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의 주도 여행
버지니아주의 주도(州都)인 리치먼드(Richmond)에 들렀다. 우리는 제임스타운과 요크타운을 찾아 여행을 나서는 길이었다. 제임스타운(James Town)은 영국이 최초로 만든 식민도시이고 요크타운(York Town)은 미국독립전쟁에서 미국 측이 영국군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전고를 울린 곳이다. 나는 특히 제임스타운을 가보고 싶어 했으므로 헬렌은 나를 위해 버지니아 남부로 가는 여행 계획을 세웠고 남편은 꼼짝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우리의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남편은 지치고 힘들어하였다.
제임스타운이 제임스 강 가에 세워졌다면 요크타운은 요크 강 가의 도시이다. 이 두 강이 리치먼드를 포위하듯 감싸며 동으로 흐른다. 제임스타운에 처음 정착한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후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제임스강을 따라 점점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리치먼드가 세워졌으므로 미 식민개척사를 이해하려면 리치먼드를 거쳐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리치먼드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의 주도(州都)이기도 하고,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수도이기도 하여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여행한다면 꼭 한번 들러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헬렌이 리치먼드행에 대해 극히 염려하는 것 같았다. 리치먼드는 흑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치안이 아주 나쁜 도시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한국 같은 안전한 나라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미국인들이 도시의 안전도에 예민해하는 이유를 실감하지 못하였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여간 경계가 심하지 않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버지니아라고 하면 뭔가 낭만이 있는 주(州)인 듯이 여겨졌었는데 (아마도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라는 노래 때문인듯하다. 존 덴버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고향은 버지니아가 아니라 웨스트 버지니아였다) 버지니아의 대도시들이 거의 다 위험지역이라고 하니 참으로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흑인에 있다고 하였다. 노예해방이 일어난 지가 200년이 가까워오건만 아직도 흑인 문제가 미국사회의 골치라니 이 문제는 미국의 업보처럼도 여겨졌다.
우리가 리치먼드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일요일 비교적 이른 시간에 우리는 팔스처치(Falls Church)에 있는 호텔을 출발했다. 남편은 이미 지쳐 그전 날은 혼자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였고 나와 헬렌만 워싱턴 D.C. 구경에 나섰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여행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I 95 S 국도를 따라 2시간여를 운전하여 리치먼드에 도착하였다. 내가 핸들을 잡았는데, 길이 좋았고 차도 많지 않아 생각보다 리치먼드로 가는 길이 힘들지 않았다.
일요일 오전이기는 했지만 리치먼드 거리는 기괴할 정도로 사람이 없어 마치 죽은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파로 넘치는 뉴욕이나 매사추세츠의 주도인 보스턴이나 펜실베이니아의 주도인 윌리엄스버그와는 완전 딴판의 분위기였다. 미 동부연안을 따라 남부로 약간 내려왔을 뿐인데 이렇게나 분위기가 다르다니 놀라웠다. 헬렌은 시 청사 근처의 공용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하면서도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하였다. 공용주차장은 상당히 넓었는데 주차한 차가 우리 차를 제외하고는 두어 대 밖에 없어 설렁하게 보였다.
우리는 버지니아 주 의사당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리치먼드의 메인 스폿이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가톨릭 대성당이 먼저 눈에 띄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Catholic Church)이었다. 설명 문에 의하면 이 성당은 리치먼드에 세워진 첫 번째 대성당이라고 한다(1834년). 가톨릭신자가 많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를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한참 미사 중이어서 얼른 나왔다.
대성당 옆에는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St. Paul's Episcopal Church)가 가톨릭 카테드럴(cathedral) 보다 더 멋지게 서있었다. 두 건물 모두 흰색 건물에 그리스식 신전 모양의 기둥이 인상적이었는데 가톨릭 교회의 기둥이 네 개라면 성공회의 기둥은 여덟 개나 되었다. 두 건물이 마치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윌리엄스버그의 역사 거리에도 가톨릭 카테드랄과 성공회 교회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이것이 1800년대 식민지 개척시대의 종교적 힘겨루기였는지도 몰랐다.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는 1845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버지니아 주 의사당 근처에 있어서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그중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가 이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던 중 리치먼드가 북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예배를 중단하고 자리를 떴다고 하는 사건이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일요일 오전 시간은 미국인들 대부분이 교회나 성당에서 종교예식에 참여하기 때문에 도시에 인적하나 없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영화에서는 흑인들이 깨끗한 하얀 옷을 입고 주일 미사에 나서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아직도 이곳에는 그런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자 상상해 보았다.
구시청과 주 청사 앞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인적이 없었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 몇이 시청사 근처를 지나갈 뿐이었다. 중국인들의 세계를 향해 폭발하는 에너지를 느꼈다.
버지니아 주 의사당 구역(Capitol Area)의 광장에는 죠지 워싱턴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1858년에 제작된 이 기념탑에는 기마상의 조지 워싱턴의 청동상이 있고 워싱턴의 아래에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버지니아 출신의 저명한 인물 여섯 명, 즉 토머스 제퍼슨, 패트릭 헨리, 앤드류 루이스, 존 마셜, 조지 메이슨, 그리고 토머스 넬슨 주니어 등의 동상이 서있었다. 오른편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이 미국의 독립을 논의한 1775년의 버지니아 식민지회의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패트릭 헨리이다. 그는 이후 초대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국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만들었고 두 번째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하였다. 앤드류 루이스는 프랑스-인디언 전쟁 중 버지니아 민병대의 대장이었고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준장으로 참전하였다. 존 마셜은 미국 4대 국무장관과 연방대법원장을 역임하였고 조지 메이슨은 미국 권리장전의 기본인 <버지니아 권리 장전>을 초안한 사람이며 토머스 넬슨 주니어는 조지 워싱턴의 동료로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고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에 기여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버지니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미독립운동과 국가제건 운동을 활발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아래층에는 도끼를 휘두르는 식민지 시대, 장부를 휘두르는 ‘재정’ 식민지 시대, 부러진 족쇄를 가진 ‘독립’ 식민지 시대, 칼을 휘두르는 ‘권리장전’ 식민지 시대, 그리고 칼을 휘두르며 왕관을 짓밟는 ‘혁명’ 식민지 시대의 사상을 나타내는 여섯 명의 뮤즈가 묘사되어 있다.
