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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워싱턴 DC에서 뉴욕으로

암트랙 열차를 타고

by 보현


열흘간의 헬렌과의 여행을 끝내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남편과 나는 워싱턴 DC에서 뉴욕으로 가는 암트랙(Amtrak Train)을 타기로 하였다.

며칠간 신세를 진 헬렌의 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헬렌의 집은 워싱턴 DC근교인 매클레인(Mclean)과 타이슨스 코너(Tysons Corner) 사이에 있는 퍼밋 힐즈(Pimmit Hills)에 있었다. 퍼밋 힐즈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이 끝난 후 사회로 복귀한 수백만 명의 퇴역군인들을 위한 주택이 많이 공급된 곳으로 유명하다. 근처에 연방정부나 국방부, 정보기관(CIA 본부) 등이 많이 포진되어 있어 퇴역군인들의 재취업에 유리한 위치였고 당시 주위 토지가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는 이곳에 퇴역군인들을 위한 주택을 대량 공급하였다고 한다. 1950~1958년 사이에 퍼밋 힐스에 공급된 저택이 약 1700 채였다고 하는데 헬렌의 집도 그중의 하나인 듯했다. 참전 군인을 위한 사회 복귀 지원법(GI Bill)이 이들을 위한 주택 공급을 적극 지원하였다고 하니 주택 마련에 전 생애를 걸어야 하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었다.


헬렌의 집은 크기는 작았으나 반 에이커(600여 평) 정도의 대지 위에 있어 넓은 뒤뜰에서 채소나 꽃들을 가드닝 할 수 있었다. 헬렌은 본인이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로 좋아하는 요리도 만들고 뒤뜰에서 키운 꽃들로 거실을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며 이웃 커뮤니티 생활(주로 이민온 한인들이지만)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헬렌을 보며 헬렌이 이곳에서 오래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염원하였다.

헬렌의 집 앞에서


나이 든 젊잖게 생긴 흑인 운전기사가 모는 우버택시가 도착하였다. 나는 헬렌과 포옹하고 택시에 올랐다. 아침 햇살이 워싱턴 DC의 상징인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 위를 비추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워싱턴 기념탑


워싱턴 D.C를 다시 보고

현재의 워싱턴 D.C. 의 가로를 바라보면서 예전에 내가 보았던 워싱턴 D.C. 를 떠올려 보게 되었다.


딸은 우리가 워싱턴 D.C. 에 머문다고 하니 D.C. 는 잘 있는지 안부를 물어왔다. 그 물음에 그리움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대학을 이곳에서 다닌 딸에게는 특별히 대학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을 터였다. 딸의 입학과 졸업식에 D.C. 를 다녀갔던 적이 있었으므로 이곳은 나와 구면인 셈이었다.


이번에 와서 헬렌과 다시 D.C. 구경을 잠깐 했다. 이곳의 상징적인 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내셔널 몰(National Mall)이다. 이곳은 길이 3km, 폭 48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공원으로 중앙에는 워싱턴기념탑, 동쪽에는 국회의사당, 서쪽에 링컨 기념관이 배치되어 있으며 북쪽에 백악관이 위치해 있다.

딸의 대학 졸업식이 이곳 공원에서 거행되었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졸업식에 연사로 초빙되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때는 워싱턴 D.C. 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황홀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번에 헬렌과 다시 내셔날 몰을 가 보았다. 국회의사당 앞의 캐피톨 리플렉팅 풀(Capitol Reflecting Pool) 근처에는 사람과 차들이 몰려와 번잡스러웠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인지 워싱턴 디씨의 거리는 예전에 내가 보았던 영화 속의 도시 같은 깨끗함과 경외감은 들지 않았다. 뭔가 추레해진 느낌이었다. 벌써 20년도 더 전에 보았던 풍경을 현재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해외여행이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내 눈에 미국 수도의 깔끔한 모습이 매혹적으로 보였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건물들에 리모델링이나 수선한다고 어지럽게 팬스가 쳐진 모습이나 거리에 넘치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워싱턴 디씨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내셔날 몰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연간 2400만 명을 넘는다니 감가상각이 어찌 심하게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의회의사당(왼쪽)과 미국 연방 대법원(오른쪽) 앞에서


