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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y 31. 2023

윤지충과 권상연의 232년만의 귀환

새 진산성지 축성식을 다녀와서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가운데 한 사람인 다카야마 우콘은 가토릭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주군이 내린 영지를 반납하였다.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나는 우콘을 생각할 때, 진산의 양반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떠오른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천주교 교리를 따르기 위해 조상의 위패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폐지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회기강을 어지럽힌 죄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두 사건은 모두 다 그 당시의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을 것이다. 과연 영지를 버리는 것과 조상의 위폐를 불태우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가벼울까?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사건 쪽에 손을 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조상의 제사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생각하면 두 사람의 결단이 결코 우콘보다 가볍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珍山) 사람이었다. 진산은 금산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한국사에 잊힐 수 없는 이름을 남겼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천주교의 교리를 따르고자 조상의 위패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폐하였다가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선비들의 탄원이 빗발치자 그들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으로 몰아 처형을 허락하였다. 이것이 1791년에 일어난 진산사건이었다. 이 ‘무부무군’의 죄는 조선이 천주교를 정식으로 허락할 때까지 천주교인들을 윽박지르는 죄목이 되어 심지어 백정조차도 천주쟁이를 무시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조선 천주교의 출발은 외부 선교사의 유입없이 자생적으로 탄생하였다. 실학주의자들이 독서모임을 통해 중국에서 가져온『천주실의』,『칠극』등의 책을 읽다가 무릎을 꿇고 서학을 종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이렇게 양반들의 학문에서 시작되었다. 천주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던 초기 신자들이 동지사 편을 통하여 북경의 서양 신부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 신자들은 천주교가 조상의 제사를 미신이라고 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라는 북경의 지침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소식을 듣고 많은 양반계급의 신자들이 천주교를 버렸다.    

  

윤지충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정약용가家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윤지충은 해남 윤씨의 7대손이었다. 윤지충의 고모가 정약용 형제의 어머니였다.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은 첫째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서 큰아들 정약현을 얻었다. 이 정약현과 결혼한 여인이 최초로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한 이벽의 누이였다. 그 후 의령 남씨와 사별한 후 정재원은 해남 윤씨와 재혼하여 약전, 약종, 약용의 세 아들과 딸 정혜를 낳았다. 

사돈관계인 이벽의 설득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약전, 약종, 약용 형제는 그 후 한국천주교의 초석이 되었다. 정약전은 영화 <자산어보>의 주인공으로서 종교 때문에 흑산도에 유배를 가게 되었고 정약종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최측근 인물로서 조선 천주교 회장을 맡았다가 신유박해 때 서소문밖에서 순교하였고, 정약용도 천주교 때문에 정적들에게 늘 시달리다가 전라도 강진에서 오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윤지충은 과거 공부를 위해 한양에 머물렀는데 이때 정씨 일가로부터 천주교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계로 인해 윤지충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당시 최첨단 학문인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윤지충은 1787년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진산으로 돌아간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 부인과 동생 지헌, 그리고 근방에 살던 이종 사촌형 권상연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 부인은 권상연의 고모였다. 이 권상연의 조부가 권기징이라는 사람이었다. 권기징에게는 다섯 딸이 있었다. 권기징의 딸들이 한국천주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권기징의 맏딸이 윤지충의 아버지인 윤윤경에게, 둘째 딸이 유항검의 아버지인 유동근에게 출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권씨 부인들의 굳은 믿음이 윤지충과 유항검의 믿음에 최대 지지세력이 되어주었다. 전라도 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윤지충의 역할은 지대하였지만, 유항검이야말로 ‘호남의 사도’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권상연이 윤지충, 유항검과 이종사촌 간이 되면서 자연히 이 신생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윤지충이 1784년 서울에 다녀온 후 북경에 머무르던 서양 신부들이 쓴『천주실의』와 『칠극』을 탐독하자 권상연도 이 책들을 빌려보았다. 그리고 1787년 윤지충이 세례를 받고 귀향하자 자신도 유항검에게서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셨다. 권씨 부인은 죽음을 앞두고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권씨 부인의 장례를 정성껏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았고 유교식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문상 왔던 종친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소문이 주변의 선비들에게 번져 나가고, 조정에까지 전해져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진산사건’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처단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정조는 천주교로 인해 조정이 혼란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온 조정이 들끓고 상소가 빗발치자 어쩔 수 없이 사회 도덕을 어지럽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로써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한국 천주교 사상 참수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살았던 동네에 세워진 성지가 진산성지이다. 진산성지는 1886년 공소로 출발하였는데, 그 역사적 의미 탓인지 2017년 5월 29일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682호로 지정되었다.  