이 뒤로 보이는 멋진 고딕양식의 건물이 구 시청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모양의 결혼식장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구 시청 옆에 버지니아 주지사 관저가 있었다. 설명문에 의하면 이 건물은 보스턴의 유명한 건축가 알렉산더 패리스(Alexander Parris)가 설계하여 1813년에 지어진 버지니아 연방 스타일의 관저라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저로서 지금도 버지니아주지사가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버지니아 랜드마크와 국가사적지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저택 옆에 설치되어 있는 패널처럼 버지니아에는 역사 사적지를 나타내는 보드가 자주 눈에 띄었다. 역사를 알리고 지켜가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곧 리치먼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 의사당의 어마어마한 모습이 드러났다. 토마스 제퍼슨이 설계를 맡은 유명한 건축물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제2대 버지니아 주지사를 맡았는데 1780년, 주도(State Capital)를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로 옮겼다. 프랑스대사로 프랑스에 가 있던 제퍼슨은 고대 로마 건축 양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니므(Nimes)에 있는 고대 로마 신전인 메종 카레(Maison Carree)를 본떠서 리치먼드 주의사당 디자인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제퍼슨은 직접 설계도 초안을 만들고 프랑스인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최종안을 완성했는데 이 도안에 기초하여 1785년에 공사가 시작됐고 1788년에 완공된 건물이 현재의 이 건물이라는 것이다.
뒷날 토마스 제퍼슨의 저택을 방문하여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자기 저택도 직접 설계하였고 버지니아대학도 직접 설계하였다고 한다. 제퍼슨의 취향으로 미국 최초의 로마신전 모양의 주 의사당이 탄생하기는 하였지만 내 눈에는 어쩐지 생뚱맞게 보였다. 한 사람의 주장이 너무 강하면 배가 산으로 오르게 된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주 의사당 안에 들어가 보았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일요일이라 문이 닫게 있었다. 이 의사당 안에 있는 유명한 작품이 조지 워싱턴의 동상이다. 이 동상은 프랑스의 조작가 장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이 만들었는데 이 조각이 특별히 유명한 이유는 조각가가 직접 워싱턴을 만나서 그의 얼굴과 몸 치수를 재고 석고 본을 뜬 다음 조각하여 워싱턴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 조각상이 기본이 되어 조지 워싱턴의 조각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밖에 1861년, 연방탈퇴를 결정한 버지니아의 주 의사당도 역사적인 장소로서 한번 들러보았으면 좋았으련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 아쉬웠다.
2020년 미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리치먼드 시 전체 인구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 비율은 약 45% 정도로 흑인 인구가 리치먼드에서 가장 큰 단일 인종 그룹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리치먼드에 흑인이 많이 살게 된 이유는 이곳이 흑인노예무역의 시발점이어서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시대에 리치먼드는 뉴올리언스 다음으로 큰 남부 최대의 노예 시장이었다. 시내에 있는 쇼코 바텀(Shockoe Bottom) 지역에는 수많은 노예 경매장, 감옥, 거래소가 있었고 연간 수천 명의 흑인들이 이곳에서 거래되었다고 한다. 리치먼드 경제가 담배 산업과 함께 노예무역에 크게 의존하였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에 버지니아는 남북전쟁 시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북전쟁 시에는 이곳이 남부연합(Confederacy)의 수도로서 노예제 옹호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런 역사성으로 인해 흑인 공동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강하게 뿌리를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남북전쟁 이후에도 심각한 인종 분리와 차별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리치먼드는 20세기 중반 이래 시민권 운동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시민이 된 흑인들은 평등하게 교육받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그들은 보이콧, 연좌농성, 거리 시위 등을 통해 평등권을 요구했다. 민권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것이다.
리치먼드에서 과거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쇼코 바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주 의사당 구역에도 버지니아 시민권리를 주장한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다.
식민시대의 초기에는 흑인만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전국적으로 인정된 것은 1920년대였다. 그런데 리치먼드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1909년 버지니아 여성참정권협회(Virginia Suffrage Association)가 조직되었고 버지니아 여성평등권협회(Equal Suffrage League of Virginia)가 결성되어 여성 참정권을 위한 교육, 연설, 캠페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버지니아 같은 남부 주들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저행을 받았다. 결국 1920년 미국 연방정부가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했지만 버지니아주는 1952년에야 공식적으로 이를 비준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여성 참정권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화된 것을 보면 버지니아는 우리나라보다도 더 늦은 시기에 참정권이 허락된 셈이었다. 흑인여성들은 이보다 훨씬 더 긴 싸움을 하여야 했다.
여성들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성인권운동기념물이 이 광장에 세워져 있는 모습이 결코 낯선 모습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리치먼드의 주 의사당 광장에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외침이 가득 서려있는 것 같았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외침과 흑인 노예의 인권을 위한 외침과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외침 등이 이 광장에 가득 서려있는 듯하였다. 자유와 평등을 위한 긴 투쟁의 무대가 리치먼드였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피 끓는 투쟁을 통해 미국이 자유 평등의 나라로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인류는 언제쯤 인종을 떠나서, 피부색을 떠나서, 남녀를 떠나서 그저 같은 인류로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리치먼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