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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 물조장

勿忘 勿助長

by ACCIGRAPHY




거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가에 앉아

새벽이 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착한 남자친구처럼 매일 창 밖에 먼저 와서 기다리는 새벽을 가만히 보노라면 이내 나도 그것이 되어버려 감상이 불가능해진다. 나는 감상하는 게 재밌으니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몰입을 흩트리려 창문을 살짝 들어 올린다. 새파란 물결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들이닥치고 노트북 위에 가지런한 두 팔의 잔털들은 일제히 기립한다.


너무 좋단다.

사람이 폐로만 호흡하는 게 아니라며. 자기들도 바람을 좀 쐬어야 살 맛이 난단다. 그래? 알았어. 말 나온 김에 바람 제대로 맞혀주마.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 침대 위에 자고 있는 남편을 콕콕 찌른다. 찔림 당하면서도 비몽사몽 나를 보고 웃어주는 그는 내 인생에서 착한 남자친구역이다(그의 인생에선 내가 무슨 역할인지 물어본 적은 없다. 뭐가 됐든 기꺼이 해 줄 참).


"지금 일어날 필요는 없는데... 우리 오늘 바닷가 가야 되거든? 일단 실컷 자!"


남편은 메시지보다 표정과 말투에 주목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주요 메시지는 본문에 숨긴 채 서론과 결론이 최대한 가볍고 상냥하게 들리도록 연기한다. 부부의 삶은 이리도 고단하다. 내 법계의 상식은 그의 세계에서 생소한 무언가이기에 서로의 입장에서 말이 되는 화법을 쓸 수밖에 없다. 괴롭지만 사실 재미도 있다. 모든 고단한 것들이 그렇듯이.




파이러츠 코브(pirates cove)의 바람은 해풍 특유의 끈적임이 없었다. 보송한 바람이 점차 강해지자 헤벨레 좋아하던 모공들이 슬슬 닫히고 이내 뾰족하게 티피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나는 못 이기는 척 코코넛 워터를 챙겨 경사진 모래밭으로 걸어가 철퍼덕- 누웠다.


모래의 질감과 온도가 환상이었다.

'환상', '예술' 이런 말 안 좋아하지만 정말 환상일 때는 별 수 없다. 아니 왜 진작 모래에 안 눕고 남편이 가져온 선베드에 누웠을까 그 안일함에 한심함 마저 일었다.


철퍼덕 누운 다음 할 일은 내 몸에 딱 맞는 모래침대를 만드는 일이다. '나는 모래 속에서 오래 살아온 벌레다~‘ 착각하며 두어 번 꿈틀대다 보면 뚝딱 만들어진다.


세상에…! 따뜻하고 내 몸에 착 감기고 난리 났다. 이런 인체공학적 침대를 놔두고 먼발치에서 선베드에 누워있는 남편이 안타깝지만 각자 살아내야 할 개인의 시간이 있으므로 개입하지 않는다. 나에게 좋은 것이 그에게 좋으리란 법이 없다.


모래침대의 단점은 빈틈없이 착 감기다 보니 최초의 쾌감 시점으로부터 5분 정도가 지나면 돌연 감옥이 되어 나를 옥죄여온다는 것이다. 모래 입장에선 어쩌라는 건지 어이가 없을 것이다. 나도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라서 피차 모른 채 하고 목말라 일어난 사람처럼 코코넛 워터를 마신 후 바로 옆에다 새 침대를 만든다.


꿈틀꿈틀... 하아... 미쳤다...

다시 찾아온 이 극강의 편안함...!


내 몸 형상의 모래틀을 열 개 정도 쪼롬히 만들어놓고 집에 왔다. 쾌락이 열 번, 고통이 열 번 발생했지만 재밌었기에 후회 없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몸에 수영복 자국이 선명하다. 목에 하나밖에 없던 주름도 다섯 개로 변했다. 검색앱을 열고 '목주름 갑자기'를 입력, 과장이 덜해 보이는 제목을 골라 몇 개 읽어본다.


자외선 탓이란다.


'흠... 그래 목에 줄 좀 생긴 거 어쩌라고' 하며 부엌으로 걸어가는데 햇볕에 꿉힌 부위의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마이클잭슨의 절도 있는 추임새가 들려온다. 이게 이렇게 아플 일이냐고 남편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당신은 어제 태양이라는 별로부터 화상을 당한 거야. 별은 불덩이니까 아플만하지."


의문사(이게 이렇게 아플 일이냐?)를 사용한 내 잘못이었다.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에 설명으로 응수하는 남편의 올곧음으로 인해 두 배로 더 따갑기 시작한다. 참다못한 모공들이 말한다.


사실 새벽에 창문 여는 정도로 자기들은 충분히 해방되었다고.




물 근처의 모래는 축축해서 안 눕는다.


勿(styx, 3000px X 1000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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