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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Aug 19. 2023

아! 서울백병원

    

서울백병원은 명동성당 아래의 서울 한복판에서 외과 수술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며 83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런데 이 병원이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폐원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때 융성했던 것들이 세월과 함께 쇠락하여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더구나 인제대학에서 청춘을 다 보낸 한 사람으로서 서울백병원 폐원 결정은 충격적이다. 그래서 서울백병원을 위한 조가(弔歌)를 읊어본다.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가지면서.    

  

병원 설립자 백인제 박사

오늘날 백병원이란 브랜드를 탄생시킨 분은 백인제 박사이시다. 그는 1899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에서 외과를 전공했다. 1928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백박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주임교수가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주임교수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실력이 뛰어났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복수술을 했다. 그는 얼마나 명의로 이름을 떨쳤던지 “백인제 박사 앞에 백인제 없고, 백인제 박사 뒤에 백인제 없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총독부의원’의 외과 과장이던 우에무라 준지(植村俊二)가 1924년 지금의 서울백병원 자리에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총애하던 제자 백인제 박사에게 병원을 넘기고 싶어 하였다. 백 박사는 조선식산은행(현 조흥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30병상 규모의 외과 병원을 인수하였다. 

1941년 ‘백인제 외과병원’이 문을 열자 조선팔도와 만주에서 연일 환자들이 몰려왔는데, 특히 맹장염 수술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려 일주일에 떼낸 맹장이 한 가마니를 넘었다고 할 정도였다. 해방직후 백병원은 사립병원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을 맞아 백인제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였다. 자신의 전재산을 공익법인에 내놓으셨던 것이었다. 이때 내세운 이념이 ‘인술제세(仁術濟世)’였다. 즉 ‘인술로서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1979년, 인제대학이 설립될 때 내세운 건학이념이 바로 이 ‘인술제세(仁術濟世)’였다. 그러니 백병원과 인제대학을 흐르는 철학은 홍익인간의 실천의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6.25가 발발하고 백인제 박사가 납북되는 비극적인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백인제 박사가 없는 백병원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백병원이 중소병원 규모의 현상 유지에 그쳤던 반면, 서울 곳곳에서는 신생 대규모 종합병원이 신설되었다. 

이런 백병원의 구세주로 나선 사람이 백낙환 박사였다.      


백낙환 박사

백낙환은 1926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네 살 때 서울로 유학을 와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의 댁에서 기거하였다. 그는 큰아버지의 뜻에 따라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5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그가 1961년, 백병원의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큰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려고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그는 서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백병원의 특성을 살려 연중무휴, 24시간 가동하는 응급의료센터를 두었다. 이 응급실의 활약으로 수익증대 뿐만 아니라 병원 전체가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백낙환 원장은 서울백병원의 현대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끝에 1975년 3월, 서울백병원은 현재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서울백병원이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백낙환 박사는 창립자 백인제 박사가 꿈꾸었던 교육 분야로의 진출을 준비하였다. 때마침 정부는 지방의 의료취약지구와 공단지역의 의료시설개선을 위해 의료기관에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백병원은 부산 사상지구를 맡게 되었다. 이것을 기화로 현재의 부산 개금동에 의과대학과 부속 부산백병원이 개원하게 되었고 1979년 1월 학교법인 인제학원 설립이 허가되었다. 부산백병원이 개원하자 그동안 의료혜택의 불모지였던 부산과 인근 양산, 김해 등지의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부산백병원은 개원 첫해부터 흑자를 내면서 부산 최고의 병원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그 후로도 백낙환 박사는 쉬지 않고 노력해 1988년 상계백병원을 착공하였고 1999년에는 일산백병원을 개원했으며 2010년에는 해운대 백병원을 개원시켰다. 이리하여 서울백병원에서 시작한 작은 물결이 종내에는 인제대학과 대형 부속병원 다섯 곳을 거느리는 창대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 모든 성공 뒤에는 백낙환 이사장의 피와 땀이 서려 있었다. 


