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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Oct 08. 2024

넌 족발 갖고 어디 갔다 왔어?

회사에 입사한 뒤 얼마되지 않아 어리버리 대던 시절이었다. 갑자기 팀장님이 물었다.


자넨 뭘 잘하나?
예, 저는 다른 운동은 잘 못해도 산에 올라가는 건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나랑 산에 한 번 가지.



팀장님은 나를 충남 태안 백화산에 데리고 갔다. 회사 산악회였다.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신입이었지만 산에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배 팀장, 아들이랑 온 거야?


산악회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신입사원인 데다가 외각 부서에 있어서 그분들이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눈만 깜빡거렸다. 여러 부서장들이 팀장을 보면서 물었다.

 

“아, 저희 막내 사원입니다. 여기는 장기보전팀 성열웅 부장님이야 인사드려.”

“네, 안녕하십니까? 제휴마케팅팀 구본영입니다.”


평소에는 쭈뼛쭈뼛 대며 어리숙한 모습만 보이던 신입이 쭉쭉 산을 타면서 가볍게 올라가는 모습에 팀장은 흡족했나 보다.


역시 명불허전이네.


팀장님은 나에게 엄지 척을 날렸다.




그날 산행 이후 나는 바로 산악회에 가입했다. 회사 입사 동기들은 야구회, 농구회 등 좀 더 젊고 활동적인 곳에 가입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동기들이 그랬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산악회에는 임원들부터 회사 내 곳곳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정말 많았고, 자리 보존을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건 관심 없었고, 매달 산에 혼자 가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생각했다.



폭설이 내리던 겨울날, 산악회는 1박 2일 코스로 한라산 산행을 기획했다. 토요일에 한라산 산행을 하고, 숙소에서 머문 뒤 일요일에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눈 덮인 백록담을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순간이 될 것이었다.


이번에도 팀장님과 함께 했다. 산악회에는 역시나 우리 말고도 정말 많은 인원이 몰렸다.


한라산은 두 가지 코스가 있다. 비교적 완만하게 올라갈 수 있는 성판악 코스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지만 꽤 난이도가 있는 관음봉 코스.


제주도는 폭설이 내려 눈이 허리까지 쌓인 수준이었다. 우리는 난이도가 있는 관음봉 코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상시의 관음봉 코스도 초보자에게는 어려운 편인데 눈까지 덮였으니.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꽤나 고생하겠구나.’



예상했던 대로 눈이 너무 많이 내린 까닭에 길과 계단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빙판길을 더듬더듬 걸어가며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를 부여잡으며 아슬아슬한 비탈길을 올라갔다. 산에 많이 다녔다고 자신만만했던 나도 힘들었다.


함께 갔던 사람들도 저마다의 속도로 나뉘기 시작했고 하나둘씩 지쳐서 낙오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산악회 총무였던 동기 녀석이 나에게 오더니 족발을 맡겼다.



이거, 이강현 이사님이 맡긴 건데, 네가 좀 갖고 올라가 줄래?

얼떨결에 말 한마디 걸어본 적 없는, 본사 임원의 간식을 맡게 되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게다가 그 임원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도 몰랐으니 더욱 노심초사해지기 시작했다. 팀장님과 함께 속도를 내서 결국 정상에 올랐다.




이 덮인 백록담은 절경이었다. 힘들게 꾸역꾸역 올라왔던 것에 대해 한 순간에 보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을 다녔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라고 할 만큼 멋진 광경들을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풍경을 담을 만큼 담고 나니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게 생각났다. 문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그 임원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고,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팀장님, 이강현 이사님은 먼저 내려가신 걸까요? 아니면 저희가 너무 늦게 온 걸까요?
글쎄, 조금 기다려보지.



30분쯤 백록담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그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내려와야만 했다. 한라산은 진달래 대피소와 삼각 대피소, 그리고 정상에서 시간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통과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산하기 시작했다.




런데 내려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뿔싸, 우리가 늦게 온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우르르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그중에는 그 임원도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너 이 녀석, 족발 갖고 어디 갔다 왔어?”


그날 저녁 메뉴는 흑돼지고기를 먹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과 나는 그 임원의 술잔을 받느라 고기 맛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산에 갔던 그때가 좋았는데.


팀장님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해마다 종종 안부를 물을 때마다 그는 그때 이야기를 한다.


팀장을 맡고 받았던 첫 신입사원이 나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팀장님과 산에서 함께했던 순간들은 고달픈 회사 생활에서 내가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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