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로블링을 흠모하며
귀국 짐을 싸는데 딸이 브루클린 다리 산책을 제안하였다. 뉴욕에 왔으니 브루클린 다리 위를 한번 걸어보아야 한다는 딸의 주장이었다. 안 그래도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나섰을 때, 페리를 타는 배터리 공원에서 바라보이던 브루클린 다리와 맨해튼 다리가 너무 멋지게 보여 감탄을 한 참이었다. 짐을 싸다 말고 우리 부부는 딸을 따라 브루클린행 지하철을 탔다.
맨해튼 섬과 브루클린 사이에는 브루클린 다리를 위시하여 맨해튼 다리, 윌리엄스버거 다리 등 세 다리가 있다. 이중 브루클린 다리가 가장 이른 1883년 개통되었고, 윌리엄스버거 다리가 1903년, 맨해튼 다리가 1909년에 개통되어 그 뒤를 이었다. 세 다리 모두 케이블로 지지되는 현수교(懸垂橋)인데 이는 브루클린 다리가 성공적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대공사였다.
건설시기를 떠나 세 다리 중 석조로 건설된 브루클린 다리가 가장 아름답다. 뉴욕시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이 아름다운 다리를 걸어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브루클린 다리를 보기 위해 먼저 덤보(Dumbo) 지역으로 갔다. Dumbo는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약자로서 ‘맨해튼 다리 아래 지역’을 뜻하는데 이 지역 위로 맨해튼 다리뿐만 아니라 브루클린 다리도 지나간다.
딸의 안내로 덤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사진 촬영 명소로 갔다. 우리나라의 <무한도전>이라는 tv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어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하였다.
가서 보니 그곳에 왜 그렇게 유명한 사진 스폿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빈티지한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푸른빛이 도는 맨해튼 교의 아름다운 개선문과 그 아래의 교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이 맨해튼 다리 교각 사이로 저 멀리 앰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여 신비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사람들이 인생사진을 남긴다며 줄을 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광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덤보 지역에는 오래된 붉은 벽돌집들이 많았는데, 과거 이 지역이 공장지대여서 공장 건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지금은 거의가 카페나 식당, 갤러리 등으로 변신하였다고 하지만 남아있는 붉은 벽돌집들은 빈티지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이스트 강가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인 West Elm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다시 한번 브루클린 다리와 맨해튼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왼쪽에는 브루클린 다리가, 오른편에는 맨해튼 다리가 보였다. 다리 아래로 분주히 배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배터리 공원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두 다리가 마치 쌍둥이처럼 아름답게 보였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맨해튼 다리는 도저히 브루클린 다리의 품격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브루클린 다리가 우아한 고전미를 풍기고 있다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맨해튼 다리는 실용적인 면모를 풍기는 평범한 다리처럼 보였다.
나는 마음을 설레며 덤보지역에서 맨해튼 쪽을 향하여 브루클린 다리 위를 걷기 시작하였다. 딸은 브루클린 다리 위의 부모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열심히 뛰어다녔건만 남편은 혼자 저 앞서 걸어갔다. 나는 남편을 붙잡지 않고 천천히 다리 위를 걸었다.
이 다리는 윗 층은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보행자 전용 보도로 되어있고 아래층은 차들이 다니는 왕복 6차선 도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이 다리를 설계한 존 로블링(John Augustus Roebling)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존 로블링은 "밀집된 상업도시에서 그것(보행 전용 도로)은 무한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라며 미래를 예측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도 이 보행로는 관광객들과 시민들로 매워져 그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존 로블링의 선견지명을 보면 1850년대, 뉴욕에 센트럴파크를 만든 프레데렉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생각난다. 그는 맨해튼의 금싸라기 땅에 100만 평의 공원을 조성하려고 한다며 사람들이 반발하자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라며 센트럴 파크의 조성을 강행하였다. 존 로블링의 아이디어로 이곳에 보도가 만들어 지자 다리가 개통한 1884년부터 1892년까지 연간 450만 명의 보행자들이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하고 뉴욕시 교통국에 의하면 2024년에도 하루 평균 약 3만 명의 보행자들이 이 다리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간 날에도 다리 위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어쩔 수 없이 1850년 대에서 1870년 대의 조선 상황과 비교해 보게 된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세도 정치의 부패와 삼정의 문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었고 조선 근해에는 이양선(異洋船)들이 출몰하면서 폐쇄되었던 조선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미국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를 건설한 한 가족에 대한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가족은 로블링(Roebling) 일가였다.
