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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Dec 30. 2022

불면증 걸린 아저씨에게 부적을 써 드렸다



스물세 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가면 황금지붕 건물이 있는 예쁜 길이 있다.

거기 앉아 하루는 글씨를 쓰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왔다.  


"이거 부적 같은 거 써주는 거예요? 나도 하나 써 줄 수 있어요?"


나는 내 글씨가 부적으로 불리든 문신용 디자인으로 불리든 (유럽 사람들은 내 글씨가 문신 디자인이라고 흔히들 생각했다) 개의치 않았다. 그저 그들이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뭐 써드릴까요?"


"아. 내가 잠을 잘 못 자서... 보스니아 내전 참전 후로 잠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어요. 잠을 좀 잘 자보고 싶어요."


보스니아 내전이 대체 언제 적 일인데 그때부터 잠을 못 잤다니… 정말 세상에는 다양한 고통이 있구나 싶었다.


어릴 적 만성 불면증을 겪었던 나는 그 아저씨의 고통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아저씨가 진심으로 잘 잤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씨를 써 드렸다.  


글씨를 받아 든 아저씨는 자신이 직접 본 전쟁의 참상, 그리고 전쟁이라는 명목하에 누군가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잠 못 자는 고통을 한 시간 정도 토로하셨다. 환경을 바꾸면 나아질까 하여 자기 나라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이주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저씨가 얘기를 하시는 동안, 사실 아저씨 뒤에 몇몇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참다못한 몇몇 사람들은 중간에 아저씨 말을 끊고 내가 땅바닥에 써 놓은 글씨들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너무 오래 얘기해서 미안하다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한차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정적이 찾아왔다.


오스트리아의 여름은 한국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후끈했고, 점심을 먹지 않은 데다 한낮의 열기로 살짝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샌드위치라도 사 먹을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까 그 불면증 아저씨가 손에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나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덥죠? 아까 너무 고마워서 아이스크림 사 왔어요."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입을 베어 물자 두통과 더위가 사르르 꺾이는 기분이 들기도 잠시, 아저씨의 '불면증 한풀이 시즌2'가 시작되었다.


남의 감정이 오롯이 흡수 잘 되는 체질이었던 나는 그 아저씨가 안 됐으면서도 체력적으로 더 들어주기 힘든 상태에 도달했고,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생에 다시 못 만날 사람일 것 같아서 계속 열심히 들어주었다.


아이스크림이 없었다면 아마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일 년이 지나 아저씨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자기 침대 위에 내가 써준 글씨를 붙여놓고 잤더니 잠이 한결 잘 온다며 고맙다고, 아직도 여행 중이냐고 물어보셨다.


그때 나는 믿게 되었다.

그때 내가 써 드린 것이 부적이 맞았고,

부적의 효능은 내가 쓴 종이 쪼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면증 아저씨에게 써 드린 두 글자 '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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