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남편 친구 중 나와는 크게 가까울 일이 없었던 사람과 함께 놀았다. 남편이 친구들 우르르 모아 캠핑 가는 걸 좋아하기에 그때마다 한 번씩 짧은 근황 정도만 묻던 사이였다. 짧은 대화였지만 좋은 인상을 받았던지라 남편과 달랑 셋이 만나도 어색함 없이 재밌었다.
뉴포트 백베이는 주차장과 비치의 경계가 모호해서 차에서 패들보드를 꺼내 몇 발자국 안 걸어도 보드를 띄울 수 있다. 남편은 내가 혼자 패들링을 할 수 있게 보드에 핀을 달고 패들을 조립해 놓고는 그 친구와 자전거를 타러 갈 참이었다.
"당신이 차 키 가지고 있을래? 패들링 우리보다 빨리 끝나면 춥잖아."
"그래!"
(키를 주려던 남편이 갑자기 멈칫하며)
"근데 이건 정말 진심인데... 키 잃어버리면 안 돼! 알지?"
남편이 저 문장에 진심까지 담아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나도 동의하기에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다.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면서 남편은 한번 더 소리쳤다.
"차 키를 패들보드 D링에 걸어 고정시켜! 주머니에 넣지 마! 알았지?"
'이래 봬도 마흔인데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하면서도 D링에 고정시켜 본다. 살아보니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남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부는 날이었다.
고행수도인지 여가생활인지 헷갈렸던 패들링을 마치고 터벅터벅 차에 기어들어간 나는 '나의 문어 선생님'에 나오는 다친 문어였고 한 없이 혼자 있고 싶었다. 집에 있을걸 괜히 나왔다 싶었다. 이런 내 심경과는 무관하게 때마침 멀리서 남편과 친구가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오고 있다. 보통의 어른은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표정으로 얼굴을 재단장하겠지만 나는 이상한 사람이므로 세상 힘든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입을 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못마땅)"
"어. 당신 괜찮아? 표정 무슨 일이야?"
"나 바람 때문에 죽을 뻔했어. 911 부르기 직전이었는데 바람이 멎어서 겨우 차에 올라탔어. 도저히 여기까지 패들링 할 힘이 없어서 패들보드 저 멀리 물가에 던져놓고 걸어왔잖아."
내 표정을 본 남편 친구는 갑자기 자기 차로 달려가더니 내게 음식 꾸러미를 내밀었다.
내 표정이 어떻게 그로 하여금 음식꾸러미를 냉큼 들이밀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음식을 보자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졌다. 로스트 치킨, 랜치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있는 온갖 야채와 과일 등을 내밀었는데 그 조화로운 색상을 본 나는 더 이상 다친 문어가 아니었다.
애기당근 하나를 랜치소스에 찍어 '와그작' 씹으며 달아난 정신을 불러 모은다.
"그래서 너는 생물학자니까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가 태양을 받으면서 산책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원리가 혹시 우리 몸에 있는 태양 배터리가 충전되어서 그런 거야? 인간은 전자기적(electromagnetic) 존재이기도 하잖아(믿고 싶은 방향으로 질문 유도 하는 편)."
남편은 내 질문이 문자 그대로임을 알기에 '사람 몸에 태양 배터리' 소리에 빵 터졌지만 그 친구는 웃지 않았다. 그 친구는 최대한 나의 무식이 식에 폭력 당하지 않는 방식으로 - 그러나 전자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 산책과 기분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완곡어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완곡은 괜찮게 들렸다.
산책에서 시작된 얘기는 그의 약혼녀로 관계의 문제로 삶의 이야기로 뻗어나갔고 모래 위에 널브러진 우리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까지 비몽사몽 따땃한 해를 베개 삼아 아무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한쪽으로만 누워있어서 콧등과 눈썹산이 한쪽만 벌겋게 탔음을 깨달은 나는 집에 가자고 반 수면 상태의 두 사람을 쿡쿡 찔렀다.
"아까 치킨 잘 먹던데 집에 갖고 가! 많이 남았네."
"아니야, 너 혼자 사니까 밥 하기 귀찮잖아. 갖고 가서 샌드위치 해 먹어!"
"아니 나 연구실에 먹을 거 많아 괜찮아. 너 갖구가."
치킨 먹다 남은 게 뭐라고 훈훈해질 뻔.
미국 사람이 저렇게 한국 정서스럽게 사양하는 건 또 처음 봤다. 받고만 있을 한국인이 아니기에 나는 내가 아끼는 초콜릿맛 프렛첼 한 봉다리를 쥐어 줬다.
어떤 사람은 별로 안 친해도 하~나도 안 불편한 사람이 있다. 도대체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은 정체가 뭘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곧 친해진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옆에 있으면 따뜻해지는 특성이 있는데 이 따뜻함은 대대손손적인 느낌도 있고. 그 집에 놀러 가면 가족들 다 그렇게 생겼을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따스하다는 걸 알겠는데 그걸 숨기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편안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