이 다리는 존 로블링(John Augustus Roebling)이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다리를 이스트 강 위에 세울 것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1857년). 물론 그전부터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다리의 필요성이 거론되고는 있었다.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맨해튼을 빼앗았으나 17~18세기까지만 해도 맨해튼은 주로 모피 무역과 항구 산업도시로 성장은 하였지만 아직 세계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825년 이리 운하가 개통되면서 대서양과 미국 내륙(5 대호)이 연결되면서 맨해튼이 미국 물류와 무역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1817년 뉴욕증권거래소가 맨해튼에 설립된 것이 이곳을 결정적인 금융도시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돈과 인구가 맨해튼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맨해튼은 섬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페리에 의해 브루클린, 퀸즈, 브룽크스 등 인접지역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페리에 의한 운송은 기후에 따라 운항에 제한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육상 수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 독일 이민자 출신의 공학도인 존 로블링이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잇는 현수교 건설을 제안하였다. 현수교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케이블에 의해 지지되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교각을 여럿 세울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다리 아래로 선박의 출입이 제한받지 않는 이상적인 교각 형태였다.
로블링의 이스트 강 위의 현수교 건설 제안은 너무나 획기적이고 위험한 방법이라 전문가들 대부분이 그의 계획에 반대하였다. 존은 이미 몇 개의 현수교를 설계하고 건설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트 강은 그가 지금까지 건설한 다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넓었고 물살도 세었다. 그러나 이스트 강 위에 현수교를 세우고자 하는 한 사람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존 로블링과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이 뉴욕시장과 금융업자들을 설득하여 공사자금을 모았고 건설에 착수했던 것이다.
역시 많은 전문가들의 우려대로 공사는 수많은 난관에 부딪쳤다. 가장 큰 손실은 이 다리를 설계하고 건설을 담당할 존 로블링 자신이었다. 그가 막 공사를 시작할 즈음인 1869년, 페리와 선착장 사이에 다리가 끼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존은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고 더 어이없게도 그는 파상풍 합병증으로 죽고 말았다(항생제가 발견되기 전인 그 당시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존의 사후 아들 워싱턴 로블링(Washington Augustus Roebling)이 이 사업을 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설계를 바탕으로 총책임 엔지니어가 되어 다리 건설을 지휘하였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여러 기술적인 문제 중에는 이스트강의 선박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 높이를 확보하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는 탑의 무게를 견디도록 강 아래의 암반에 시멘트로 채워진 수중 케이슨을 설치하는 문제였다. 그들이 채용한 방식은 케이슨에 압축 공기를 주입하고, 작업자들이 케이슨에 들어가 케이슨이 기반암에 도달할 때까지 퇴적물을 파내는 방식이었다(지금도 대부분 이 방식을 따른다고 한다). 브루클린 다리의 경우 케이슨은 최종 깊이인 44.5 피트(13.6 m)에 도달했으며, 그 후 콘크리트로 채워졌다. 이 과정에서 케이슨에서 작업하던 많은 작업자들이 케이슨병(일종의 잠수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공사 독려를 위해 케이슨을 오르내리던 워싱턴마저 잠수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꼼짝없이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제 다리 건설은 요원한 일이 된듯 보였다.
이때 워싱턴의 아내 에밀리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 1843~1903)이 나섰다. 에밀리는 스스로 교량건설에 필요한 공학지식들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그 과정을 통해 수학, 현수선 곡선 계산, 재료 강도 및 교량 사양 등을 공부하면서 케이블 건설의 복잡한 사항들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건설일지, 노무, 자재관리를 배우고 설계서, 공사일지, 자제검사, 노동자 관리까지 익혔다. 현장 엔지니어와 정부관계자, 투자자 사이의 공식 대리인 역할도 그녀의 몫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역할은 무려 11년간 이어졌다. 그동안 그녀는 사실상 현장 총감독역할을 수행했다. 워싱턴 본인은 브루클린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망원경으로 공사현장을 지켜보며 감독했고 에밀리는 남편의 손가락 지시를 따라 다리 건설을 감독하였다.
그동안 건설현장에서는 온갖 불우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앉지 않았다. 결국 16년이 지난 1883년, 다리는 완공되었다.