   

내가 진산성지를 방문하였을 때는 한창 코로나 때문에 성당들이 폐쇄되어 있던 때였다. 진산성지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하얀 칠을 한 양철지붕에 작은 첨탑이 세워져 있는 조촐한 교회였다. 사무장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성당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아주 오래된 목조건물의 냄새가 훅 풍겼다. 잠시 의자에 앉아 윤지충과 권상연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전주 관아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윤지충은 “내가 가장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배반한다면 살아서건 죽어서건 어디로 가겠는가?”라며 배교를 거부하고 마치 잔치에 나아가는 사람처럼 환한 얼굴로 의젓하게 형장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이때 이들이 형장에 흘린 피가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 여럿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런데 성당이 오래되어 비가 새는 모양이었다. 설교대 옆에 빗물을 받는 플라스틱 양동이가 놓여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념하는 성당이 빗물이 샐 정도로 낡았다는 사실에 잠시 목이 메었다. 

                             

진산성지: 조촐한 모습이 역사를 말해준다.

                                       

  

진산성지의 내부: 조촐한 모습의 성지 내부에 윤지충과 권상연의 화상이 걸려있다. 


한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순교터에 세워진 성당이 전동순교성지이다. 이곳에서 호남의 사도로 불리던 유항검과 윤지충의 동생 지헌, 유항검의 아우 관검이 처형되었다.  


전동성당 앞 풍남문의 야경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호남지역에서는 유항검이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와 함께 유항검의 동생 관검, 윤지헌(윤지충의 동생), 유항검의 큰 아들 중철, 가정교사 한정흠, 노비 김천애 등이 체포되었다. 

유항검은 주문모 신부의 대박청래(大舶請來) 구상의 주동자로 지목되면서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대박청래란 주문모 신부의 구상으로 조선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위해 북경의 주교가 서양 선교사를 태운 큰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조선과 통상교섭을 하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큰 배에 진귀한 서양물건들을 가득 싣고 와서 황제의 환심을 사면서 북경에서의 전교의 자유를 얻었던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의 활동을 조선에서도 적용하고자 함이었다. 

대박청래의 구상을 서양세력이 무력으로 조선 조정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여긴 조정에서는 이 사항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유항검은 대역무도죄를 선고받아 전주의 풍남문 밖(현재의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죽었으며 그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澤(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웅덩이를 파 연못을 만들던 조선 시대의 형벌)되었다. 유관검과 윤지헌도 여섯 토막이 되어 죽었다. 


파가저택된 유항검의 집: 초남이 성지


이들의 순교 뒤 살아남은 신자들과 노복들이 초남이 근처 바우백이에 이들을 가매장하였다. 1914년 전동성당의 보두네(Baudounet) 신부가 유항검 가족들의 시신을 전주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해발 300미터의 산꼭대기로 이장하여 모셨다(치명자산성지). 


처음 유항검 가족이 가매장된 바우백이는 전북 김제군 남계리 초남땅 건너 재남리에 있다. 2021년 3월 전주교구는 이곳을 성역화하기 위해 무연고 분묘 10기를 개장하던 중 유해와 함께 백자사발지석을 발견했다.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공들이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 프란치스코임이 밝혀졌다. 윤지충과 윤지헌의 목뼈 양쪽 위 팔뼈, 왼쪽 대퇴골에서 찾은 예리한 흉기에 의한 손상은 이들이 각각 참수와 능지처참형으로 사망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의 사후 200여년 만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그 후 진산성당을 새로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새 성당건립을 위해 늙은 부모를 찾아가 자기에게 줄 상속분을 요구하였다는 시골 신부님의 스토리에 감동하였다. 양동이가 놓여져 있던 진산성지의 낡은 성당도 생각났다. 그래서 나도 벽돌 한장이라도 돕는 의미로 나름의 성의를 보탰다.      

그 새성전 축성식이 지난 주말에 열렸다. 김용덕 신부님의 초대장을 받아들자 거기를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빗길을 뚫고 서울에서 진산까지의 200km의 길을 나섰다. 그러나 부처님오신날의 대체연휴가 이어지면서 고속도로는 단 한발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혔다. 아침 7시경에 서울에서 출발하였는데 새성전에 도착하니 거의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미사가 끝나지 않아서 그나마 영성체를 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새 성전은 예전의 조촐했던 진산성지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발들일 틈도 없이 많은 신자들이 몰려와 미사에 참석하고 새성전의 축성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시골 성당의 신부님이 새성전 건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무려 70억의 거금을 모았다니 신부님에게 감동한 것인지 진산성지의 이름값인지 하여튼 놀라운 일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김신부님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를 생각하니 감동의 눈물이 핑 돌았다.  


새 진산성지 축성식 미사


그래도 나는 조촐했던 옛 성전이 못내 그리워 옛 성전 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전은 보수공사를 하는지 지붕을 흰 천으로 덮어놓았다. 남편이 예전에 뱃줄로 식사를 하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의 공터에도 차들이 뒤엉겨 들어갈 수도 없었다. 마당의 윤지충과 권상연의 비석도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비석이 무슨 소용이랴. 이제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헌의 뼈가 고향에 돌아와 새 성전에 안치되게 되었는 것을. 

옛 성전의 조촐함도 살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꾸 옛 성전을 돌아보며 발길을 돌렸다. 

23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이제라도 평화의 안식을 얻기를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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