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CCI Feb 09. 2023

무서운 타호 호수




타호호수는 온통 눈세상이었어.


멀리는 설산이, 가까이 찰랑이는 물은 투명하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의 청량함으로 넘실댔지. 

둥글둥글 거대 조약돌처럼 생긴 암석들이 물속에 늠름한 자태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데 얼른 보드에 올라타서 그것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패들보드를 타다가 죽을 뻔한 적이 단 한번 있었는데 바로 이날이야.

내가 드라이수트(방수복)만 있었더라도 면할 수 있었던 사고였지만, 풍경에 정신을 잃은 나는 앞 뒤 분간 없이 물에 뛰어들어 버렸고, 손가락 발가락 동상이라는 삶의 경험값을 치렀지. 


바람도 심하고 겨울이다 보니 아무도 패들링 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추운 날씨에 젖으면 큰일 난다고 남편은 한사코 말렸지만 나는 그날 그 풍경에서 패들링을 하지 않으면 내 인생 전체가 무의미해질 것 같았어. 


평소 함께 패들링을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였는데 그중 한 명은 나와 생각이 같았어. 우리는 보드를 끌고 신나게 물 쪽으로 다가갔어. 


보드 뒷부분의 핀 높이 때문에 종아리까지는 물에 젖어야 보드 위에 올라탈 수 있어서 다리가 젖었는데, 순간 이게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어. 액화질소에 발을 담근 기분이랄까? 비현실적인 차가움이었지. 


일단 열심히 땀 내면서 패들링 하다 보면 발에 물기는 날아가리라 안일한 믿음을 품은 채 열심히 패들링을 시작했어. 


초반 파도치는 구간을 넘어가려면(타호 호수에는 파도가 있어) 좀 열심히 패들링을 해야 하는데 너무 집중해 버렸는지 몇 분 사이에 너무 멀리 왔다는 걸 깨달았고, 마침 그 구간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어. 뒤돌아보니 같이 출발한 친구는 파도구간을 넘지 못하고 물가에서 놀고 있더라. 


세찬 바람에 밀려 큰 돌들이 몰려있는 구석으로 강제 이동을 당했는데 나는 보드가 앞뒤좌우로 그렇게 사정없이 들렸다 내리 꽂히는 경험은 처음이었어. 그 구간에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바람과 물살의 힘에는 당할 수가 없었어. 


당이 떨어지고 체력도 바닥나고 체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는 게 느껴졌어. 손가락과 발가락은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지. 


나는 구석에 처박힌 김에 돌 위에 올라가 한참을 쉬었는데 몸이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한 느낌이 사악 들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야. 


이렇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남편한테 이 모험담을 꼭 말해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니스트 섀클턴의 비장한 각오를 떠올리며 패들링을 다시 시작했어. 


나는 뱃사공들이 뱃노래를 왜 부르는지 그때 깨닫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패들링을 할 때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지!'이 두 문장을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고 있더라? 진짜 웃기게도 너무 효과가 좋았어.

그때 자작 뱃노래를 안 불렀다면 결과가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필사적으로 구석에서 빠져나와 출발지점으로 방향을 틀자 저 멀리 남편이 보였어. 

남편은 나를 포착하곤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비치타월을 흔들었어. 비치타월이 그렇게 포근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또 처음이었지. 


당연히 갖춰야 할 준비물을 갖추지 못했을 때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배웠어. 신났을 때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다음에 타호로 겨울 패들링을 가게 되면 꼭 드라이수트를 입고 천천히 노를 저으며 풍경을 감상해 볼 생각이야. 




돌 위에서 한숨 돌리다가 저체온증을 호소하기 직전의 아찌. 겨울 패들링은 반드시 드라이수트와 함께! 이야금 그림 YAGEUMEE ILLUSTRATION 2023



작가의 이전글 퍼포먼스를 할 때 드는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