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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 라이너가 말랐다

by ACCIGRAPHY




아침에 샤워를 하다 오래된 화장품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조 없이 기초만 하는지라 화장품이 없을 줄 알았는데 곳곳에 많이 숨어있었다. 버려질 화장품들이 내어 준 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흐뭇했다. 내일은 안 입는 옷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납작한 유리병에 든 젤 라이너가 눈에 들어온다. 꽤 오랜 기간 열지 않았음에도 화장대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 친구가 사준 건데 둘 다 넉넉지 못했던 대학원생 시절, 큰맘 먹고 내게 사 준 애틋함이 세월의 흔적에도 잔잔히 묻어난다.


욕실처럼 비교적 좁고 밝은 공간에는 사물 간에 실용적, 심미적, 감정적 패권 싸움이 다른 공간에 비해 자주 일어난다. 젤 라이너가 매일 사용되는 펜슬 라이너보다 상석에 위치한 것도 감정전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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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열지 않게 된 이 젤 라이너처럼 우리 사이도 버석해졌다. 이제 버석함을 넘어 이 친구는 내 삶에서 탈락되었다. 가을에 나뭇잎이 나무에서 땅으로 탈락하듯 내 인생에서 툭.


작년까지만 해도 그녀가 탈락된 줄 모른 채 나는 간간이 연락을 했었고 그 친구도 회신을 주었다. 그러다 올해 갑자기 그냥 받아들였다. 그래. 충분히 아름다웠다. 서로 사랑했으니 됐다. 오랜 친구들이 하나 둘 없어지는 나이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운 거다.




친구와 함께 살던 시절, 그녀는 부모님 보러 가는 주말이면 나 먹으라고 소고기 뭇국을 한 솥 끓여놓고 가곤 했다. 새초롬한 사람이 뭇국을 한 솥 끓여놓은 게 웃긴 데다 맛있기까지 하여 주말 내내 먹으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빈 강의실에서 둘이 몰래 치킨 시켜 먹으며 여자 둘이 한 마리 클리어 무슨 일이냐며 미친 듯 웃던 일. 친구가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날 전화기에 대고 대성통곡했던 일. 베라 쿼터사이즈를 녹차로만 가득 채워 말없이 함께 흡입하던 수많은 밤들이 언뜻 떠오른다.


내 젊음의 도처에 있었던 사람.

그녀는 내 젊은 날을 웃음으로 꽉 채워준

귀한 사람이었다.




말라버린 젤 라이너를 회생시키는 릴스가 생각나서 따라 해본다. 열심히 비벼대는 내 손짓이 마치 친구의 탈락을 무효화하려는 몸부림으로 다가와 잠시 멈추고 거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 심장에 붙어있던 크기만큼 구멍이 났구나.’


가족 있고 친구 있고 뭘 구멍씩이나 할 수 있겠지만 어떤 인간은 정말 큰 구멍을 남길 수 있다.




처음의 쫀득한 제형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했지만 퍼석함을 없앨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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