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Apr 26. 2023

맬러리에 대한 추억

나이가 추억을 변색시키네요

    

대학 시절에 산악부 활동을 하였다. 본래 운동에 소질이 없는 데다가 나름 문학소녀를 표방하던 나로서는 뜻밖의 결정을 한 셈이었다. 산이라고 하면 어릴 때 형제들과 우리 집 뒷산을 겨우 오르내렸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나의 큰언니 덕분이었다. 큰언니가 왜인지 모르지만, 대학 산악부에 들어가 꽤 이름을 날렸다.  나의 언니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시절 핸드볼부 주장을 맡아 전국 시합을 다닐 만큼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였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언니를 따라 산악부 행사에 참석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금정산을 올라 동문을 통과하고 능선을 따라 걷다가 북문으로 하산하는 상당히 평범한 산행길이었다. 그런데 그 풍경이 내 마음속에 한 장의 그림처럼 새겨졌다. 청량한 맑은 공기와 능선을 따라 하얗게 핀 억새꽃과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걷기.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산악인 오빠들이 나에게 보여준 친절이 잊을 수 없었다. 여고생의 마음속에 산악인 오빠들의 늠름한 모습이 환상처럼 새겨졌었다. 결국, 나를 산악부로 이끈 것은 고교 시절에 품었던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산행하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등산이라는 것은 꾸준함이 필요하지 뛰어난 운동신경을 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 산악부는 상당히 엄한 규율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은 고되었고 선배들은 규율을 잡느라고 후배들에게 이유 없이 빠따(bat의 속어)를 돌리는 일도 잦았다. 하계와 동계훈련을 떠날 때면 배낭 무게가 최소 20kg은 되었다. 나 같은 여자 대원은 배낭을 메고 일어나기도 어려웠다. 겨우 몸을 일으키면 거기다 2kg짜리 물통을 더 올렸다.

언젠가 TV에서 45년간 설악산에서 짐꾼으로 살고 있는 남자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키 158㎝, 몸무게는 62㎏인 그 남자는 한창 때는 130㎏의 짐도 거뜬히 옮겼다고 하였다. 나는 그 설악산 짐꾼을 보면서 옛날 우리가 메던 배낭이 생각났다. 나는 키 158㎝, 몸무게는 52㎏이었으니 설악산의 사나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겨우 20kg의 배낭을 가지고 짐타령을 했으니 어찌보면 가소로울지도 모르겠다며 혼자 웃었다. 하지만 그 배낭은 일어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진짜 무거웠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꾸준히 끈기 있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니 결국 산의 정상에 서게 되더라는 것이다. 산행을 통해 끈기를 배운 것인지 아니면 나의 본래부터의 끈기 때문에 산악부의 고된 훈련을 잘 마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결과는 내게 끈기가 상당히 있다는 자각이었다. 뭔가 재미를 찾아 산악부에 들어왔던 여학생들은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도 나는 꾸준히 산을 다녔다. 그러자 어느덧 내가 여주인공이 되어있었다.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주인 의식이 있는 사람이 결국 주인이 되는 법이다.       


산악부에 세 명의 열성분자들이 히말라야를 가자고 꿈을 키웠다. 그때 우리 가슴은 히말라야를 행해 높이 뛰고 있었다. 우리는 걷기 훈련, 바위 타기, 빙벽 타기 훈련을 계속하면서 체력을 키웠고 틈이 나면 히말라야에 관한 책을 읽었다. 히말라야 산행에 참여했던 부산의 한 여성 산악인이 나에게 자신의 장비들을 주면서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내가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해왔을 때 나의 히말라야를 향한 꿈은 정점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가슴이 미어질 듯 벅차올랐다.


그때 우리의 우상이 맬러리(George Mallory, 1886~1924)였다.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 대원이었던 맬러리는 1924년 6월, 동료 앤드류 어빙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에서 돌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영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책에서 만난 맬러리는 멋진 외모에다 배경도 화려했다. 그는 13살에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수학 학위를 받을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었고 캠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결혼하여 3자녀의 아버지가 된 그가 강의하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위원회가 조직한 ‘정찰탐험대’에 합류했다. 그가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1924년에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전의 두 번의 등정은 실패한 바 있었다. 그와 파트너 앤드루 어빈은 그날 정상에서 불과 245m를 남겨둔 지점에서 마지막으로 관측된 뒤 실종됐다.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착한 후 하산하다 실종됐는지, 미처 도착하지 못한 째 실종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맬러리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준비하는 자신을 쫓아다니며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려고 하느냐?”라고 물어대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귀찮은 듯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맬러리의 이 말은 세계의 산악인들에게 영원한 경구로 남았다. 그때 에베레스트를 꿈꾸던 우리들에게도 그의 말은 너무나 멋졌다. 그 후 에베레스트의 꿈은 접었지만 근처의 작은 산을 오를 때. 맬러리 생각을 했다. 그가 동토의 에베레스트 얼음 속에 얼굴을 박고 있을 것 같은 생각 말이다.    

  

히말라야 산행을 꿈꾸던 세 친구의 운명도 세월과 함께 갈렸다. 한 친구는 진작에 꿈을 접었고 나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현실적인 생존 방식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 친구만이 계속 그 꿈을 버리지 않더니 마침내 히말라야의 8천 미터급 어느 산정에 깃대를 꽂았다. 우리는 그 친구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 주지도 않았다. 각자 자신의 짐이 제일 무거운 줄 알고  각자의 인생길을 걸어갔다.


남편은 아내의 젊은 시절, 히말라야를 향한 꿈을 안다. 언젠가 네팔 여행을 갔을 때 남편은 나에게 히말라야의 높은 피크들 위를 나르는 경비행기를 태워주었다. 비록 내 발로 걸어 올라가지는 못해도 하늘에서 세계 최고 높이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라는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름이 가려 봉우리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피크들이 인생의 꿈처럼 여겨졌다. 벼르고 별러 찾아가도 저 멀리 도망가는 인생의 꿈처럼. 그리고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히말라야 타령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조지 맬러리가 히말라야의 유령이 되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에베레스트에서 사라진 지 75년이 지난 1999년, 맬러리의 시신이 에베레스트 북벽 8157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은 땅을 향한 채 손과 팔은 W자 모양으로 벌어져 있었고. 허리에는 여전히 밧줄이 묶여 있었으나  그 끝에 있었던 파트너 어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이십 대 초기에 선망했던 맬러리를 사십이 넘어 다시 보니 선망보다는 그가 마지막에 당했을 고통과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 맬러리를 다시 생각하니 가족과의 단란한 생을 버리고 “왜 위험한 산에 갔을까? ”하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나이가 꿈을 퇴색시키는가 보다.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뒷줄 맨 왼쪽이 맬러리, 사진 위키피디아





작가의 이전글 산청(山淸) 탐매기(探梅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