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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Apr 30. 2023

사랑 맞네요

   

내가 대학 3학년 때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막 제대하고 복학해 온 아저씨였다. 겨우 삼 년의 차이가 뭐라고 그때 우리는 제대해 온 남학생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엄청 구시대적 인물로 취급하였다. 어찌어찌하여 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이 남자가 술만 마시면 자기는 돌아가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울었다. 


문정희 시인의 <치명적 사랑을 못한 열등감>이라는 에세이를 읽다가 그 ‘치명적 사랑’을 앓았던 젊은 시절의 남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고 지금껏 사십여 년을 이 남자 곁에서 살아왔지만, 남편의 치명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 여자에 대한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내가 한 번씩 첫사랑의 그 여자 이야기를 슬쩍 꺼내면 남편은 펄쩍 뛰면서 절대 그런 일이 없었노라고 발뺌으로 일관해왔다. 나와 결혼하기로 한 그 순간 남편은 과거의 순정과 이별하기로 결심했던 모양이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남편은 ‘돌아가야 할 여자’ 때문에 울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인연이 닿았던지 5년의 만남을 계속하다 결혼하였다. 아무리 봐도 불같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젊은 남녀 사이에 있을법한 연애를 지속하다 때가 되자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시인이 부러워했듯이 나도 ‘치명적 사랑’의 경험이 없었던 관계로 ‘돌아가야 할 여자’ 때문에 울었던 남편의 그 사랑이 부러웠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은 잊었노라던 그 여자가 내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는 늘 그 여인과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하며 마음을 썼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인이 내 마음속에서 자랄수록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자 마음이 쓰라렸다. 사실 이상형의 사람과 결혼하는 확률이 이 세상의 남녀 가운데 얼마나 될까 싶으면서도 이상형의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나를 선택한 남편이 안쓰럽게도 여겨졌다. 

나는 남편이 어떤 사람들과의 조우에서 보이는 민감한 반응을 통해 남편이 사랑했던 그 여자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럴 때 “남편은 왜 나와 결혼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사랑에 목을 맨 순전한 사람인 줄 오해할 것 같다.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바빴고 내 마음이 너무 건조했다. 가끔 남편과 갈등이 생길 때 내 마음속에 숨어있던 그녀가 튀어나와 나를 쓰라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결혼식장에 앉아 목사님의 주례사를 듣고 있을 때였다. 목사님은 에베소서 5장을 이용하여 젊은 부부에게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한 당부 말씀을 하셨다. 내용인즉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라는 말씀이었다. 결혼식의 주례사로 자주 언급되는 내용인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씀인데도 주례사를 듣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남편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사랑이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내 마음을 꼭 찔렀다.      


나는 허물이 많은 아내였다. 나의 교만함으로 남편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업을 벌여 남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한마디도 나를 나무라지 않고 그 짐을 나와 나누어 져 주었다. 나는 남편이 나와 함께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 남편을 졸라댔다. 그런데 남편은 교회를 가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큰 사랑을 외면한 채 내 마음속에 반역의 그녀를 키우며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고 나를 스스로 외롭게 만들었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마치 내 모습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애슐리라는 그림자 사랑에 빠져 진짜 사랑인 레트 버틀러를 보내고 마는 어리석은 여자로 보였다. 그런 깨달음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났다. 남편의 나에 대한 신의와 사랑에 비하면 나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너무 가벼워 깃털 같았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내 마음속의 그녀를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나를 당당히 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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