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보너스라면
우리 이번에 인도여행기 책*을 다 같이 읽었잖아. 책 읽으면서 예전에 인도 여행 갔다 왔던 게 계속 생각나는 거야. 나는 책의 내용처럼 구루들을 만나거나 영적인 경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면 묘하게 더 아련하고 영적인 경험을 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재밌었어. 벌써 인도에 다녀온 지 10년이나 되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한 틈을 타서 이리저리 살이 붙고 흐려지고 하는가 봐.
기왕 인도를 가는 김에 네팔도 여행했는데 인도-네팔-인도 이렇게 중간에 네팔을 끼운 일정이었거든. 그리고 그 해에 네팔 대지진이 일어났어. 그때 인도에서 네팔로 넘어가면서 한 달짜리 비자가 좀 비싸길래 이 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받았던 2주짜리 비자에 맞춰 출국하느라 나는 살았어. 2주 가지고는 유명한 트래킹 코스에 가기에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걸 네팔에 입국해서야 알았고, 그때서 기간을 연장하기엔 추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거야.
지진이 일어나던 날, 오후에 그 난리가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엄청나게 아쉬워하며 국경마을로 가는 버스에 올랐어. 만약 한 달짜리 비자를 받았다면 그때 ABC캠프에 올라갔을 거고 지진이 났을 때 산 꼭대기 근처나 못해도 산 중턱쯤에 있었을 거야. 땅이 갈라지고 꺼지는 와중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거지.
운 좋게 살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엄청나게 고생을 했겠지. 그때 정말 난리도 아니었거든. 네팔에서 인도로 넘어가던 날, 원래는 국경 마을에서 1박을 하고 그다음 날 기차를 타기로 했었어. 그런데 여행 책자나 인터넷 어디에도 정보가 없던 바라나시행 버스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버스 앞문에 매달린 남자가 목이 터져라 바라나시라고 외치는 걸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얼른 버스표를 사서 인도로 갔어.
비가 새고 덜컹이는 버스를 12시간이 넘게 타는 바람에 차멀미에 시달리느라 전날밤에 일어난 대지진 소식은 오후가 되어서나 듣게 됐어. 어쩐지 실링팬이 많이 삐걱대더라 생각하면서. 그 국경마을에서도 12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나는 그때 이미 죽었고 이후의 10년은 모두 내 꿈일지도 모른다고. 다 꿈인데 이렇게 고생스럽고 현실적인 꿈을 꾸냐 싶을 수 있지만 내 상상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기도 해. (ㅋㅋ)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심리학적으로는 그저 자기 합리화고 방어기제라고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나는 그때 몇 번이나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았으니까.
꿈이라면 더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고,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면 어차피 보너스인 인생 좀 대충 하면 어떻고 좀 어설프면 어떻냐고 말이야. 그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고 동시에 모든 게 소중해져. 돈이나 남의 시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별 상관없는 것이 되고 풀 위에 돗자리를 깔고 햇빛을 쬐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지는 거지. 알 게 뭐야 죽을뻔했는데.
어제는 돗자리랑 책이랑 그림 그릴 것을 챙겨서 혼자 소풍을 갔어. 듬성듬성한 나무 그늘 밑에 돗자리를 깔고 엎어져서 책을 읽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사진을 찍다가 왔지. 나무 그늘이 너무 듬성했는지 어깨 쪽이 살짝 그을려서 조금 쓰라린걸 오늘 아침에 발견했어. 발갛게 달아오른 어깨가 어제 쬔 햇빛을 꽉 붙잡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갑자기 엄청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날씨 좋을 때 이렇게 그을려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시간 날 때 꼭 돗자리 들고나가서 누워있어 봐.
어제 그린 그림을 같이 보내!
또 편지할게~!
인도여행기 책*
삶예글방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첫 번째로 읽은 것이 류시화 시인의「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