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기다려주기.
언제나 늦고, 또 늦어버리곤 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2025. 9. 9
아픈 엄마를 곁에서 돌보러 제주에 다녀오겠다는 수린의 말에 헤어 살롱 9월 휴무 안내를 올리기로 한 아침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이겠지만 이미 한 차례 위독하셨던터라, 혹시 모를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을, 아니 그런 순간이 오지 않게 지극히 돌보고 싶은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제주로 떠나기 전 나도 두 모녀에게 힘이 될만한 편지든 선물이든 보내고 싶어 무얼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며 분주하던 아침이었다.
산만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민하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에 전화 알림이 떴다. 수린이었다. 부리나케 휴대폰이 있는 방으로 달려가 신호가 끊기기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언니,,, 엄마가 ,,, 셨어요."
우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말하는 수린의 목소리에 믿고 싶지 않았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이별의 소식을 예상보다 빠르게 마주해야 했다.
사랑의 히어로, 순자씨.
수린이 자신의 꿈과 업을 키울 수 있게 롤모델이 되셨고, 자신의 업을 시작할 지 고민하던 시기에 아쳅토를 시작할 수 있게 수린에게 용기를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던 수린의 어머니 순자. 그녀가 긴 투병 끝에 깊은 잠에 드셨다. 아쳅토의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에, 또 그 이야기를 독립 출판으로 써보게 되었던 책에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한 챕터로 남겨 두었을 정도로 나에게도 소중한 분이다. 언제나 수줍으면서도 활짝 웃는 미소로 맞아주시고, 가녀린 소녀같은 모습이셨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마음과 삶의 심지를 지녔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던 분. 그런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났다.
몇년 전부터 항암치료와 수술을 받으시며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꿋꿋이 이겨내시곤 했는데, 그래서 일상 생활을 누리시곤 했는데, 이제 괜찮아지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픈 지난날은 어려웠던 기억으로만 남겨두고 손주들과 함께 새로 이사한 집에서 이제야 좀 행복하게 누리시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한 달 전, 다시 여러 곳에 암세포들이 발견된 것이다.
분명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위독해지셨으며, 일상 생활이 어려워지셨었고,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병원에선 더이상 손쓸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도 들었음에도, 우리는 모두 그래도 조금 더를 희망했다. 나는 암 환자에게 좋다는 자연식물식을 뒤늦게 찾고 연구하고, 나에게 실험을 해보면서, 그녀와 가족들이 어떻게 조금이라도 추억을 더 남길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고 고민했다. 수린은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는 엄마의 곁을 지키고 싶어 이제 인생 8개월차 된 아들을 데리고 제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순자씨의 남편 종만씨는 항암에 효과가 있다는 귀한 물을 찾아오고, 함께 드라이브를 계획하고, 항암 효과가 있다는 과일을 그녀에게 먹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희망어린 계획들을 받아주기엔 그녀에게 그 계획을 함께 할 남은 기력이 부족했다. 늦은 사랑을 받아주기엔 생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른 것이었다.
돌봄을 위해 출발하려던 제주행은 이별을 위한 제주행이 되었고, 수린과 그녀의 아들 서로만 출발하려던 제주행은 온 가족의 제주행으로 바뀌었다. 강아지 동시를 돌볼 사람이 없어 고민하는 그녀의 사정을 듣고, "그래, 동시는 걱정하지 마, 내가 데려올게!"라고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럼 나는 순자씨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없는건가? 서울에 남아 장례 기간동안 집에 있어야 하는건가?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동거인 진정섭씨는 울먹이며 어떡할지 고민하느라 그토록 먹고싶다 노래를 불러 기껏 만들어준 건두부 청경채 볶음도 깨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지금 동시를 봐줄 다른 사람이 있어?"라고 물었다. 아무래도 없지 않을까? 내가 남아야 할까? 자기가 봐줄 수 있어? 아 3일은 너무 힘들겠지?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하고 묻자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조금의 고민도 않고 즉시 답하며 "봐 줄 사람 없다며. 그럼 내가 돌봐야지. 나에게 맡기고 다녀와."라고 말했다. 단호하게 다정한 그의 결정과 행동력 덕분에 정신 못차리고 있던 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그의 출근 전 차로 함께 빠르게 수린의 집으로 가서 동시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고 좀처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헤어 살롱 한 달 휴식 공지를 하려던 내용은 이번 한 주 휴무 공지와 함께 부고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수정해 인스타그램에 공지 게시글을 올렸다. 책방 독서모임과 가꿈 예약을 한 분들에게 따로 따로 취소와 양해 연락을 드렸다.
