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붙든 채 살아온 나
아카시아 나무 아래 꿈꾸던 아이
어릴 적 넌 뭐가 되고 싶니?라고 누군가 물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언제나 대답은 ‘화가’였다. 난 항상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당차고 또 제법 단단했다. 그저 그림이 좋았다. 무작정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티 없이 맑았던 그 시절 내 재능을 크게 따지지 않고 재지 않고 그저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큰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던 학교에서 나는 꿈을 품었다. 녹음이 짙고 볕이 제법 뜨거운 여름인데도,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는 바람이 참 시원했고 그 향기가 좋았다. 무작정 스케치북을 들고나가서 시원한 나무 아래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뭘 그렸는지는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설레고 행복했던 마음을 기억한다. 한 번씩 내 그림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오면 멋쩍게 웃으며 설명했던 기억도 난다. 그 기억 하나로 나는 지금껏 살아왔다. 그림을 칭찬받고, 대단한 상을 받았다는 실력으로서가 아닌, 순수한 그림에 대한 열망 하나로 나는 꿈꿔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경력 단절이 된 후에도 늘 꿈을 붙들었다. 하지만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며 내 것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음은 열의가 충만한데 소위 육퇴를 하고 나면 드러눕고 늘어지기 일쑤였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안 하고 있으니, 고민은 늘어갔고 잠을 한 번씩 설치게 되고 심지어는 악몽까지 꿨다. 악몽의 내용은 늘 비슷했다. 그림 숙제를 나만 못했고 남들은 다들 멋진 그림을 전시하는데 나는 전시할 그림이 없어 마음을 졸이는 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최악인 이 꿈을 꽤 자주 꿨다. 깨고 나면 ‘휴 꿈이었구나’ 안도했지만 나를 사로잡는 그 찝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뭐라도 해야지 생각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집안일을 하다가도 생각나면 글도 끄적여보고 그림도 그려보았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다 보니 동화책도 써보고 싶어 공모전에 그림책을 출품해보기도 했다. 무려 두 번이나 보기 좋게 떨어졌지만, 없는 시간 쪼개 틈틈이 준비했던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 빛났다. 또 아이의 예쁜 모습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쉬워 그림일기도 차근차근 써보았다. 가끔 포털에서 내 그림일기를 메인에 실어주기도 해 뿌듯하기도 했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때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무엇보다 빛을 잃어가던 내가 깜빡깜빡 조금씩 빛을 내보이는 것에 안도하며 더 힘을 냈다.
이렇게 나는 하나씩 내가 하고 싶고 할 것들을 해내는 중이다. 다시 내 빛을 찾는 연습을 해 나가는 것이 나의 목표다. 나의 경력 단절은 완전한 단절이 아닌, 잠깐의 멈춤일 뿐. 희미하지만 멀리서 빛나는 그 빛을 따라 이 시기를 한 걸음씩 내디뎌 나아갈 것이다. 내 꿈으로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어릴 적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품었던 작디작은 꿈을 단단히 붙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