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폭풍의 언덕
60여년 살아본 삶을 통해 새삼 확신이 드는 것은
인생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라는 것.
비극이 있으면 희극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었다.
끝일 것 같았는데 시작이었고
시작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끝이었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 속에서
내 뇌리 속에 쐐기처럼 새겨진 것은
히스클립이 죽고
그 곳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는 사실.
아주 오래된
그래서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 그 소설
하지만 나의 가장 감명깊은 책의 첫 번째로 나도 모르게 꼽는 책.
기억나는 것은
그 사람 '히스클립'
그리고 그가 흠모하고 사랑하던 '캐서린' 뿐이다.
내용을 다시 떠올려볼까 하여
인터넷을 열어보았지만
채 서너 줄도 읽어보기 전에 닫아버렸다.
나의 기억을 혼란하게 할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아련한 아름다운 기억들을 망가뜨릴 것 같은 두려움에서다.
언젠가 폭풍의 언덕이라는 영화를 살짝 본 적 있다.
여전히 나에게 잊지못할 이야기라서 기대하고 보다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나의 기억과 추억과 상상을 무참하게 깨버리는 그 영화의 장면에
실망가득한 마음으로 꺼버렸다.
심지어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 어떤 같은 제목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 책을 읽은 것은
( 아~ 이 기억마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실제와 다른 나의 기억 속의 책이 이미 되어버린 까닭이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꽤 두꺼웠고, 누런 종이에 세로로 써 있는 책이었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부분이 전부다.
히스클립은 폭풍의 언덕에 있는 집에 일하러 간 소년이었다.
소년은 주인집 딸 캐서린을 만나고는 소년의 가슴에 흠모의 마음이 싹튼다.
걷잡을 수 없는 격정적 첫사랑을 마음속에 키우지만 현실은 너무 달랐다.
히스클립과 캐서린은 서로의 감정을 실현할 수 없었고
소년은 가슴앓이를 하며 멀리서 혹은 뒤에서 그녀를 볼 뿐이었다.
소설에는 그 때의 히스클립 소년의 모습을 꽤 긴 문장으로 묘사하는 데...
나는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히스클립의 모습에 내 감정이 완전히 이입되어 있었나보다.
히스클립과 캐서린의 둘러싼 모든 환경은 그들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고
순수했던 사랑은 안타까움과 분노가 되어 히스클립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몰아갔다.
분노로 복수의 마음을 품고 떠난 히스클립이
마침내 세상적 성공을 하게되고 결국은 그 집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여전히 상상속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은 너무도 다른 상황으로 치닫는다.
분노와 복수에 사로잡힌 히스클립은 이미 악마가 되어있었다.
폭풍의 언덕에 있던 그 행복한 집, 아름다운 집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분노가 그를 그 집의 주인이 되기까지 키웠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그의 마음은 그가 있는 모든 공간과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각나는 것은
히스클립이 죽고 폭풍의 언덕의 그 집은 다시 평화가 찾아왔던 것 같다.
순수한 사랑도
격정적 삶도
분노도 복수도 모두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나의 기억이 소설의 내용과 많이 다를 수도 있지만
나의 뇌리에는 늘 두 가지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순수하고 애절했던 소년 히스클립과 그의 사랑
그리고
폭풍이 지나간 뒤 다시 찾아오는 평화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났다.
불같던 호랑이 아버지
그가 가신 후
엄격히 말하면 당신이 중풍과 치매로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집은 폭풍의 언덕의 그 집 처럼
평화가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