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놈들이 더 하더라.

아는 만큼 더 요구하게 되는 사람들

by 아카


보험사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흔히 말하는 '진상' 고객은 꼭 외부에서만 만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이 일을 잘 아는 사람들, 이른바 내부 고객 앞에서 더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특별히 나쁘기 때문이라기보다, 업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아는 만큼 선이 흐려지기 쉬운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부 고객의 민원은 대개 감정이 먼저 드러난다. 불안과 억울함이 말보다 앞서 나온다. 반면 내부 직원이나 당사 설계사들의 요청은 늘 정중한 말투로 시작된다. 다만 그 정중함 뒤에는 묘한 확신이 깔려 있다. 업무를 알고, 약관을 보고, 판단의 흐름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다.


이건 규정상 이렇게 처리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과장님 정도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요?



질문처럼 들리지만, 이미 답을 떠올린 채 던져지는 말들이다. 설명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 판단을 확인하려는 문장들. 그 대화는 처음부터 같은 출발선에 있지 않다.



외부 고객의 민원은 경계가 분명하다. 회사와 고객, 책임과 절차가 비교적 또렷하다. 하지만 내부의 요청은 다르다. 같은 조직 안에 있다는 이유로, 설명보다는 이해가 먼저 요청된다. 조금쯤은 배려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순간이 더 어렵다. 규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규정을 설명하면 되지만,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왜 그 규정이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는지를 설명해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 실무자는 제도와 사람 사이, 관계의 중심에 서게 된다. 질문하는 사람이 상사이거나 조직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무게는 더해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 조직 안에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는 같은 위치에서, 같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나는 더욱 느슨함을 경계해 왔다. 가능하면 규정대로, 원칙대로 일하려 애써왔고, 직원이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 선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실은 늘 단순하지 않았다. 유관부서의 시선, 서로 다른 판단, 조직 안에서 생기는 미묘한 온도 차이들이 또 다른 고민을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험상품은 구조가 복잡하고, 보장은 길다.
조금 안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자연스럽게 더 요구하게 된다. 나 역시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를 지적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는 놈'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관찰에 가깝다고나 할까?


일을 오래 하고 잘 알수록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하지만 그만큼, 어디까지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감각은 스스로 돌아보지 않으면 쉽게 흐려진다.


회사라는 조직은 규정으로 움직이지만, 일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다. 내가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얼마나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잠시 상상해 보는 일. 그리고 그 상상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아는 놈'이 아니라 '더 한 놈'이 되는 건 아닐까.


보험사에서 일하며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권리를 아는 것과, 선을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라는 걸.



그래서 요즘 '무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것보다는, '어디까지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지'가 되고 싶다.


아는 놈들이 더 하더라.



그래서 나는, 아는 사람이기 전에 선을 아는 사람으로 남으려 애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