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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28. 2022

모로베이에서 남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남편의 쫌생이 모먼트


남편은 공사를 막론하고

약속 시간에 민감한 편이다.


나는 업무 미팅이 아닌 이상 친구들 사이에 조금 늦거나 기다려 주는 것에 별 감흥이 없는 편이라 친구들과 함께 뭘 하는 날은 남편과 사소한 충돌이 자주 난다.


참고로 남편과 함께 노는 친구들은 남편도 나도 편한 정말 '친구'들. 남편이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은 내 친구들은 나는 당연히 혼자 따로 만난다.  


"나 그냥 먼저 하이킹 갔다가 12:30분에 돌아올게."


"얘들 이제 거의 다 왔데. 같이 가!"


"아까부터 거의 다 왔다며! 나 그냥 먼저 갔다가 12:30분에 차에 돌아올 테니까 자기는 차에 있던지 나랑 같이 가자."


평소에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시간'에 저렇게 예민한 걸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쾅!"


차문은 닫히고 남편은 정말 가버렸다.

덩그러니 적막강산 차 속에 홀로 앉은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편 욕을 해본다. 장거리 운전인데 늦을 수도 있지 왜 저러나 싶다.


마침 파란색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사이드미러에 앉아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냥 파란색이 아니라 파란 무지개 빛이 도는 새였다. 파란 깃털을 지닌 새를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은 처음인지라 털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털 색깔이 신기해서 그만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는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고 10분 정도? 도망가지도 않는 그 파란 새를 보고 있자니 친구들이 도착했다.

부부싸움 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을 주차장 앞에 있는 모로베이 바닷가로 몰고 갔다.


"남편은 우리 하이킹할 코스 한번 먼저 보고 12:30분에 올 거야! 여기서 좀 놀다 가자!"




친구들과 바닷가에 앉아있는데 바닷가 모래가 생전 처음 보는 색깔이다.


신기했다.

모래알이 매우 굵었는데 각각 호박이나 옥, 자수정 같은 색으로 한 알 한 알 개성이 넘쳤다. 신기한 모래알 생김새에 충격을 받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독특한 컬렉션 만들기 대회에 돌입했고, 대상의 영예는 모래알로 무지개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버린 친구에게 돌아갔다.


"근데 무지개 완성하고 싶은데 암만 봐도 파란색이 없어! 파란색 보여!?"


"원래 청금석 같은 거 말고는 자연에 파란색은 잘 없어 그냥 포기해. 델프트 도자기가 괜히 유명했겠어? 이제 12:30분이다 얘들아! 남편 차 있는 데로 슬슬 가보자!"




12:30분에 돌아온다던 남편은 과연 철석같이 그곳에 있었다.


차에 혼자 앉아 기다리는 남편의 뒷 머리통이 시야에 먼저 들어왔는데 왠지 풀이 죽어 보였다. 앙심 오래 품기에 재능이 없는 나는 남편을 보자마자 격한 반가움을 표시했다.

남편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으로 웃었다.


혼자 걸으며

조금이나마 마음정리를 한 모양이다.

뭐 때매 힘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라 그저 원 없이 맘대로 있도록 놔둔다.




다 함께 짧은 하이킹을 마친 우리는 패들보드를 타러 갔는데 물이 너무 잔잔한 데다 해가 질 무렵이라 낮게 떠 있어서 그런지 황금빛 쟁반 같았다.


이런 황금 쟁반 물은 또 처음이었다.


모든 물은 유일무이하고 같은 장소라도 태양의 위치나 바람에 따라 얼굴을 달리한다.  겨울에 못생긴 가슴장화를 입는 한이 있어도 패들링을 멈출 수가 없는 이유다.


패들링으로 심신이 적당히 지친 우리는 해산물로 유명한 집에서 거나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한방에 뭉쳤다.


컵라면과 햇반, 시댁 근처 사는 친구한테 받은 오징어, 아이스크림, 오렌지 등 알 수 없는 조합의 음식들을 펼쳐놓고는 다들 널브러진 채 훌루에서 방영하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리얼리티쇼를 새벽 2시까지 보았다.




지친 몸으로 우리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침대에 눕기 바빴다.


"자기 아침에 허리 아프다며, 왜 그래? 괜찮아? 등 좀 밟아줄까?"


"어. 명절 후유증인가 봐, 허리가 좀 아프고 바로 못 펴겠어."


나는 천근만근의 몸을 다시 일으켜 남편의 등을 10분 정도 밟아 주었다.


등을 밟으면서 오늘 남편의 이상행동이 명절 증후군에서 기인했다고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그리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나와 함께 남편 욕을 해준 파란 새. 십분 넘게 앉아 있다가 날아갔는데 신비한 색을 가만 쳐다보고 있자니 화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모로베이 바닷가의 독특한 모래알 색깔과 크기. 무지개색을 모아버린 이 친구를 이길 자는 없었다. 테니스 선수, 요기를 거쳐 현재는 산부인과 의사인 일본계 미국인 친구


파도가 휘몰아치는 모로베이 해안선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저 멀리 상단에 보이는 바닷가에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린 나와 친구들.


독특한 모래알 컬렉션 대상 수상자와 그녀의 동생이 함께 패들링을 하는 모습. 수면이 너무 잔잔해 유리거울 같았다. 우측 돌섬이 모로베이의 모로락 (Morro Rock)





#미국여행 #미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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