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돈을 받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2025년 11월 17일 문장밥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책을 읽거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가슴속에 고인 이야기들을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충분히 꺼내어 마주하지 못해 툭 치면 팍 터지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20대 때 컴퓨터 방문과외를 하러 다닌 적이 있어요. 돈도 힘도 있는 이들인데도, 어디에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꺼내놓지 못했는지, 경청해 줄 사람은 곁에 두지 못했는지 제가 수업하러 가는 날이면 추가 시간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조금만 더 이야기하다 가달라고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났습니다.
한병철 철학자는 그의 책 <타자의 추방>에서 오늘날 우리가 점점 경청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에고에 집중하며 사회 전체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그 주요 원인이라고도 해석하고요.
경청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귀해져 버린 경청은 선사하는 것, 즉 선물이라고 합니다. 경청이 선물이 될 수 있다니. 요 몇 개월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져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픈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이 해석이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아직 내가 소중한 타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눌려있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웅크려있지만 말고, 먼저 다가가 다른 삶과 존재에 눈과 귀를 기울이며 경청을 선물해 보아야겠습니다.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를 경청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쫓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 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