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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주는 선물

by ACCIGRAPHY





진부한 것들을 좋아한다.


뻔한 것들도 좋아하고 촌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은 왠지 남의 브런치 계정에서 볼 법한 저런 진부한 제목을 달고 싶었다. 나는 진부한 걸 좋아하지만 아직 그런 것들을 표상할만한 경지의 인간은 아니다.


제목을 먼저 써 놓고 글을 쓰는 게 어색하지만 저 제목이 나를 웃겼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계속 써 본다. 저항 없이 웃음 터지는 것들 중엔 진선미眞善美스러운 것들이 종종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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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또 이렇게 죽는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들도록 비행 - 땅에 붙어있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모든 감각 현상 - 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 여행이 끝나버려서 그것에 대해 뭘 해볼 여지가 없다는 것이 죽음과 닮았다.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은 여행지에서 썼던 일기를 들여다볼 때. 선물 개봉이 시작된다.


'에잉?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했지? 뭐 하러 남편이랑 싸우고 스트레스를 받았지? 뭐 하러 저리 열심히 계획을 짰데? 뭐 하는 짓이야 그냥 거기 있는 거 자체가 재밌는 건데… 그럴 일이 아닌데…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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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이 아님’을 여행 중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일상'과 '현생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커피맛이 즉시 다르게 느껴지고 발바닥에 닿는 거실의 촉감이 생생히 살아난다. 지금 내가 집에서 여행 중임을 자각한다.


여행이 잦았던 내 삶에는 삶과 죽음이 빈번했기에 가끔은 이렇게 많이 살고 죽었는데도 마흔밖에 안 됐나 싶다. 그래도 하나는 배웠다.


그럴 일이 아님을 알고 여행하다 집에 간다.

그럴 일이 아님을 알고 살다 죽는다.




한참 글을 쓰다 무심코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찍혀있다. 연락처에 없는 번호라 무시할까 하다 최근에 받았던 명함들을 뒤져본다.


수개월 전 구두로만 약속했던 프로젝트 관련자의 번호. 재밌어 보여 하겠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실무자가 아닌 기관장 번호가 찍혀있어 갑자기 부담스럽다. 회신 버튼을 누르기 전 요동치는 마음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럴 일이 아니야. 여행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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