 파묻혀 숙소에 비치되어 있는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 관한 도록을 펼쳤다. 이 집에는 윌리엄스버그에 관련된 다양한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이틀 동안 윌리엄스버그에 관련된 역사를 가급적 많이 읽어보고 싶다고 욕심을 내어보았다.
헬렌이 심사숙고하여 훌륭한 숙소를 구한 것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