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끝났다.
신정 구정도 지나갔다. 블랙 프라이데이 사이버 먼데이 세일을 지나 눈 돌아가게 쏟아지던 연말 세일들이 지나가고 진짜 이 가격인가 싶은 끝물 일월 세일도 다 끝났다. 휴우.. 십일월 추수 감사절부터 시작된 연말 분위기는 조여놨던 나사들을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놓은 듯 먹고 마시고 쇼핑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보다 더 큰 세일들이 쓰나미처럼 몰아닥치니 일 년 치 화장품과 여름옷 쟁이기까지 사이트마다 엄선된 장바구니를 끊임없이 재정비하는 나의 열정과 부지런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잦은 모임과 행사들로 풀어진 식단에 살은 이 삼 킬로 더 쪘고 새 해를 시작하는 나는 물건이 더 늘어났다.
미국 일반 가정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서비스는 보통 육십 갤론에서 구십 갤론 짜리 쓰레기통에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따로 모아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 트럭이 오는 날에 길가에 내어 놓는 식이다. 부피가 큰 가구나 전자 제품을 처리하려면 따로 쓰레기 소각장에 싣고 가서 돈을 내고 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일 년에 서너 번 부피가 큰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날이 있다. 여기선 이 날들을 clean up day라고 부른다. 이 날짜들을 잘 기억해 놓았다 미리 정리에 들어가 버릴 물건들을 잘 분류해 놓으면 쓰레기 트럭이 오기 전 날 길가에 내어놓기만 하면 된다. 우리 동네는 어제가 clean up day였다. 어느 집에서 나온 살림살이인지 모르지만 유행이 지나고 오래된 가구들이나 부서진 의자 더 이상 쓰지 않는 티브이나 전자 제품들이 작은 산을 이루며 길가에 쌓인다.
편리하게도 일월 말에 잡힌 clean up day 스케줄은 마치 연말 동안 사들인 물건만큼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비워내라는 계시인 것도 같다. 한 달 넘게 페이스가 깨진 생활로 아직 게으름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나는 이번에 제때 이 날에 맞추어 정리를 하지 못했다. 겨우 내내 뒷마당 한구석에 버려져있던 낡은 의자 하나를 내어놓았다.
늘어난 옷들로 잘 닫히지 않는 서랍장 세일 때마다 사다 모은 각종 살림살이들 돌아보면 집구석구석 쌓여있는 물건들에 한 숨이 나온다. 정리에 돌입하기 전 우선 커다란 쇼핑백을 복도에 하나 던져둔다. 오며 가며 필요하지 않다 싶은 물건들은 이곳으로 직행하기로 식구들에게도 일러둔다. 몇 해전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기술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비워내고 정리하는 가벼운 삶에 열정적이었다. 지금은 그 책도 정리 대상의 목록이 된 채 어딘가에 쌓여있지만. 2020년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락다운이 되던 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같은 절박함을 느꼈다. 새벽 해가 뜨기도 전에 오픈하지 않은 마트 앞에 길게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꿈을 꾸듯 비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면 마지막 남은 휴지를 사기 위해 서로 밀쳐가며 뛰어가던 덩치 큰 미국 사람들 속에선 공포감이 엄습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만 사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은 개나 줘버려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가장 필요한 생필품만큼은 몇 개월은 버틸 수 있는 양을 항상 비축해 두게 되었다. 그 이외에도 많은 것을 다시 사들이게 되었지만.
그래서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고. 계절마다 옷 정리를 할 때 다시는 내가 기필코 ‘사지 않는다’ 결심했지만 지난겨울 새로운 카디건이 세 개에 바지가 다섯 개, 원피스 하나, 조끼 하나, 레깅스가 하나, 스웨터가 하나, 재킷이 하나, 여름 블라우스가 둘, 신발이 두 켤레, 가방 하나 아.. 그리고 또 수많은 물건들. 이만큼이 나 하나만을 위해 겨울 동안 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아마 더 있으리라. 옷장 속엔 올 겨울 한 번도 입어주지 못한 옷들이 아직 걸려있다. 미니멀리스트들의 바이블을 따르자면 일 년 동안 쓰지 않은 물건은 가차 없이 처분하라고 하던데 억지로 입고 쓸 명분을 만들더라도 버리지 못할 물건들이 태반이다.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는 물건은 버리라고 했지만 추억이 있는 물건들에 집착하는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한 추억을 간직한 물건들이 많다. 물론 추억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이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버리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않는 이 애매한 사각지대에 있는 물건들을 중고판매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로 옮겨놓기로 했다. 이용한 지는 일 년이 넘었지만 마음속에 작으나마 불씨가 남아있는 물건들을 시간 날 때마다 인터넷 중고 판매에 올렸다. 팔린 물건이 있을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고 팔리지 않은 물건들은 무조건 기부하기로 했다. 물건이 나가고 비워진 공간은 되도록이면 다시 채우지 않고 빈 공간의 여유를 느끼고 싶다.
밸런타인의 하트와 초콜릿의 대향연이 끝나고 앞으로 또다시 수많은 기념일들을 겨냥한 세일들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집 밖을 나서지 않아도 소셜미디어로 이메일로 준비되지 않은 마음들을 얼마나 흔들어 될 것인가. 시장 경제의 끝판왕과 같은 미국에서 끊임없는 마케팅의 홍수 속에 휩쓸리지 않고 올 한 해 버텨보기로 각오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