순자씨에게 건네고 싶었던 편지의 초안을 써두었던 노트를 가방에 담고, 전하고 싶던 책의 문장이 담긴 페이지를 급히 카메라에 담았다.
늦어도 너무나 늦은 순자씨와의 조우였다. 나는 조금 더 빠르게 그녀에게 전화 한통이라도 했어야 했다. 거창한 해결책이든 멋진 선물 말고, 그저 얼굴 한 번 뵈러 다녀왔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스스로가 미워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눈물도 원망도 소용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왜 나는 언제나 한 발 늦는 것만 같지?
제주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찍어둔 사진을 보고,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젠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다시 읽고 읽었다.
이 육체라는 것은 마치 콩이 들어간 콩깍지와 같다.
수만 가지로 겉모습은 바뀌지만
생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불멸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 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스님
늘 늦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자신의 삶을 쉽게 부정하는 나의 영혼을 내가 새롭게 피어낼 수 있을까. 내 영혼을 맑힐 수 있을까. 녹슬지 않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2025. 9. 10
나는 나와 화해할 수 있을까?
장례 둘째 날,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시기 전에 한 숨 돌릴 틈이 났다. 4층 테라스로 나가 제주도의 하늘과 멀리 언덕들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오는데 너무 시원하고 푸르른 것이 순자씨가 보내는 시원한 미소같아서 눈물이 났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녀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간절히 바랐는가. 또 당신은 얼마나 바라셨을까. 아프지 않고 귀여운 새끼들을 보며 지내시기를. 순자씨의 몫만큼은 결코 못해내겠지만, 그녀 몫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수린과 그의 남편 나의 동생 찬이, 그리고 그 둘의 사랑스런 아들 내 조카 오서로를 위해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읊조렸다. 푸른 바람에 내 기도를 실어 보냈다.
그렇게 간절해져버린 내 소망 위에 불현듯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듯, 지난 날의 비겁한 소망이 겹쳐졌다. 누군가가 간절히 살기 바랬던 삶을 더없이 가볍게 여기고 쉬이 놓아버리려 했던 나의 마음, 탁한 영혼이 겹쳐지면서 겉잡을 수 없이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또 그런 마음 중에도 여전히 연말까지 어떻게 돈을 모으고, 또 아쳅토를 수린 없이 홀로 꾸려갈 지, 내 몸에 또 암세포가 생겨나진 않을지를 생각하며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다가올 막막한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나갈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니 다시 또 한번 스스로에게 더욱 화가 났다. 잘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이것 저것을 계획하고 해보다가 며칠 가지 않아 또 또망가고 싶어져버리는 마음. 어찌나 나약하고 게으른지, 스스로에게 또 실망하며 무력해지는 악의 고리.
나를 어루고 달래며, 잘 키워낼 수 있을까?
그날 오후, 육아로 오지 못할 것 같다던 친구 은정이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며 연락을 했다. 무리에 무리를 해서 제주까지 왔을 은정의 마음에 미안하고 고마웠다. 존재만으로 힘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리라. 그립고 보고픈 마음과는 다르게 우린 6개월만에 겨우 이런 슬픈날에야 마주 앉아 이야기를 얼굴 보고 나눌 수 있었다. 순자씨 덕분에 우린 슬픔도 아픔도 함께 충분히 나눴다. 슬픈 김에 내 몇개월간의 아픈 일들도, 앞으로의 막막한 상황도, 나 자신이 너무 밉고 화가 나는 이 마음도 나눌 수 있었다.