백 이사장은 서울백병원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인제대학과 나머지 병원들을 순회 지휘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영원한 청년정신으로 살던 백낙환 이사장도 나이 앞에는 어쩔 수 없어서 2018년 12월 7일, 9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또 한 사람의 거인이 쓰러져 갔던 것이었다. 슬프게도 백낙환 이사장은 이사회와의 갈등으로 자신이 중흥시킨 백병원에 영안실을 마련하지 못하고 서울대학교 영안실에서 최후를 마쳤다. 

이렇게 백병원 중흥의 중심에 있었던 서울백병원이 그동안의 누적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폐원을 결정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백진경 교수

백진경 교수는 재단설립자 백인제 박사의 조카이자 2대 재단 이사장이었던 백낙환 박사의 차녀이다. 그녀는 현재 인제대학교 멀티미디어학부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백 교수는 백인제 박사와 백낙환 이사장의 유지를 잇기 위한 일의 선두에 서있다.  

그녀는 인제학원 이사회의 서울백병원 폐원 결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백진경 교수는 우리나라의 의학사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은 서울백병원 폐원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서울백병원을 ‘글로벌 K-메디컬 허브’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백병원 교수협의회도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재단 측이 경제 논리로 병원 문을 닫겠다고 하고 있다며, 병원에 헌신한 교직원과 환자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인제대학과 백병원의 교직원과 학생들에게도 오늘날 백병원의 뿌리가 된 서울백병원의 폐원 결정은 충격적이다. 물론 서울백병원의 누적적자가 천문학적이 되고보니 운영이 불가능해졌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제적 논리만이 작동하지 않는 것도 있다. 백병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의료법인이자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첫 번째 의료기관이라는 역사적 사명이 있다. 우리나라 유수의 대기업들도 처음에는 작은 건물 하나에서 시작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들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후에도 자신들의 근원이 된 작은 건물을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백진경 교수의 노력에 한 표를 보태주고 싶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하지 않는가. 윗대의 노고를 소중히 여기며 그 노고를 계속 지켜나가려는 작은 노력들이 합하여 큰 역사를 만드는 법이다. 우리는 경제 논리로 너무 쉽게 역사적 기념물들을 깔아뭉개버린다. 그런 면에서 설립자 가족들이 설립자의 뜻을 지키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 백진경 교수가 인제대학교 차기 총장 경선에 나서 최다 득표로 1위를 차지했다. 모두 59명의 선거인단 투표에서 백진경 교수는 1차 투표에서 다른 두 후보와 같은 12표를 얻었으나 2차 투표에서 17표를 얻어 14표를 얻은 전민현 현 총장과 12표를 얻은 해운대 백병원장인 김동수 교수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제 공은 재단이사회로 넘어간다. 현재 인제학원 이사장은 서울대 의대 학장을 역임한 이순형 교수가 맡고 있다. 재단은 어찌된 일인지 백낙환 일가를 죄다 재단에서 축출하였다. 현재 인제대 재단 이사진에는 백인제 선생의 후손으로는 둘째 아들인 백낙훤 홍보담당이사가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인제대학교 총장 선거에서 백진경 교수의 남편인 나노공학부 전병철 교수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최다득표를 얻었으나 재단은 논문표절로 교내인심이 들끓던 전민현 교수를 총장으로 선택하였다. 현재 지방 사립대학의 위기는 여기서 논할 필요조차 없다. 도덕적 결핍상태로 총장 자리에 오른 전민현 교수가 위기극복을 위한 리더쉽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고 본다. 인제대학교에서는 재단의 다음 수순이 김해 캠퍼스의 폐교 결정이 될 것이라고 긴장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백병원의 폐원 조치는 부산의 여론까지 부정적으로 돌아서게 만들고 있다.  


백진경 교수는 이 위기에서 병원을 살리고 대학을 살리려고 노력분투하고 있다.  인제대학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제학원 재단이사회가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를 바란다. 백진경 교수를 마다하고 또다시 제 입맛에 맞는 인물을 선택하여 인재학원을 마음대로 요리하려고 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것이다. 이사회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 더 바람직하게는 원주인에게 재단을 돌려주는 것이다. 누가 이 재단을 세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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