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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요크타운: 미국 독립이 완성된 곳

요크타운의 바닷가에서

by 보현


요크타운(Yorktown)으로 갔다.

요크타운은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와 더불어 버지니아 식민지 역사 삼각지(Historic Triangle)를 구성하는 한 곳에 해당한다. 제임스타운에서 윌리엄스버그를 거쳐 이곳까지의 약 23마일을 콜로니얼 파크웨이(Colonial Parkway)가 연결해주고 있었다.


요크타운은 원래 버지니아 식민지 정부가 담배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개발한 곳이지만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독립을 이룬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식민지 정부는 영국으로의 담배 수출을 위한 항구가 필요하였다. 제임스타운 앞에 제임스 강(James River)이 있었지만 습지여서 대형선박이 접안하기에 적절한 깊이와 넓이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택된 곳이 요크타운이었다. 요크 강(York River)은 수심이 깊고 넓어 대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데다가 지형이 건조하고 견고하였다. 게다가 수도를 윌리엄스버그로 옮기고 난 뒤로는 행정적, 군사적 연결도 용이하였다. 이런 여러 이점 때문에 요크타운이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이곳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사실상 미국의 독립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요크타운은 담배 수출항으로서의 이미지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 승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길래 그 역사적 현장을 보기 위하여 요크타운으로 왔다.


버지니아 식민지와 담배

여러 번 강조하고 있지만 식민지 시대의 담배 생산과 수출은 버지니아 경제의 핵심이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담배라는 황금작물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존 롤프(John Rolfe: 포카혼타스와 결혼하는 그 사람이다)라는 사람의 우연한 노력의 결과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남미의 식민지에서 대량의 금은을 탈취할 수 있었다. 이에 영국도 북미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금은을 발견하여 에스파니아식 부의 축적을 목표로 하였다. 하지만 북미에는 황금을 가진 토착 세력도, 포토시 같은 은광산도 없었다.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과 기아와 원주민과의 충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북미에서의 초기 영국 식민지 개척은 매우 불안정하게 시작되었다.


존 롤프는 1609년 제임스타운으로 향하던 중 배가 난파되어 스페인령 버뮤다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는 스페인이 식민지에서 재배하던 고급 담배 품종(Nicotiana tabacum)이 있었다. 이 식물의 값어치를 잘 알고 있던 스페인은 담배 씨앗의 외부 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역시 담배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롤프는 몰래 씨앗을 빼내었다. 그가 제임스 타운에 도착한 것이 1610년이었다. 정착민들이 기아와 낯선 환경과 인디언들의 공격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을 때였다.

롤프가 가져온 담배 씨앗은 제임스타운에서 성공적으로 자랐다. 존 롤프의 담배는 순하고 향이 부드러워 유럽 시장에서 대환영을 받았다. 식민지 정착민들은 마침내 누런 황금 대신 담배라는 푸른 황금(green gold)을 찾았다


버지니아 식민지는 1613년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으로 담배 수출을 시작하였다. 초기인 1617년에 2만 파운드, 1619년에 5만 파운드를 수출하던 담배는 1750년 경이되면 연간 4천만~5천만 파운드가, 1770년대에 들어 6천만 파운드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시장으로 수출되었다.

요크타운의 강가에는 담배수출과 관련된 패널이 세워져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버지니아에서 수출되는 모든 담배는 공공검사창고에서 관리들의 검사를 받아야 했고, 최소한의 품질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담배는 즉시 파괴되었다고 적혀있었다. 이곳의 식민지 정착민들이 담배 수출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수출용 담배의 품질을 검사하던 모습


담배재배로 막대한 수익이 버지니아 식민지로 흘러들어오게 되자 식민지 정부의 정착기반이 급격하게 정비되어 나갔다. 이로 인해 플랜테이션 체제가 본격화되고 아프리카 노예 수입이 확대되었으며 토지를 차지하려는 정착민들의 욕심이 원주민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인간 탐욕에 기반한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버지니아 의회(1619)가 만들어지고 대학이 건설되는 등 식민지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행정적 문화적 기반도 확립되어 갔다.

한 사람의 혜안을 가진 식물도둑(?)으로 인해 소멸될 뻔했던 버지니아 식민지가 살아났고 영국의 식민지 개척 의지가 살아났다. 이것이 후일 남북의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담배무역을 둘러싼 영국정부와 식민지간의 세금 수익을 향한 조세 저항(예 스탬프 법)으로 결국 독립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역사의 인과는 끝없이 반복되는 것 같다.