브루클린 다리는 총길이 1.8km로서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고, 뉴욕시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나는 로블링 가족이 그 많은 희생을 치르며 만든 탑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주탑은 회색빛으로 보였는데 바로 석회암과 화강암이 섞여 만들어낸 색이라고 하였다. 주탑과 기반부에 사용된 화강암은 주로 매사추세츠주 퀸시에서 채석, 가공되어 뉴욕까지 운반되었으며 석회암은 코네티컷 주 이스트 하버. 밀퍼드 인근 채석장에서 반출되어 다리의 외벽 마감과 내부 구조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 볼수록 아름다운 주탑이었다. 런던의 타워 브리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타워브리지의 길이는 244.1m에 불과해 브루클린 다리의 1.8km에 비교가 되지 않았고, 더구나 타워 브리지는 1894년에 완공되었으니 브루클린 다리보다 10년이나 뒤에 건설되었다. 특히 브루클린 다리의 네오고딕 아치형 탑은 타워 브리지의 고딕스타일 교각 설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두 탑이 비슷하게 보였던 나의 느낌이 영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탑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려져 다리의 무게를 지탱하는 강철(steel)을 만져보았다. 로블링 이전에는 대형 현수교 건설에 주로 철(iron) 케이블을 사용하였지만 로블링은 강(steel) 케이블을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케이블의 강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강철은 철에 탄소를 일부 혼합하여 만든 합금원소로 강도나 경도, 내구성에서 단순 철보다 월등히 우수하여 더 긴 경간과 더 얇고 가벼운 케이블로 다리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더구나 로블링은 주탑에서 주 케이블이 내려오되 일부 보조 케이블이 교량 바닥 구조에 직접 연결되도록 하여 비틀림이나 진동을 크게 줄였다고 한다. 로블링의 이러한 혁신적인 공법은 이후 세계 대형 교량 건설의 표준이 되었다고 하니 여기서 그를 한껏 칭송하여도 지나친 것은 아닐 듯하다.
그의 뛰어난 설계가 있었기에 다리가 건설된 후 약 15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내가 이 다리를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브루클린 다리는 사실상 로블링 가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1883년 다리가 완공되었을 때 에밀리 로블링은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 신문들은 그녀를 ‘브루클린 다리의 첫 번째 여왕’이라고 표현하였으니 그녀의 집념의 노력을 인정한 셈이었다.
교량 개통식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과 뉴욕 시장도 참석했으며, 이들은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 쪽에서 브루클린 시장과 악수를 나눴다. 다리의 개통을 맞아 밴드 공연, 선박의 포성, 불꽃놀이가 있었고 그날 총 1,800대의 차량과 150,300명의 사람들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브루클린 다리 입구 부근에는 지금도 로블링 일가 기념판이 설치되어 있어 세 사람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또한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에 Emily Roebling Plaza라는 이름의 광장도 있다. 당시 신문들은 그녀를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여인으로 묘사했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그녀를 미국 토목사에서 실질적인 첫 여성 엔지니어로 평가한다.
브루클린 박물관에는 카를로스 듀란(Carolos Duran)이 그린 에밀리의 초상화가 있다. 흰 이마 아래에 빛나는 눈빛과 꽉 다문 입술이 그녀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만 같다. 여성을 아름다움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면서 여성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업적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잠시 훌륭한 여성들의 모습이 그녀 위에 오버랩되어 지나갔다.
에밀리가 살았던 1866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에 빠져 전 작품의 판권을 출판업자에게 넘겨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20대의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가 나타나 침착하게 속기 일을 해내 그를 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안정화시켜 작품에 전념하도록 하였고 그의 원고를 정리하고 출판되도록 하여 생활의 안정을 기하였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대작이 쓰이고 남겨지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동생인 테오가 아니라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 반 고흐 보너였다. 1890년 빈센트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뒤 남편 테오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는 빈센트가 남긴 수백 점의 그림과 자기 남편에게 보낸 빈센트의 편지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빈센트의 그림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럽 각국에서 소규모의 전시회를 열어 빈센트의 그림을 세상에 알렸으며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를 정리 출간해 화가의 삶과 생각을 대중에게 알렸다. 요한나의 20여 년 간의 꾸준한 활동 덕분에 20세기 초 고흐는 국제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화가 김환기와 그의 아내 김향안이 있다. 김향안은 남편의 그림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김환기가 파리와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데에 그녀의 적극적인 내조가 있었다.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사망하자 김향안은 남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는 데 힘을 썼다. 그녀는 남편의 작품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기증하여 남편을 알렸고 우리나라에도 환기 마술관을 설립하여 김환기의 작품을 보존하였다.
이러한 예는 대부분 예술가의 남편(또는 시숙)의 작품 활동을 돕고 작품을 유지하는데 공을 들인 여성들의 예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날린 유명한 과학자나 공학자는 거의 손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에밀리는 스스로 공부하며 건축 공학의 어려운 기술을 습득하였고 집념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숙원을 성취시켰다.
이후 그녀는 미국의 여성의 인권향상에 노력하였고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그녀의 역할은 이 다리 건설에 투입된 중국인들을 위해 그녀가 이들에게 부지를 보상으로 주어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지게 도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브루클린 다리를 지나 차이나 타운까지 걸어갔다. 차이나 타운에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으나 유명 식당은 이미 예약 만료라 들어갈 틈이 없었다. 차이나 타운은 번성 중이었고 많은 중국인들이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우리는 차아나타운 근처에 연결된 리틀 이태리에서 스파게티를 먹으며 그날의 일정을 마쳤다. 길에 마련된 노상 레스토랑에는 마치 무슨 축제의 날처럼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뉴욕은 늘 축제 중인듯하다. 돌아가면 그리울 것만 같은 뉴욕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