나는 고요한 택시 안의 공기가 어색해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20여 년 전에 딸이 이곳에서 대학을 다녔었다고 말하고 그때 워싱턴 디씨에 대한 나의 경외감을 이야기하자 나이 든 흑인 기사는 디씨가 예년 같지 않다고 하며 나의 의견을 거들었다. 무엇보다 흑인들이 많이 유입됨으로써 도시의 품격이 많이 훼손되었고 치안이 나빠졌다고 하면서 우버 택시 기사는 탄식을 하였다. 나는 같은 흑인이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기는 했으나 어디에서건 흑인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드디어 유니언 역(Union Station)에 도착하였다. 이 역은 북동부회랑(Northeast Corridor)의 남쪽 종착역이며 미국에서 가장 분주한 여객 철도 노선이라고 한다.

과연 역사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뉴욕으로 가는 암트랙의 Northeast Regional 노선의 줄이 가장 길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워싱턴 디씨의 유니언 역


암트랙을 타고 뉴욕으로

미국의 철도는 우리와 달리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악명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걱정하였다. 그러나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하였고 예정대로 3시간 반 후 뉴욕의 펜실베이니아 역에 도착하였다.

처음의 긴 줄과는 달리 기차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각자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암트랙이 지나가는 미국 동부의 도시들을 바라보았다.


도중에 검표원이 지나갔다. 아직도 표를 받아 펀치하는 모습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승객들의 흥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과거로 돌아간듯한 여유로움을 느꼈다. 캘리포니아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열차를 이용했을 때도 검표원이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났다. 이것은 어쩌면 취업 기회를 주기 위해 유지하는 시스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표원이 검표를 하고 있다.


워싱턴 DC의 유니언역을 출발한 기차는 메릴랜드의 New Carrollton, BWI Thurgood Marshall, Baltimore와 델라웨어의 Wilmington, 펜실베이니아의 William H Gray 3, 30th Street Station, 뉴저지의 Trenton Transit Center, Newark를 거쳐 뉴욕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3시간 30분의 기차 여행으로 워싱턴 DC를 위시하여 메릴랜드,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까지 무려 여섯 개 주를 지나간다. 이 중 우리가 이번 여행 중 발로 지나가지 못한 곳은 델라웨어 한 곳이었다. 한 달의 여행이지만 열심히 다닌 결과이기도 하거니와 미국 동부지역이 워낙 여러 주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그런지도 몰랐다.


남편은 피곤한지 의자 깊숙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기차가 지나가는 도시를 가름해 보며 차창 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부지런히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건만 가보지 못한 도시들은 여전히 내 마음을 아쉽게 하였다.


헬렌을 만나 버지니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버지니아에 대한 새로운 소견을 갖게 된 것이 이번 여행의 소득으로 여겨졌다.

“보스턴 사람들은 어깨가 한 뼘 올라가 있다”라고들 말한다. 보스턴 사람들의 강한 자부심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이다. 보스턴 사람들이 보스턴을 미국 역사의 중심지로서 “미국은 여기서 시작되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민자들이 건국한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미국으로 여기는 마음과 보스턴 티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 독립혁명의 발상지라는 인식과 함께 하버드, MIT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이 있어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여기는 자부심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버지니아의 역사 사적지를 둘러보면서 버지니아야말로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 진정한 의미에서 “미국은 여기서 시작되었다”라고 여겨야만 하는 곳임을 깨달았다. 현지에서 버지니아 인들의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보스턴식의 지적 자부심과 달리 조용하면서 뿌리 깊은 자부심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미국 최초의 이민사가 시작된 곳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최초의 이민자들은 비록 본국에서의 열악한 경제 환경 때문에 이민의 길을 택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거친 환경과 싸우며 새 삶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제임스타운이라는 식민도시를 세웠고 더 나은 환경을 위하여 윌리엄스 버그로 옮겨갔으며 그 후에는 주도를 리치먼드로 옮기며 도시를 키워나갔다. 윌리엄스 버그에 하버드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인 William & Mary 대학을 설립해 이민 2세대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이곳에서 건국의 주역들을 배출하였다. 담배와 면화를 재배하며 지역 경제를 일으켰고 그 부를 바탕으로 의회를 만들어 자주 정부를 향해 나아갔으며 미국 독립전쟁에 앞장선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위시하여 토마스 제퍼슨(3대), 제임스 매디슨(4대), 제임스 먼로(5대) 등 미국 대통령 8명이 버지니아 출신이었다. 버지니아야말로 “국부들의 어머니(The Mother od Presidents” 주로서 칭송받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는 곳이다. 워싱턴 DC 근교 북버지니아 지역 사람들은 고소득 고학력층이 밀집하여 엘리트의 자부심이 강하다면 남부, 서부 버지니아사람들은 전통, 자연, 가족 중심의 문화에 뿌리 깊은 공동체적 자부심을 가진다고 하였다.