요크타운의 강가에 세워져 있는 또 다른 패널 글은 흑인노예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선조들을 기억하자’라는 제목이어서 나는 이곳에 첫 정착한 식민지 정착민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난 350년 동안 대서양을 건넌 노예의 전체 인원은 약 1,200만 명에 해당했고 그중 최소 50만 명이 1619~1860년 사이에 미국에 도착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이들이 제공한 노동력이 신생 식민지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시인하고 있었다. 이렇게 요크타운 항구는 해외 무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식민지로 들어온 아프리카 노예들의 주요 입국 항구였음도 적시하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사실을 밝히고 그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자세를 평가하기로 하였다.




담배의 출현

담배는 본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식물이었다.

원주민들은 이 식물의 약리효능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담배를 재배하여 의례, 약용, 기호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처음 조우한 담배는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서 원주민(타이노족)들을 만나면서였다. 그들은 말린 담배 잎을 파이프에 넣고 피우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의 원주민들이 피우는 담배를 유럽에 소개하였다.

담배를 본격적으로 유럽에 가져간 사람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원들이었다(1500년대). 스페인 의사들은 담배를 치료제(두통, 위장병)로 소개하였다. 1550년대 포르투갈 대사로 프랑스에 있던 장 니코(Jean Nicot)가 흡연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자 프랑스 왕실에서 담배가 유행하였다. 담배 성분인 니코틴(nicotin)은 장 니코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영국에는 담배와 흡연문화가 1560년대 후반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담배가 신세계로부터 건너온 새로운 유행작물로 소개되자 1580년대 후반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이 남미에서 담배를 유럽으로 다시 들여왔고 월터 롤리가 영국 내 흡연을 유행시켰다.

17세기 초가 되자 유럽 귀족과 상류층 사이에 담배는 사치품이자 약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는 귀족층의 고급 소비재였던 담배가 대중으로 퍼져나가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 담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유럽지역에서 담배수요가 늘어나자 스페인은 카리브, 남미, 플로리다 식민지에서 담배 재배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통해 담배를 재배하고 아프리카, 인도, 일본 등 아시아로 전파하였다.

이렇게 제임스타운이 설립되기 50~100년 전부터 담배는 이미 유럽 주요 상업작물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초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여러 야생종 담배를 기후에 맞게 자연교배와 선택 육종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스페인이 버뮤다지역에서 재배하던 고급 담배는 안데스산맥에서 자라던 야생종의 자연교잡으로 탄생한 Nicotiana tabacum이었다. 이 담배는 니코틴 함량이 낮고 향이 좋고 맛이 부드러워 인기가 있었다. 오늘날 흡연용 담배 재배 품종이 Nicotiana tabacum이다. 이 외에도 멕시코 및 남미 북부에서 재배되던 담배인 Nicotiana rustica는 니코틴 함량이 높고 맛이 거칠어 유럽지역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제임스타운이 세워진 1607년 경, 버지니아 원주민들도 담배를 재배하여 피우고 있었다. 초기 정착민들도 원주민들을 통해 토착품종의 담배 재배법을 일부 익혔다. 하지만 이 담배는 너무 쓰고 맛이 강하여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존 랄프가 영국인들의 기호에 딱 맞는 새로운 품종을 제임스타운에 들여왔고 이 담배로 인해 버지니아 식민지는 살아나게 되었다.


요크타운 강가에서

요크타운의 전장을 지나 전장 비지터 센터(Battlefield Visitor Center) 앞에 차를 세웠다. 미국을 여행하며 느낀 것이지만 어디에서건 방문자 센터가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지역의 특성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비지터 센터를 찾아가면 입장티켓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방문지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매우 유용하고 안심이 되었다.

이곳도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지역임을 나타내는 NPS(National Park Service) 표지판이 걸려있었다. 아래로는 대포가 하나 놓여있고 Colonial National Historic Park Yorktown Battlefield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역시 식민지 국립역사공원(Colonial National Historic Park )이라는 의미와 요크타운 전장(Yorktown Battlefield)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크타운 전장 비지터 센터 앞


비지터 센터를 지나 경사진 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면 눈앞에 툭트인 강이 나타나고 요크 강기슭의 모래톱에 역사적 요크 타운이 나타났다. 몇 개의 작은 상점과 레스토랑, 공원, 호텔, 부두가 위치해 있고,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저 바다와 강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이 끌려오고 그들의 노동으로 재배하고 건조한 담배들이 이 항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고 막대한 자금이 이 항구로 흘러들고... 눈앞의 이 강은 인간의 욕망과 눈물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요크 항 전경


헬렌과 강가에 서서 강물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새털구름이 경쾌하게 떠 있었다.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요크타운 강가에서


바닷가에는 이곳의 배경을 설명하는 패널들이 쭉 세워져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의 성지

요크타운은 미국독립전쟁에서 결정적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다.