가만히 듣고 공감하며 함께 아파해주던 은정은 나에게 그 어느 때보다 '최소화 하기'를 권했다. 뭘 더 해서 해결하려는 마음 좀 내려놓고, 멈추기, 이쯤 하고 쉬기를 제발 해보라는 것이었다.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대론 결코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말. 부디 정신과 몸의 건강을 1순위로 하고, 아무리 못마땅해도 십분의 일만 하고 멈추는 수련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계획하고 하려는 일이 십이라면 그 중의 일 만 해보라는 것.
듣는 것 만으로도 아득해져왔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제를, 만족을, 멈추기를. 그런데 비슷한 사례가 생각이 났다. 바로 지난 주말의 마라톤. 일간스포츠에서 주최한 런서울런 마라톤에 다녀왔다. 내가 신청한 코스는 10KM. 수술 후 회복기간 동안 달리기를 쉬는 바람에, 연습 삼아 조금만 달려도 곧 숨이 허덕여 연습은 1키로 내외로만 달리곤 했다. 그리고 며칠 남았을 때에만 목표의 절반인 5키로를 한 두번 달렸다. 그런데도 당일, 십킬로미터를 완주 했다. 그 때의 기억이 힌트가 되어주었다. 목표의 십분의 일만 하고 멈추기. 계속 하기 위해서.
내 문제에 대해 용기내어 위선을 벗고 깊이 나누다 보니, 나의 뿌리 깊은 미움의 시작엔 '실패'가 있었고, 실패를 판단하는 것은 당초 내가 세운 계획의 달성율을 기준으로 했다. 나는 나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 너무나 큰 기대와 목표를 건 것이다. 그리고 여러가지의 목표를 동시에 세우곤 했다. 그런 다음 몇가지를 못한 부분에 초점을 크게 두고 자신을 과하게 혼냈다. 왜 이것 밖에 하지 못했느냐고. 지금 이럴 때냐고. 그러면 어쩐지 스스로가 참 못난 사람으로 보이며 자신이 없어지곤 했던 것이다. 성취보단 실패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나를 채근하며 지냈다. 그 마음이 나를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거다. 내가 이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의 프로젝트를 최소 서너명이나 보통은 열 명 내외의 사람이 붙어 각자의 역할을 맡아 완수하던 일정과 일의 볼륨을, 혼자서 하는 일에도 같은 속도와 양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여전히 내가 벗어나고 싶던 각팍한 상업주의 시스템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몰아붙이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에너지의 분산을 가져오고, 자연스레 일의 만족도도 낮아지고, 성과든 기한이든 모두 지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왜 나를 이토록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왜 삼년이 지나도록 새로운 환경에 맞춰 나를 다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2025. 9. 11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기다려 주기.
이젠 왜 보다도, 무엇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월요일 독서모임이 있던 밤, '끈기의 말들'을 읽어 주신 책 친구 은빈님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왜' 같은 의미나 거창한 명분과 목적, 목표를 생각하면 어쩐지 모든 것에 심하게 검열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을' 해볼까. '어떤 것'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면 조금은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선택 할수도 있을 것이다.
홀로 파고들어 깊이 침잠하며 나를 매섭게 채찍질하기를 좋아하던 나는 이렇게 수면 밖으로 나와 이어지고 줄을 건네받고 하면서 숨쉴 길을 찾아간다. 나는 나를 이해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나를 헤아려주고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 늦었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아주 작은 십분의 일의 기대로 나를 바라보자. 내가 세상에 기대하지 않기에 쉽게 감탄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나 스스로에게도 조금만 더 쉽게 길을 내어줘보자. 자신은 없겠지만 그 어떤 것보다 나에겐 지금, 나 자신과의 화해가 시급하다.
내가 이틀 전 제주의 푸른 바람을 맞으며 순자씨에게 간절하게 보낸 그 소망의 기도가, 그저 어딘가로 흘려보낸 바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생에 녹슬지 않고 직접 가꾸어가며 새로이 피어나며 작더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
나도 그렇게, 내 삶을, 마음에 불어온 푸른 바람을 기억하면서 피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