다만 이곳이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중심이 되면서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패배한 것이 이미지 추락에 결정타가 되면서 그전의 영화를 자랑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더 실질적인 문제는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후 흑인들이 이 지역에 많이 살아 동부 북부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범죄율이 높은 것이 문제가 되는지도 모른다.

기차가 볼티모어를 지나갔다.

볼티모어는 미국 메릴랜드의 최대 도시이다. 메릴랜드의 최대 도시이기도 하고 이곳에 존스 홉킨스 대학과 병원이 있어 생명과학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여 이곳을 한번 들러보았으면 했더니 헬렌이 기급을 한다. 볼티모어는 미국 내에서 총기 폭력과 살인율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범죄 집중 지역은 대부분 저소득, 흑인 밀집지역이라고 하니 역시 흑인문제가 문제는 문제인 모양이다.


볼티모어의 Middle East


볼티모어의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은 해상무역의 중요 기점이 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곳의 Inner Harbor는 상징적인 수변지역이라고 하더니 기차에서 보아도 강변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다. 저런 곳에서 범죄율이 높아 도시를 고민에 빠뜨리게 한다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볼티모어의 하버드 그레이스

볼티모어를 지나면서 나는 헬렌이 싸준 샌드위치를 점심 삼아 먹었고 남편은 사위가 선물한 삼각대를 펼치고 뱃줄식사를 하였다. 헬렌은 그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들(가을이라 채소들이 뻣뻣하고 질겼다)을 넣고 나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남편은 샌드위치를 먹는 나를 보며 “당신 참 잘 먹는다. 질리지도 않고” 하며 놀리는 건지 놀라는 건지 감탄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헬렌과 있을 동안 그녀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질리지도 않고 먹었다. 특별히 맛있었다고 감탄하며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샌드위치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별로 심미안이 없었다. 그냥 때 되어 배가 고파지면 음식을 먹는 무덤덤한 스타일이다. 나에 비해 헬렌은 식품에 대한 기호가 유별났다. 그녀는 “싸구려”라는 말을 자주 쓰며 식품 선택에 엄중을 다하였다.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결의가 대단하였다. 같은 전공을 한 우리건만 역시 음식 선택은 취향이지 학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어디를 가건 어떤 음식이든 잘 먹었다. 그런데 헬렌은 사 먹는 식품에 “싸구려”라는 딱지를 늘 붙였고 식당에 가서도 메인 요리만 먹었지 디저트까지 먹는 나의 습관을 경원시하였다. 우리 가족은 딸과 아들의 영향으로 디저트 먹는 것을 즐긴다. 딸은 늘 “디저트 먹으려고 메인 요리를 먹는다”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헬렌이 얼마나 강하게 나의 저급한 식습관을 지적하였는지 그녀와 식사를 같이 할 때마다 나는 불편을 느꼈다.

그녀는 양로원에 있는 미국 노인들을 자원봉사하러 다니면서 돈 없고 아픈 미국 노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비참한 노년기를 보내지 않기 위해 운동도, 식생활도 바르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나 강한 어조로 매 식사 때마다 “싸구려” 미국 식생활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사실 나는 괴로웠다.


헬렌과 지내면서 나는 그녀가 분노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은 나도 화가 나서 나를 초대한 그녀에게 “너는 난폭해(rude)”라고 내뱉고 말았다. 그녀는 놀라며 자신은 관대하며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즐기며 친절한 사람이라고 극구 변명하였다. 그러나 친절함과 속에 내재된 난폭함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우리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자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받은 스트레스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인정하였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도 그녀에게 가중된 듯하였다. 한마디로 그녀는 자기 인생을 억울하다고 생각하였고 자기를 무시하거나 얕보는 사람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의 그녀와 친밀하게 지내지 않아 그녀 내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노량의 부잣집 딸로 자라 그 옛날에 미국 유학까지 떠난 멋진 친구로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헬렌의 아버지는 폭력적이었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무관심했으며 형제자매들은 만나면 서로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놀랐다.