요크타운은 버지니아 해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대서양으로 빠르게 진출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미국과의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영국군은 이곳을 해상 보급 및 병참기지로 삼기로 하였다. 영국군 지휘관 찰스 콘월리스(Lord Cornwallis) 장군은 요크타운에 병력을 집중시켰다(1781년). 그는 요크타운을 해상 탈출구가 있는 안전한 방어기지로 판단하였다.

조지 워싱턴 장군과 프랑스의 로생보( Rochambeau) 총사령관은 그 정보를 입수하자 북쪽에 있는 군대를 움직여 요크타운으로 향했다.


여기서 프랑스의 로생보 총사령관이 조지 워싱턴과 합동작전을 펼친 이유는 미국 독립운동에 프랑스가 적극 협력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참전이 미 독립전쟁의 승리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과의 7년 전쟁에 패하여 캐나다와 인도, 서인도제도 일부 식민지를 상실하였다. 영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프랑스는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국의 독립을 돕기로 하였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 벤저민 프랭클린을 파리에 외교관으로 파견하였다(1776년 ). 그는 프랑스 대중과 귀족 사회의 인기를 끌며 프랑스를 미국 편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조지 워싱턴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밀리자 프랑스는 직접 참전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라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이 영국군을 크게 물리치자 프랑스는 미국에 승산이 있다고 보고 1778년 2월 미국과 공식 동맹을 체결하고 군사적 참전과 무기,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대서양과 카리브해에서 영국 해군을 견제하였고 로생보 총사령관이 약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국 땅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요크타운에서 미국군과 협력하여 영국 포위전을 펼쳤다.

7년 전쟁으로 플로리다를 빼앗긴 스페인도 영국에 이를 갈다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네덜란드는 미국과의 비밀 무역을 통해 화약, 무기 등을 공급하였다. 1780년 영국이 네덜란드 상선을 나포하고 전쟁을 선포하자 네덜란드는 제4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에 돌입하였다. 네덜란드는 해상에서 영국 상선 및 해군의 부담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 유럽국가들의 참전으로 영국은 전 세계로 전선을 분산해야 하여 미국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요크타운에 결집한 영국군의 보급과 탈출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해상 봉쇄가 꼭 필요하였다. 이에 워싱턴은 프랑스 해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1781년 여름,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생도맹(오늘의 아이티)에 머물고 있던 드 그라스(Francois Joseph Paul de Grasse)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으로 이동하였다. 드 그라세의 프랑스 함대는 체스피크만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격퇴시켰고 체서피크만 입구를 봉쇄하였다. 이로서 영국군의 퇴로와 보급을 완전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28일 요크타운에 도착한 미-프랑스 연합군 약 17,000명은 8,000명의 영국군을 완전 포위하였다. 워싱턴과 프랑스군은 1차 참호선을 구축하고 10월 9일 포병대가 영국 방어선을 향해 본격 포격을 실시하였다. 연합군은 10월 11일 영국군과 불과 수백 미터 거리까지 접근하는 2차 참호선을 구축하고 10월 14일 두 개의 주요 방어진지를 공격하였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보급마저 끊기자 10월 17일 콘윌리스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영국군 8천 명은 무장 해제되었다.


요크타운 강가에는 이날의 전투를 나타내는 패널들도 여러 장 세워져 있었다.

요크타운 전투로



프랑스 해군 제독인 드 그라세에 대한 패널도 세워져 있었다.

프랑스 드 그라세 제독의 업적을 기리는 패널


요크타운 강가 마을에서 마침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마을 축제인듯하였다.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이곳에서 언제 치열한 전쟁이 있었냐는 듯이 평화로이 보였다. 평화는 참으로 귀하다.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이 하루 빨리 무기를 버리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

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요크타운의 마을 축제


요크타운 언덕 높은 곳에 높다랗게 승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 기념비의 꼭대기에는 승리의 여신상이 서 있었다. 이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희생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이 승리비 앞을 오래 서성였다.


요크타운의 승리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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