다만 그녀는 지금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열심히 심리 상담도 하고 유튜브를 통해 명사의 강의도 들으며 보다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친구 헬렌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녀가 계속 정진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행복한 인생을 영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차가 윌밍턴(Wilmington)을 지나갔다. 델라웨어 주(Delaware State)에 속하는 도시이다.

이곳에는 미국 전체 상장기업의 약 60%, 포춘 500대 기업의 약 68%가 등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법인세를 인하해 주고 기업 관련 소송을 전문적으로 신속하게 해결해 주는 법적 시스템이 매력이라고 한다. 이자율 규제 완화로 금융업체가 많이 유치되어 있고 특히 신용카드 산업이 번성 중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유럽계 이민자 커뮤니티와 퀘이커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볼티모어에 가까워서 인지 범죄율이 높아 미국 내 위험 도시 상위권에 속한다고 하였다. 특히 폭력 및 차량 절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니 굳이 이곳에 들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듯하였다.


암트랙에서 바라본 월밍턴 시가


월밍턴을 지나면서도 나는 여전히 헬렌을 생각하였다. 그녀는 미국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동창들에게 사진을 보내고 전화를 걸며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한국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동창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성가셔하거나 의아해한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그 원인을 알았다. 그녀는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였다. 사랑에 배고픈 것이다.

또한 그녀는 미국에서 노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읽혔다. 그래서 그녀는 탐색 삼아 한국 방문을 늘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자유분방한 자신의 삶이 이곳에서 위축되는 것 같은 느낌에 실망하는 것 같았고 친구들과의 우정도 가족 간의 우애도 회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안타까워 그녀를 위해 몇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많은 장점을 가졌고 자녀 둘을 훌륭히 키웠으며, 현재 마음에 드는 집도 가졌고, 주변에 함께 즐길 친구들도 있으며, 심지어 남자 친구까지 있다. 그런데 왜 계속 마음의 허기를 느끼며 동창들에게 사랑을 구하고 있는지 안타까웠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삶에 자신을 가지기를, 현재의 인생을 사랑하며 만족하기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행여 이 글을 읽으며 헬렌의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작가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게 발가벗겨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헬렌이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열흘이나 나를 위해 수고한 헬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다음으로 기차는 필라델피아 역에 도착하였다. 필라델피아는 윌리엄 펜이 설립한 도시로서 퀘이커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위해 조성된 도시였다.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운동이 시작될 때는 미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미국 독립선언서, 헌법 등이 이곳에서 채택된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구 중 중 흑인의 비중이 약 40%로서 가장 높고 따라서 범죄율이 높은 지역이라고 한다. 특히 총기 관련 폭력과 살인 사건 비율이 높은 도시라고 하니 필라델피아를 여행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필라델피아의 East Park Side


기차는 정확하게 3시간 30분 후 뉴욕에 도착하였다. 암트랙이 도착한 역은 Pennsylvania Station이었다. 역사에서 마중 나와있는 사위를 만났다. 사위를 보자 남편은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맨해튼의 Penn Station 대합실에서


리처드, 난 뉴욕으로 돌아와서 너무 기쁘다.


라고 남편이 사위에게 말하였다. 그동안 나를 쫓아다니느라고 얼마나 말 못 할 고생을 했던지 남편의 이 말 한마디에 남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였다.

Penn Station을 나서자 맨해튼의 거대한 마천루들이 마치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듯 도열해 있는 듯 보였다. 나도 딸과 사위가 있는 뉴욕 집으로 돌아오자 마침내 집에 돌아온 듯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딸은 우리가 버지니아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우리와 함께 지낼 시간을 다 갉아먹었다고 지천을 하였고 사위는 그동안 우리가 보고 싶었다고 하면서 곧 한국으로 떠나야 할 우리와의 동거를 아쉬워하였다. 그 곁에 아내를 위해 어려운 여행길에 동행해 준 남편이 있었다. 참 고마운 인연들이다. 나는 찔끔 감동의 눈물을 쏟을 뻔하였다.


맨해튼의 Pennsylvania Station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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